내 회사를 내 회사라고 부르지 못하는 나라
등록 : 2014.09.28 20:03수정 : 2014.09.28 22:42툴바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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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유플러스 인터넷·아이피티브이(TV) 설치기사 이정훈(30)씨가 4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 주택가에서 인터넷과 아이피티브의 개통에 필요한 통신선 연결 작업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심층 리포트] 브레이크 없는 나쁜 일자리, 간접고용
① 전염병처럼 번진 외주화
전신주 위 아슬아슬·고객 평가 아등바등
‘서비스 기사의 나날’
사용자 숨기는 ‘나쁜 고용’에 운다
현재 한국 사회 노동문제의 핵심은 간접고용이다. 노동력을 싼값에 팔고도 여차하면 일자리에서 잘리는 기존 비정규직 고용의 문제에 누가 진짜 사용자인지 찾을 수 없는 ‘사용자의 실종’까지 겹친 탓이다. 노동력을 돈 주고 쓰지만 문제가 생기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다루는 고용 형태다. 간접고용 문제 해결이 쉽지 않은 이유다. 현대·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1647명이 진짜 사용자가 정몽구 회장임을 최근 1심에서 입증받기까지 11년이나 걸린 데서 보듯, 간접고용은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갈등의 불쏘시개로 작용한다. 제조업 중심이던 간접고용 바이러스는 전자·통신 등 서비스 직종으로 쉼없이 숙주를 넓히는 중이다. 세 차례에 걸쳐 실태와 문제점, 대안을 짚어본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엘지유플러스 기사입니다.” 엘지유플러스 인터넷·아이피티브이(TV) 설치기사 이정훈(36)씨는 이런 자기소개로 하루를 연다. 이 말의 모순을 모르는 이는 전화를 받는 “고객님”뿐이다.
이씨는 엘지유플러스 옷을 입고 엘지유플러스의 지시를 간접적으로 받아 엘지유플러스 상품을 설치한다. 하지만 그는 엘지유플러스 직원이 아니다. 엘지유플러스와 도급계약을 맺고 서비스센터를 운영하며 이씨한테 일을 시키는 협력업체가 그를 직원으로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씨는 협력업체와 근로계약서는 물론 도급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협력업체는 이씨가 설치 건당 수수료를 받는 개인사업자라고 주장한다. ‘이중 간접고용’이다. 2년째 엘지유플러스 설치기사로 일하는 동안 협력업체만 다섯 번 바뀌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4대보험을 적용받은 건 처음 두 달뿐이다.
엘지유플러스 인터넷·아이피티브이(TV) 설치기사 이정훈씨가 지난 4일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전신주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4일에도 이씨는 “고객님, 안녕하세요. 엘지유플러스 기사입니다. 오늘 방문하는데 괜찮으세요?”라는 말로 하루 일을 시작했다. 오전 9시30분 구로·광명·금천·양천 서비스센터에서 장비를 챙겨 나온 이씨가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엘지 휴대전화에만 설치되는 원청의 전산시스템 유큐브(U Cube)에 접속해 일과를 확인했다. 고객이 엘지유플러스 대표번호 101로 전화를 걸어 인터넷 개통·수리를 신청하면, 원청의 통보를 받은 협력업체가 1시간 단위로 기사들한테 업무를 배정한다. 유큐브 아이디가 없으면 업무를 배정받을 수 없는데, 원청인 엘지유플러스가 협력업체 직원도 아닌 기사들한테 발급해준다. “아이디를 받으려면 원청에 가서 입문 과정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해요. 예전에는 4대보험에 가입된 기사만 아이디를 줬는데 지금은 그런 거 따지지 않아요.” 이씨의 말이다.
LG유플러스 설치기사 이씨
원청 시스템 접속 일하지만
원청도 협력사도 ‘직원 아님’
4대보험 없고 휴일·야간근무 일쑤
그래도 한달 100만원 벌이 빠듯
20여분 뒤 서울 금천구 시흥동 주택가 골목에 이씨가 차를 세웠다. 업무에 쓰는 차량과 기름값은 이씨가 떠맡는다. “인터넷이랑 티브이 신청하셨죠?” 반갑게 인사하는 이씨와 달리 ‘고객님’은 몇 마디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씨는 웃는 얼굴로 옥상과 담장 위를 거듭 오가며 통신선을 끌고 와 티브이와 컴퓨터에 연결했다. 장갑, 사다리, 펜치, (선을 정리하는) 태커, 인터넷 광케이블선 등 상품 설치에 필요한 장비는 모두 그가 샀다.
“101번에서 전화가 올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설치를 마친 이씨가 ‘고객님’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당부한 말이다. 101번은 엘지유플러스 고객센터 번호다. 설치·수리 뒤 무작위로 고객들한테 ‘해피콜’을 걸어 만족도를 평가한다. 10점 만점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지난 3월까지는 9점~6점을 받으면 엘지유플러스 원청 직원한테 ‘개선다짐서’를 내고 엘지유플러스의 지역 지사에 가서 별도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벌금이라며 월급도 깎았다. 5점 이하는 퇴사다. 설치 72시간 안에 고객이 고객센터에 불만을 제기해도 벌금을 내야 했다. “만족도에 목숨 걸고 바닥을 기고 다녔어요. 일 끝나도 더 할 일이 없는지 묻고, 설치한 다음 날 아침과 저녁에도 문자를 꼭 보냈어요. 10점 만점에 10점 달라고…. 엘지유플러스가 저희는 자기네 직원 아니라면서도 만족도 관리에 철저했거든요.”
해피콜과 고객불만에 따른 원청의 교육·벌금은 지난 3월 설치·수리 기사들이 노조를 만들어 엘지유플러스를 상대로 ‘원청 사용자성’을 주장한 이후 없어졌다. 하지만 해피콜 결과와 고객불만 등은 지금도 협력업체 평가에 반영된다. 4일 오후 서울 구로구의 이씨 소속 협력업체 이에스플러스 사무실 벽에는 “3개월 연속 에스(S)등급 20만원, 에이(A)등급 10만원, 비(B)등급 미만 기사 개통권역 변경 및 우선순위 배제”라고 적힌 공지가 붙어 있었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오전 11시30분 세번째 고객을 찾았다. 인터넷·전화·아이피티브이 이전 개통 건이다. 복잡한 주택가 반지하 집에 인터넷을 설치하려면 다른 집에 설치된 광단자에 광케이블을 이어야 한다. 이씨는 보호장비도 없이 담장에 올라 가스관 사이로 광케이블선을 고정하고, 키보다 높은 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뒷집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고객님’ 집 창문 앞까지 인터넷 선을 끌어오는 데 20분이 걸렸다. 그러다 다치면 이씨가 자기 돈으로 치료해야 한다. 산재보험 가입이 안 된 탓이다. 실제로 이씨는 두 달 전 전봇대에 오르다 교통표지판에 머리가 찢어져 네 바늘을 제 돈 주고 꿰맸다. “건당 수수료를 받으니 안전을 따져가며 일하기가 어려워요. 돈 벌어야죠.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많이 다치는데, 크게 다치면 산재보험은커녕 퇴사해야 해요.”
휴일 수당 달라고 하면 나오지 말라고 해요
오후 5시께 마지막 예약 고객의 집 앞까지 왔으나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때 서비스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주 토요일 오후 3시에 설치 가능해요?” 고객이 급한 사정이 생겼으니 ‘고객님’이 지정한 다른 날에 다시 오라는 뜻이다. 이씨는 “알겠다”고 짧게 답했다. 익숙한 일이다. “올해 초까지는 한 달에 한 번 쉬고 일했어요. 큐엠(원청 관리자)이 직접 휴일, 명절에도 나와서 일하라고 지시했거든요. 평일에도 보통 아침 8시에 출근해 오후 6~7시께 퇴근하지만 고객이 와달라고 하면 밤 9시에도 갔죠. 하지만 연장·야근·휴일 수당은 없었어요. 달라고 하면 협력업체는 ‘나오지 말라’고 답해요.”
큐엠은 주기적으로 서비스센터 오전 회의를 주재하며 실적을 평가하고 압박했다. 야간·휴일 업무도 큐엠이 메일과 문자로 지시했다. 큐엠은 유큐브 접속 아이디 발급·삭제 권한도 쥐고 있었다. 지난 3월 노조 설립 이후 큐엠은 직접 지시를 멈췄다. 엘지유플러스 관계자는 “엘지유플러스 직원이 센터에 직접 업무 지시를 하지 않으며 독립법인인 센터의 인력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협력업체 대표들과 협의를 통해 해결해 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 이씨의 건당 수수료를 합치면 6만7500원. 설치에 쓴 광케이블선 값 2만원은 이씨가 떠맡아야 한다. 이렇게 버는 돈이 매달 300만~500만원으로 들쑥날쑥이다. 최근에는 개통 업무가 크게 줄어 5월부터는 월급이 100만원대로 뚝 떨어졌다.
건당 수수료 기준은 원청이 정한다. 원청은 기사들의 건당 수수료를 계산해 총액을 협력업체에 도급비로 준다. 임금 인상을 협력업체에만 요구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런 식의 간접고용은 에스케이브로드밴드·씨앤앰 등 동종 경쟁사에도 널리 퍼진 관행이다.
“그래도 최근에 오늘이 가장 많이 번 거예요.” 씁쓸하게 웃는 이씨의 보라색 조끼에 “국가 브랜드 대상 2년 연속 1위”라는 선전 문구가 또렷하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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