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떻게 늙을 것인가
정운현 | 2014-09-26 09:41:26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이인호 KBS 이사장과 채현국 경남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두 사람은 내일 모레 80이다. 이 이사장은 78세, 채 이사장은 79세. 두 사람 모두 서울대를 나왔다. 이 이사장은 사학과, 채 이사장은 철학과. 두 사람 모두 올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시각에 따라 견해차이는 있겠지만 전반적인 평가는 정반대다. 이 이사장은 비난을 산 반면 채 이사장은 박수를 받았다.
▲ 이인호 KBS 이사장
두 사람 모두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며, 젊은 시절 진보진영에서 활동한 공통점이 있다. 대학가 시위가 끊이지 않던 80년대 시절 서울대 교수로 있던 이 이사장은 러시아 혁명과 인텔리겐차의 역할에 대해 강의를 해 학생들의 인기를 끌었다. 또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계열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로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 이사장의 진보적 사회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80년대 당시 대표적 여성단체였던 ‘여성의 전화’를 후원하면서 핍박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눴다. 또 역사학자로서 진보적 역사학술단체인 역사문제연구소가 출범하자 진보학자들과 함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전교조에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 강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적어도 민주정권 시절까지만 해도 그는 진보인사로 분류됐다. 그런 연유로 문민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으로 와 달라는 청와대의 요청을 받기도 했으며, 국민의 정부에서는 여성 최초로 러시아 대사를 지냈으며, 이어 참여정부에서는 핀란드 대사를 지내는 등 적어도 겉으로는 진보진영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런 이 이사장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2006년 뉴라이트가 주도한 ‘교과서포럼’에 이름을 올리면서부터였다. 그가 우파진영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바로 이 때부터로 보인다. 그는 우선 이승만에 대해 과도한 추앙과 평가로 자신의 색깔을 본격 드러냈다. 박근혜 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 초청모임에서 박 대통령에게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다룬 ‘백년전쟁’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행보는 ‘친일·독재 비호’로 일관했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미화, 찬양을 늘어놓은 반면 그의 독재나 비리에 대해서는 입 다물었다. 아울러 친일유림으로 평가되는 그의 조부(이명세)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변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내 조부가 친일이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라는 등 궤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엄격히 말하면 그는 서양사학자로서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는 아니다.
그 자신이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운동권 친구들이 많았던 채 이사장은 운동권 못지않은 열정으로 그 시절을 살았다. 국내 굴지의 탄광업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하면서 큰돈을 만졌던 채 이사장은 운동권 친구들의 뒤를 봐주었으며, 심지어 집 없는 해직기자에게 집을 사주기도 했다. 이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채 이사장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연초 <한겨레>와의 인터뷰가 계기가 됐다. 알려질 만한 사람이 그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도 그랬지만 그가 쏟아낸 말들은 그간 소위 ‘원로’라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과 사뭇 달랐다. 그러면서도 명쾌하고 솔직담백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반박할 말을 잊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그 가운데 몇을 소개하자면.
▲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채 이사장은 그간 알게 모르게 민주화 운동가들을 도운 사실을 두고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라며 “내 일인데 남을 위해 했다고 하면 위선”이라고 일갈했다. 들어보면 맞는 말임에도 우리는 여태 이런 말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성금 얼마를 내고도 사진 찍어 신문사에 돌리고 보도자료 배포하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게 요즘 세태다.
채 이사장이 사람들에게 강하게 인식된 것은 그의 ‘노인 발언’이 아닐까 싶다. 우선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라는 당일 인터뷰 기사의 제목은 그야말로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자신이 80노인이면서 노인들을 변호하기는커녕 노인들을 향해 쓴소리를 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노인세대에 대해 한 말씀 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된다.”며 요즘 한국의 노인들에 대해 극도의 비판과 혹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요즘 한국의 일부 노인들이 나잇값을 못하고 있다고 일갈한 것이다.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대학교수 출신의 이인호 KBS 이사장. 그의 잇따른 친일 비호는 급기야 궤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최근 그는 한 강연회에서 “친일파 청산은 소련의 지령이었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우선 사실과도 다르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한국인의 보편적 민족감정이었으며, 좌파는 물론 우파에서도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었다. 제헌국회에서 반민법이 통과된 사실만 봐도 그렇다.
지난여름, 양산 효암학원에서 만난 채 이사장은 반바지 차림에 세월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겉모양만 봐서는 그가 학교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학교를 돌며 청소하고 아이들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는 부르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 자신의 지나온 삶과 철학, 그리고 우리 교육의 바람직한 미래를 설파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인호 이사장의 ‘소련 지령’ 발언이 보도되자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반성’은 인간의 덕목이고, ‘변명’은 인간이 되기 어려운 자들의 습관이며, ‘적반하장’은 짐승만도 못한 것들의 특기”라며 “적반하장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선, 인간은 죽고 짐승만도 못한 것들만 살아남는다”며 이 이사장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들어 마땅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또래로서 한 시대를 살아왔고, 젊어서는 같은 고민을 해온 두 사람이지만 지금 두 사람은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진위, 선악, 미추의 문제가 아니다. 지성인이면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진실과 정의의 문제인 것이다. 두 이사장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떻게 늙을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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