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개입된 냄새 진동, 박 정권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고
육근성 | 2014-09-26 16:29:12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방통위가 곽성문 전 한나라당 의원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코바코) 사장으로 임명했다. X파일 소동,맥주병 난동, 중정 프락치 활동 의혹, 기자단 촌지 비리 등으로 인해 반대 여론이 비등한데도 임명을 강행한 것이다.
청와대 입김 개입된 냄새 진동
여당 내에서도 부적절한 인사라는 얘기가 나온다. 언론사 기자들도 편향적 입장을 보여온 그가 공공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야하는 공영미디어렙인 코바코 사장을 맡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한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임명을 강행했다면 이는 방통위의 결정이 아니라 청와대의 입김이 개입된 것으로 봐야 한다.
따지고 들어가면 코바코는 전두환 신군부가 신문과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언론기본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몇 차례 관련법이 개정됐다지만 방송광고 수익을 장악해 언론을 통제할 목적으로 설립됐다는 의혹이 여전하다. 왜 그를 코바코 사장에 앉히려고 무리수까지 둔 걸까.
최근 KBS 이사장과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최측근을 임명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한다. 박근혜 정권이 벌이고 있는 ‘방송장악’ 음모의 일환이라는 얘기다. ‘충복’을 사장으로 앉혀 놓으면 청와대에 있는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치 살펴가며 알아서 기어줄 거라는 기대에서 그를 임명한 것으로 보인다.
박 정권 입장에서는 꿩 먹고 알 먹고
박근혜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곽성문의 임명은 꿩 먹고 알먹고다. 자신에게 충성을 바쳐온 ‘내 사람’을 챙기면서 동시에 그의 충성심을 이용해 정권의 야욕까지 채울 수 있으니 그렇다. 곽성문의 과거 행적을 들춰보면 이 정권이 왜 그를 발탁했는지 그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막가는 보인인사라는 냄새가 진동한다.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그가 MBC 편집부장이었던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영수 서거 20주년 특집방송을 기획하면서 박 대통령과 40분간 인터뷰를 했다. ‘박정희의 큰딸’이 은둔생활을 끝내고 정계에 입문을 준비하기 직전이었다. 고향(대구)이 같은데다 나이도 동갑이어서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MBC 입사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70년대 대학생 신분으로 중정 프락치로 활동한 덕분에 MBC에 특채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독재정권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철 전 의원 등 민청학련 관련자 상당수는 ‘당시 중정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신분으로 중정에 협력한 곽성문의 도움을 받아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중정 배려로 MBC 특채돼 동향-동갑인 박근혜 인터뷰
이철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곽성문이 만나자고 해서 나간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고 토로했다. 또 자신이 국회의원이었을 당시 MBC 인사기록을 통해 그가 공채가 아닌 특채로 입사한 사실을 확인했으며, 특채 이유를 당시 MBC 사장에게 묻자 “중정의 추천에 의한 것”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프락치가 맞다면 엄청난 활약을 한 셈이다. 중정은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긴급조치 제4호 위반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024명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 253명이 구속 송치됐고 인혁당 관련자 8명은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전력 때문일까. 전두환 신군부 밑에서 승승장구했다. 1976년 MBC 보도국 기자로 특채된 이후 사회부, 외신부를 거쳐 신군부의 권력이 정점에 달했던 1984년 정치부 기자가 된다. 이듬해인 1985년에는 최연소 특파원이 돼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그러다 MBC 플러스 대표이사까지 올랐다.
꽃놀이패 대구에서 출마, 박근혜 대표와의 친분 덕분?
2004년 깃발만 꽂으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대구에서 17대 총선 후보가 된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어떻게 땅 짚고 헤엄쳐도 당선 되는 꽃놀이패를 쥐게 된 걸까.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박 대통령. ‘노무현 탄핵 역풍’에서 당을 구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반영돼 당 대표로 차출된 만큼 당시 대표의 권한이 막강했다. 당 대표와의 친분이 공천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여의도에 입성하자마자 당 요직에 오르며 ‘잘 나가는 의원나리’가 된다. 박근혜 대표의 후광이 없었다면 배지를 달자마자 홍보위원장에 오를 수 있었을까. 당 대표와 동향이자 동갑이라는 배경이 그를 오만하게 만들었나보다. 2005년 6월 일이 터진다. 대구 상공회의소 초청으로 골프를 친 뒤 술자리를 함께한 자리에서 “왜 여당(열린우리당)에게만 후원금을 내고 한나라당에게는 안 내는 거냐”며 기업인들이 앉아 있는 쪽을 향해 맥주병을 연달아 던졌다. 파편이 튀면서 상공회의소장이 다쳤고 서로 엉켜 몸싸움을 벌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대구 출신 다른 의원은 “맥주병이 머리에 맞았다면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일로 당 직책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박 대통령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됐다. 최경환 의원 등과 함께 친박 진영의 행동대장 역할을 자임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호각지세를 보이자 MB 저격수로 나선다. “시중에 MB가 빼돌린 재산이 8000~9000억원에 이른다”며 입증할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곽성문 X파일 사건’이다.
‘주군’을 위한 충성, 사법처리까지 감수
하지만 ‘MB 저격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MB가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결정되는 동안 X파일 주장으로 당에서 징계를 받고, MB 측으로부터는 허위사실 공표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박근혜 패배’로 설 땅을 잃은 곽성문은 2007년 11월 29일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자유선진당 이회창 후보 캠프에 합류한다.박근혜라는 방패막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대로 당에 남아 있다가는 공천조차 어렵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곽상문의 ‘주군’은 그의 탈당을 적극 막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탈당은 오로지 개인적 결정이라고 말하면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을 아니라 ‘비열한 적’이었던 MB에 대한 보복효과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주군’을 대선 후보로 만들기 위해 터뜨린 ‘X파일 의혹’으로 인해 고소를 당한 곽성문은 2009년 혐의가 인정돼 벌금 400만원을 선고 받았다. 그러면서 대선 때는 박근혜 후보를 적극 도왔고 얼마전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는 김무성 의원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자신이 도왔던 인물이 대통령이 되고 여당 대표가 되자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기자시절에는 ‘육영수 특집’ 보도로 환심을 사더니 국회의원이 돼서는 대통령의 고향 대구를 위해 싸웠으며, 2007년 후보 경선 때는 피흘릴 각오하고 MB를 물어뜯더니 지난 대선 때는 물밑에서 충성을 다한 동향 출신을 중용한 대통령. 자질과 도덕성에는 눈감고 국민의 목소리에는 귀 막은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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