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동기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4/09/22 [22:46] 최종편집: ⓒ 자주민보
아시안게임에 북측선수단이 참가해 뛰는 모습을 보노라면 영락없이 우리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그들의 모습에,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북한선수단의 선전을 바라는 우리 모습에 두 번 놀란다. 같은 민족이지만 70년 가까이 갈라져 살았다는 군사적 대립이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군사적 대립을 떠나 설명될 수 없었다. 우리 국민들도 남북갈등의 핵심 사안이 바로 북한의 핵보유라고 생각하신다.
북한은 과연 핵보유국인가? 이 질문 자체가 커다란 역설이다. 우리 국민들은 “북한”이라고 하면 맨 먼저 핵무기를 떠올리지만, 우리 정부를 비롯한 주변국들은 단 한 번도 북한에게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보유에 관한 국제사회의 대응을 살펴본다면 북한이 핵시험에 나서게 된 배경과 지금 북한이 처해있는 상황, 앞으로 북한이 핵을 어떻게 이용하겠는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3번에 걸친 지하핵시험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북한은 2006년 10월 9일에 지하핵시험을 단행하였고, 2009년 5월 25일에는 2차, 2013년 2월 12일에는 제3차에 이르기까지, 총 3차례의 지하핵시험을 단행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북한이 지하핵시험을 하기 이전부터,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란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2004년 <국방백서>만 하여도 “현재까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1992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이전에 추출한 약 10∼14㎏의무기급 플루토늄으로 1∼2개의 핵무기를 제조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하였다. 북한이 제1차 지하핵시험에 나선 것이 2006년인데, 우리 군은 그로부터 2년 전부터 북한이 핵무기를 제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 것이다.
그 이후로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핵보유선언을 하였고, 2006년 10월 9일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지하핵시험을 단행하였다. 당시 우리 정부는 리히터 규모 3.58의 지진파가 감지되었지만, 그 폭발력은 TNT 1000톤급에 불과한, 사실상 실패한 핵실험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2006년 10월 9일 각료회의에서 최대 15000톤급 핵실험이 있었다고 밝혔다.
2009년 5월 25일 오전 9시 45분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인근에서 북한의 제2차 지하핵시험이 있었다. 우리 정부는 리히터 규모 4.5의 지진이 감지됐다고 밝혔다. 이는 곧 제1차 핵시험 때 발생한 지진파의 10배에 이르는 진동이다. 우리 정부는 이를 TNT 2000톤에서 3000톤 가량의 규모일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북한의 제3차 핵시험은 2013년 2월 12일, 마찬가지로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단행되었는데 정부는 이 때 지진파는 리히터 규모로 4.9이며 폭발력이 TNT 6000에서 7000톤가량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략 2차 실험의 2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당시 정승조 합참의장은 북한의 3차 핵시험 전에, 북한이 수소폭탄으로 나아가는 전 단계의 증폭형 핵분열탄 실험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다. 국방부 김민석 대변인은 북한의 핵시험 결과를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절반가량 규모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우리 정부는 북한의 핵시험을 두고 “성공하지 못한 폭발”처럼 보고 있지만, 북한은 저들의 지하핵시험을 두고 소형화, 정밀화, 경량화된 핵시험이었다며, 애초에 계획된 실험값을 정확하게 얻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핵시험이 세 차례나 이어졌는데 실제로 인공위성 발사체까지 만들었던 북한이 1945년에 미국이 만들었던 히로시마급 원자폭탄을 핵시험 이후 7년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대목이다. 그러다보니 북한의 핵시험을 두고 히로시마급 폭발을 기획하였는데 실패한 핵시험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소규모 폭발을 계획한 소형핵시험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북한 핵시험에 대한 북미의 입장
핵시험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입장을 보자. 북한은 저들의 핵시험을 미국의 핵선제타격위협 등 대북고립압살책동에 대항하기 위한 자위적 차원의 조치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북한, 이란, 이라크의 3국을 “악의 축”이라 칭하며 ‘핵태세검토보고서’에서 북한에 대한 핵선제타격을 제기하는 등 핵무기를 앞세운 북한정권 붕괴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부득불 핵무기를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미국은 단 한 번도 북한을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핵시험을 무려 3차례나 진행하였지만 “핵보유국”으로 불리지 못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북한이 유일하다.
미국은 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국제사회는 1966년경에 대강이 잡힌 핵확산금지조약 (NPT)체제에 입각해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을 구분하고 있다. NPT 체제는 미국, 소련(이후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를 핵보유국으로 규정하고 나머지 국가들을 비핵보유국으로 구분지으며, 핵을 가진 나라가 핵이 없는 나라에게 핵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대신, 핵이 없는 나라는 핵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체제이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이 핵으로 북한체제를 위협한다며 2003년 1월에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고 2005년 2월에 핵보유선언을 하였다. 지난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미국 몰래 핵시험을 해서 핵보유국이 된 사례는 있었지만, NPT의 비핵보유국이 미국의 면전에서 NPT를 탈퇴하고 핵시험을 한 것은 북한이 최초인 것이다.
북한이 NPT를 탈퇴해서 핵시험을 하였으므로 NPT 체제를 이끌던 미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폐기를 위해 동분서주하였지만, 핵을 포기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카다피는 정권붕괴와 더불어 목숨을 잃었던 반면, 미국의 핵포기 요구를 거부하고 미국의 면전에서 핵시험을 한 북한은 최근 국제교류를 넓혀 나가며 오히려 체제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북한이 NPT 탈퇴 이후 핵시험으로 핵보유국이 되어버리면,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세계의 NPT 비핵보유국들은 너나없이 미국과 갈등을 청산하기 위해 NPT를 탈퇴해서 핵을 보유하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핵독점으로 출발한 미국의 세계군사패권은 종언을 구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미국은 북한이 핵시험을 3번이나 하였지만 북한에게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북한핵은 어찌될 것인가?
한미양국은 북한 핵폐기를 위해 그토록 노력하였지만, 북한은 2013년 3월 3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해버렸다.
전성훈 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 정권의 경제·핵무력 병진노선과 ‘4‧1 핵보유 법령’”이란 원고에서 북한의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 병진노선”을 두고 “방위력을 강화하면서 경제건설에 집중하여 ‘인민들이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는 강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략적 노선”이며 “전쟁 억제력을 크게 강화하고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사회주의 강성국가 건설 위업’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정당한 노선”, “‘국방비를 늘이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면서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꾀할 수 있는 방도”라는 점 등 병진노선의 총 8가지 의미를 규정하였다. 전성훈 소장은 이를 두고 “경제와 핵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은 북한이 더 이상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군사적 사용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고 평가하였다.
살펴보면 북한이 제1차 핵시험에 나섰던 것이 2006년인데, 이로부터 7년이 지난 2013년에 경제건설 병진노선을 제기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두고 “북한의 핵보유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경제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지만, 살펴보면 세계의 핵보유국들은 핵을 보유하고 이후에 일관되게 경제건설에 나섰던 흐름을 갖고 있다.
핵보유 이후 경제건설의 흐름들
1949년에 핵무기를 개발한 소련은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연평균 10.3%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시기 CIA는 소련경제성장률이 5.1%라고 주장한다.) 그랬던 것이 1971년부터 1975년까지 5.7%로 감소하였으며 (CIA는 같은 기간 3.0%라고 주장) 1981년부터 1985년까지는 3.6%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절대적 수치에 차이는 있으나 CIA도 소련의 경제성장률이 195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보고 있다.
이는 1949년의 핵보유를 통해 미국에 맞설 패권국으로 올라선 소련의 행보로 설명된다. 사회주의 진영의 “종주국”이라 칭하였던 소련은 1971년대까지 고율의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경직된 국가관료 사회주의 체제로 인해 미국과의 냉전대결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국가가 해체되었다.
중국은 1964년에 핵보유선언을 하였다.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교전하였던 중국은 핵보유 7년째이던 1971년, 핑퐁외교를 통해 당시 적대국이던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1979년에는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대이변을 낳았다. 핑퐁외교가 시작되던 1971년이 아직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중국의 핑퐁외교는 정말 파격적인 사변이었다.
중국경제는 미국과 관계정상화와 맞물려 크게 발전하였다. 1981년, 1990년에 5.2%, 3.8%로 저조하긴 하였으나 1978년에 11.2%, 1984년에는 15.2% 성장을 기록하는 등 중국은 이 시기부터 전매특허인 두 자릿수 경제성장을 연거푸 달성하기 시작하였다.
인도는 1998년 핵시험을 단행하였다. 그 이후 인도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여 2000년 당시 4.4%였던 경제성장률이 2006년 9.7%를 기록하였으며 2007년 경제위기 이후에도 8.4%(2011년)를 기록하며 글로벌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파키스탄도 1998년 핵실험 이후 2001년에는 GDP 성장률이 2.6%에 불과하였지만 2004년에는 6.2%를 기록하였으며 7년 뒤인 2005년에는 7%를 기록하며 성장에 탄력이 붙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인도, 러시아는 모두 핵보유 이후 국제외교력을 신장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는 공통된 경력을 갖는다. 이들 국가는 오늘날 브라질과 함께 브릭스(BRICs)라고 하는 새로운 대안경제블록으로 세계경제의 관심을 받고 있다.
북한이 진정 바라는 것?
핵개발은 국제사회의 고립을 촉발할 것이라는 생각이 크지만, 동시에 이미 개발한 핵을 일방적으로 해체시켰던 사례는 아직 없다. 세계현대사는 역설적으로 소련과 중국, 인도가 모두 핵을 보유한 이후 경제성장을 이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핵을 포기했다가 정권이 붕괴된 나라는 이라크, 리비아 등이 있지만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 주요 핵보유국들 가운데 핵을 개발하였다가 경제가 파탄난 국가는 한 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핵개발국들 가운데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은 핵개발 당시 경제력이 큰 나라도 아니었다.
북한 핵무기는 물론 폐기되어야 한다. 북한도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며 한반도비핵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저들의 핵과 미국의 핵위협이 동시에 사라져야 한다며 세계가 모두 비핵화에 나서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부시 행정부가 집권해서 대북 핵선제타격이 공공연하게 거론되던 그 시절에, 북한은 기존 핵보유국의 과거행적을 곰곰이 검토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핵보유국들이 종국에는 모두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핵무기로 군사력과 외교적 개입력을 인정받으며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북한당국도 핵을 토대로 국방을 공고히 하고 경제건설에 집중하겠다고 주장하는데 지난날의 소련, 중국, 인도, 파키스탄의 전철을 볼 때 이것을 무턱대고 “성공할 수 없는 전략”으로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느낌이 든다.
벌써 북한의 외교가 활발하기 때문이다. 리수용 외무상이 유엔총회 연설차 뉴욕을 방문한다. 리수용 외무상은 9월 15일에는 이란을 방문하였고 10월에는 러시아를 방문한다고 한다. 강석주 조선노동당 국제비서는 유럽연합을 순방하였다. 북한은 미국에게 전직 대통령급의 특사를 보내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는 북측선수단이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스포츠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 정부도 면밀한 검토없이 “병진노선은 실패한다”는 문구만 되뇌여서는 안된다. 북한이 평화로 나온다면 과감하게 받아주며 한반도 정국을 더욱 평화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진정한 국익일 것이다.
현 시기 북한은 핵보유로 국제사회에 무시할 수 없는 인지도를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국제사회 관계개선에 나서 경제성장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는 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핵을 개발하였던 소련, 중국, 인도, 파키스탄이 모두 따랐던 외교행보였다.
한미연합군을 핵무기로 공격해 한반도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소설같은 이야기보다는 핵무기를 지렛대로 한 관계정상화와 경제개발이 북한 사회에서 “경제건설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이 제기된 배경 아닐까?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선다면 동북아 지역에서 외교개입력이 현저히 증가할 절호의 시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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