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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2일 금요일

해방을 가로막은 9월 8일 미군진주


해방을 가로막은 9월 8일 미군진주 김성훈 우리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기사입력: 2014/09/12 [23:10] 최종편집: ⓒ 자주민보 9월 8일은 미군이 주둔한 지 69년이 되는 날이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의 38선 이남에 들어온 미군은 우리 민족에게 ‘해방’이 아니라 ‘강점’에 이은 분단과 비극적인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미군주둔 69년은 곧 분단 69년이기도 하다. 미군의 주둔은 결과적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과 ‘새 조국 건설’을 향한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고 희망과 꿈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69년 전 9월 8일, 과연 이 땅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1945년 9월 8일, 일본 경찰에 맞아 죽은 우리 민족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4만 5천여 명에 달하는 미군은 전투기의 엄호 아래 장갑차를 앞세우고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다. 많은 인천시민들은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인천시민들의 앞에 나타는 것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 패망한 일본의 경찰병력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경비구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인천시민들에게 총탄을 퍼붓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권병권과 이석구 등 2명이 일본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고 10여명의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어째서 해방된 인천 시민이 패망한 일본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했는가. 그 이유는 태평양 미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가 조선 총독 아베에게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일제가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일본군과 경찰력을 동원해 민중들의 정치활동과 시위, 집회를 탄압하였으며 심지어 시위대에 기관총을 발포하기도 했다. <그림 1> 1945년 9월 9일, 항복서명 직후 서울을 빠져나가는 일본군의 모습. 여전히 무장해제 당하지 않았다. 미국은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 경찰의 발포를 두둔하였다. 9월 8일, 미군진주과정에 사망한 유족들은 발포한 일본경찰을 미군정에 고소했다. 그러나 군사재판에서 미군은 ‘일본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넘은 인천시민들에 총격을 가한 것은 정당했다’고 판결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과 당일 발생한 총격 사건은 우리민족 앞에 펼쳐질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하나의 상징이다. 민족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부정한 미군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의 역할은 9월 7일, 미군이 발표한 포고문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에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일본의 천황과 일본정부의 이름으로, 또한 일본제국 총사령부의 명령 및 이름을 서명한 항복문서가 규정하는 바에 의해 본인이 지휘하는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력과 복종이 요구된다. 본관은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으로서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및 조선 인민에 대한 군정을 펴면서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 제2조 정부, 공공단체 및 기타의 명예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그리고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보존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한다.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 제6조 앞으로 모든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본관 또는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포될 것이며, 주민이 이행해야 할 사항들을 명기하게 될 것이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1945년 9월 7일 태평양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 미군은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는 맥아더의 포고령과 같이,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자로 규정했다. 그러나 미군이 점령자가 되는 이유는 단지 이 때문만은 아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 건설을 통해 자주 독립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하던 여운형 등 우리 민족의 활동을 제3조, “점령군에 대한 반항행위 또는 공공의 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로 규정하여 완전히 부정하였다. 당시 해방 조선에는 이미 독립정부기관이 건설된 상태였다.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한 여운형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과 회담을 통해 행정권 인수 의사를 밝혔다. 총독부는 여운형이 제시한 조건들을 주저없이 수락하였으며, 여운형은 그날 저녁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다. 실제로 8월 17일 조선총독부는 치안유지권, 방송국 등 각 언론기관 등을 건준에 일괄 이양하였다. 건준은 전국에 걸쳐 지부를 건설하였고 후에 인민위원회로 전환하였으며 건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인민위원회를 건설하는 지역도 많았다. 지방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자기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으며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해방 후 한 달도 안 된 9월 6일 전국에서 모인 천여 명의 대표들은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당시 우리 민중은 신속하게 일제 식민통치를 붕괴시키고 국가기구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이를 군정통치에 이용하였다. 미군은 일제 잔재를 소탕하기는커녕 오히려 포고령 제2조에 의해 해방과 더불어 줄행랑을 쳤던 친일파들이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제4조를 통해 우리 민족의 피로 얼룩진 민족 반역자와 일본인의 재산까지 보장해 주었다. 게다가 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일제 통치기구가 가장 효과적인 운영방법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용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1945년 9월 16일 매일신보에 의하면, 하지는 ‘전 조선 총독이 가지던 직권과 권리를 나 자신, 즉 군정장관 아놀드가 장악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 국무부도 주둔군 사령관 하지에게 ‘첫째, 조선의 통치방식은 일제의 통치방식을 계승할 것, 둘째, 일제의 군사, 경찰, 관료기구를 그대로 넘겨받을 것, 셋째, 조선에 대한 분열정책을 최대한 유효하게 실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일제 식민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어받은 미군은 관리들도 일본인, 친일파를 그대로 유임시켰고 나중에 자문역할을 하게 하였다. 김성수와 같은 대지주 출신 친일파가 친미파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도 이 때다. 미군정은 법률도 일제시대 법률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1945년 11월 2일,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21호를 통해 ‘종래의 모든 법령 또는 구조선정부(총독부)가 발포하고 효력을 가지는 규칙, 명령, 고시 등은 모두 그 효력을 계속 가진다’고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시대 정치집회금지법, 선동문서통제령, 치안유지법 등의 식민통치 법령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미군이 일제를 대신한 새로운 관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려주고 있다.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한반도 분할 점령 이러한 일련의 미군 주둔 과정은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 이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강대국들 사이에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한반도에 대한 처리문제도 중요하게 다루어 졌다. 1942년, 미국은 일본이 패전하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려는 구상을 세우고 이듬해 카이로선언(1943.11)에서 ‘일정한 절차를 밟아 조선을 자유 및 독립 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일정한 절차”란 다름 아닌 신탁통치를 말한다. 1945년 8월 8일, 유럽지역에서 독-소 전쟁을 끝낸 소련이 대일선전포고와 더불어 만주의 관동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일본은 8월 10일 새벽, 히로히토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연합국에 항복의사를 통보하였다. 그리고 15일 무조건 항복 선언을 방송에 내보냈다. 미국은 발빠르게 행동했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96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겨우 도달한 상태였고, 그해 11월 초에나 큐슈에 상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간다면 한반도 전체를 소련에게 넘겨줄 형편이었다. 그래서 미국이 내놓은 대책이 바로 ‘일반명령 제1호’이다. 일반명령 제1호의 주요 내용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항복하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하며, 다른 무장단체에는 항복하지 말 것 등이다. 결국 미국과 소련에는 항복을 하지만, 만주의 조선인 항일부대에는 항복하지 말란 내용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 명령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철저히 부정한 명령이었다. 진정한 ‘해방’을 향하여 이런 사실을 종합해보면 당시 한반도 이남지역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통치 주체만 바뀌었을 뿐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셈이다. 69년 전 우리 민족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던 미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 구상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주한미군은 여전히 서울의 한복판, 용산에 주둔하고 있으며, 국내 미군 기지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위한 대북, 대중, 대러 전초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진정한 해방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민족사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분단을 극복하고 외국 군대의 비정상적 주둔 상황을 해소하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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