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우리를 키운 건 5할이 '쌀'이었습니다
[귀농통문] '쌀'이슈① 쌀없는 밥상?
김정열 전여농 식량주권위원장 2014.09.26 16:37:57
예상하고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일이 일어났다.
'쌀 개방.'
정부의 일방적인 쌀 개방 선언에 항의해 농민들이 자신들의 목숨이었던 논을 갈아엎는다. 애써 키운 연두초록빛 벼들이 흙더미 아래로 뭉개지는 것은 벼가 아니라 농민인 나다.
나에게 쌀농사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겠다고 맨 처음 한 일이, 이른 봄 짚을 작두로 썰어 논에 펴는 일이었다. 짚은 기꺼이 썩어 새로운 생명의 거름이 될 터였다. 3월 꽃샘바람이 부는 날이었지만 따스한 햇살과 발 밑에서 짚 밟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맑았던 새로운 삶의 첫 날이었다.
나락 한 톨이 어떻게 몇 백 개의 쌀로 생명을 늘리는지, 책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한 도시 아가씨가 올해로 쌀농사를 지은 지 24년째다. 쌀농사를 지어온 그 24년은 연약했던 한 여성이 꿋꿋한 여성 농민으로 서기까지 배움의 시간이었다.
온 동네가 들썩거리며 함께했던 못자리 일, 바늘로 일일이 꿰매야 했던 나락 매상 포대, 40kg 나락 매상 포대를 어깨로 져 날라야 했던 남편의 거친 숨소리, 풀이 너무 많아 수확을 포기해야 했던 구릉바우 다랑논 한 배미, 임신 8개월 배가 남산만 했을 때인데 비옷 바지를 입고서라도 논 고랑에 앉아 풀을 뽑아야 했던 일. 막걸리 병을 옆에 놓고 태풍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던 일.
논 속에서 내 인생은 흘러갔고 여물어가는 나락 속에서 어느새 나의 눈물도 감춰졌다. 이게 어찌 내 삶뿐이었으랴? 그런 쌀농사를 이제 내놓으라고, 포기하라고 한다.
ⓒ귀농통문
'쌀 관세화'가 아니라 '쌀 완전 개방'이다
지금 농민들의 초미의 관심사인 ‘쌀 개방’ 문제에 관해서는 단어 하나하나도 주의깊게 듣고 주의깊게 써야 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학자들은 학자들대로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18일 정부는 "그 동안 관계 부처와 농업계, 민간전문가 등이 긴밀히 협의하여 검토하고 국회에서 논의한 결과를 토대로 정부가 내년부터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쌀을 관세화하기로 결정했음을 발표하고자 한다"고 했다. 한 문장도 되지 않는 짧은 발표문만 인용했지만 여기에도 많은 거짓말과 왜곡이 숨어 있다.
첫 번째, 정부에서 언제 농업계, 민간 전문가와 긴밀히 협의하여 검토했나. 우리 농민단체에서 지금까지 주장하는 가장 주요한 요구는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라'는 것이었다. 정부 편만 드는 관변 농민단체가 아니라 '농민의 입장을 직접 들어라'는 것이었다.
우리 농민단체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쌀 개방과 관련된 협상을 벌였던 필리핀과 일본의 정부 협상팀에서 활동했던 전문가, 농민을 불러 그들의 경험을 농림축산식품부 담당자 코앞에서 말했다. 그들의 정부는 그들과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토론과 협의를 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자국에 유리한 협상을 해나갔는지 말했으나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쌀 개방 공청회에 농민의 출입을 막기까지 했다.
또 '세계식량농업기구(FAO) 한국협회'라는 있지도 않은 유령단체를 앞세워 농민 의견을 수렴한다는 요식행위를 했다. 요식행위 자체도 분노스럽지만 세계식량농업기구에서 자신들의 로고를 멋대로 쓰고 있는 가짜 한국 지부를 고발하느니 어쩌느니 하는 뉴스는 한국민으로서 부끄럽고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두 번째, 국회에서 논의했다고 하는데 명백한 거짓말이다. 쌀 개방 문제는 국회 논의가 끝나지 않았다. 7월 18일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발표 뒤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인 국회의원은 "정부의 독단적 결정이며 기습발표"라고 했다. 9월 국회에서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브리핑했다. 정부는 어느 유령 국회의원하고 논의했나?
세 번째, 지금의 문제를 '쌀 관세화'라고 말하면 안 된다. '쌀 관세화'가 아니라 '쌀의 완전 개방'에 관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쌀만은 자유롭게 수입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다른 모든 농산물은 관세만 물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으나 쌀만은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야만 들여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에게 쌀은 하나의 식량작물 이상임을 정부도 알고 우리도 알고 온 국민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쌀을 내년부터는 완전히 자유롭게 누구나 수입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문제를 '쌀 관세화'로 표현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국민에게도 그렇게 물어라.
쌀을 완전히 개방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도록 할까요? 그렇지 않게 할까요?
그 밖에도 "올 9월까지는 정부의 입장을 정리하여 세계무역기구에 통보해야 하고, 고율관세를 적용하면 쌀 수입을 막을 수 있다" 등의 말이 있는데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다 반박하려면 날이 새도 모자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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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왜 지켜야 하는가
1950년대 미국의 원조로 수입 밀가루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우리밀로 자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밀 자급률이 2% 정도로, 밀농사가 거의 사라졌다. 거칠지만 구수한 우리밀 맛은 어른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나마 20여 년 전부터 한 시민단체가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열정적으로 추진해서 지금 이만큼의 명맥이라도 이어나가고 있다.
쌀도 그런 운명을 밟게 될까. 유홍준 님의 '논은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말을 빌지 않더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색의 향연, 순결한 바람소리, 평안한 마음의 고요를 주었던 논의 모습을, 벼의 모습을 어찌 안 보고 우리가 살 수 있을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쌀은 영혼의 음식이며 쌀을 잉태하고 있는 논은 우리 삶을 잉태하는 ‘그곳’이다. 논에는 벼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식물이, 곤충이, 동물이 그곳을 터전으로 살고 있다. 사람도 그곳에 기대어 더불어 살아간다. 논은 요즘처럼 심술궂게 내리치는 폭우도 어머니의 품처럼 받아내어 그것들을 먹여 살리기도 하고 사람의 식수로도 공급한다. 논은 한여름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받아내어 식혀서 사람에게 보내준다. 오염된 공기에 헉헉거리는 사람에게 논은 한결 맑아진 공기를 내뿜어준다. 논이 더 이상 사라지게 해서는 우리도 살지 못한다.
쌀밥이 없는 밥상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5000년 동안 내려오던 우리 쌀이 아닌 밥을 볼이 미어터지게 입에 넣을 수 있을까. 엄마젖을 떼고 우리 쌀로 만든 미음의 힘으로 걸음마를 시작했고 우리 쌀로 지은 밥상으로 크고 자랐다. 이 나이가 되니 내가 농사지은 쌀로 지은 밥을 자식에게 먹이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런 쌀을, 그런 밥상을 내줄 수는 없다. 쌀은 ‘쌀’이라는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시작이고 끝이다.
쌀이 사라지는 것은 쌀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농업이 사라지는 것이고 농민이 사리지는 것이며, 공동체에 뿌리박고 살아온 우리의 삶이 사라지는 것이다.
2003년에서 10년이 지난 2013년도에 우리나라 경작면적을 조사해보니 모두 13만5000ha, 서울시 면적의 2배가 사라졌다고 한다. '쌀 개방'의 파고는 아마 이보다 더 급속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23%가 채 안 되는 식량자급률이 더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깊은 마음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들의 마음을 모으고 엮어야 한다. 3000년 동안 우리보다 먼저 주인이었던 쌀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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