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25년 9월 1일 월요일

군에서 죽은 것도 억울한데, 800만원으로 퉁치자? 이 엄마의 선택

 [김형남의 갑을,병정] 고 홍정기 일병 국가배상 항소심 재판부 탄핵 및 징병제 폐지 촉구 국민동의 청원 이유

25.09.02 06:49최종 업데이트 25.09.02 06:49

고 홍정기 일병 국가배상 항소심 재판부 탄핵 및 징병제 폐지에 관한 청원국회

지난 8월 18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 게시판에 징병제 폐지 청원이 올라왔다. 9월 1일 기준 8100여 명이 동의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9-3민사부 윤재남, 노진영, 변지영 판사를 탄핵하든지 아니면 징병제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이다. 재판부 탄핵과 징병제 폐지. 언뜻 봐선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요구는 왜 한 묶음이 되었을까.

청원인 박미숙씨는 2016년 군 복무 중 사망한 고 홍정기 일병의 어머니로 홍 일병은 박씨의 막내아들이다. 박씨가 탄핵을 요구한 서울중앙지법 제9-3민사부는 홍 일병 유가족의 국가배상소송 항소심 재판부다. 이들은 지난 7월 23일 선고공판을 열고 이렇게 판결했다.

피고 대한민국은 고 홍정기 일병의 부모에게 각 800만 원, 조부모 및 형에게 각 100만 원을 지급하라.

소송 총비용 중 80%는 유가족이, 20%는 대한민국이 각 부담한다.

법원이 매긴 홍 일병의 목숨값은 1900만 원, 열 달을 배 아파 낳은 어머니에게는 800만 원. 홍 일병이 잃어버린 수십 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1년 치 최저임금만도 못했다. 그마저도 배상 책임이 있는 국가에겐 소송비용의 20%를, 80%는 피해자인 유가족에게 부담시키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서까지 붙였다. 소송의 원인을 제공한 책임자는 국가인데 도리어 소송을 건 피해자들이 손해를 보게 된 셈이다.

배상금에서 소송비용 80%를 빼면 나라에서 배상받았다고 말하기도 궁색할 지경이다. 선고 후 박씨는 "내 아들 목숨값이 개값만도 못하냐"며 울분을 토했고, 재판부는 뒷재판을 남겨둔 채로 서둘러 법정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소송 1심에선 원고인 유가족이 패소했다. 판결문상 국가가 홍 일병 사망에 책임이 있다는 내용은 항소심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국가에 아예 배상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법 때문이었다.

군경의 배상청구권 박탈해 버린 박정희 정권

1964년 베트남전쟁 참전용사와 전사자 유가족들에게 지급할 손해배상금이 급증하자 박정희 정권은 군인, 군무원, 예비군, 경찰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국가배상법' 개정안을 만들어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때부터 군인들은 다치거나 죽어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었고, 국가의 과실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지급되는 보상금만 수령할 수 있었다.

보상과 배상은 엄연히 다른 개념인데, 어거지로 배상청구권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이 법을 이중배상금지 조항이라 부른다. 일반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국가를 상대로 보상과 배상을 동시 청구할 수 있는데 군경 등만 나라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권리를 빼앗겼다는 점에서 이 법은 도입 당시부터 법조계의 비판을 받았다.

1971년 대법원은 이 법이 군경을 민간인과 공무원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법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당시에는 헌법재판소가 아닌 대법원이 위헌법률심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대법관들에게 압력을 넣어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를 1차 사법파동이라 부른다.

이듬해인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아예 헌법에 이중배상금지 조항을 못 박아버렸다. 이 조항은 1987년 민주 항쟁 이후의 개헌 과정에서도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폐지 반대로 그대로 존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2024년 12월 10일 헌법을 우회하는 취지로 '국가배상법'이 개정되었다. 헌법 개정이 필요한 군경 당사자 배상청구권과 사망 군경 유가족의 위자료 청구권을 분리하여 이중배상금지 조항에도 불구하고 유가족의 배상청구권은 인정하기로 법을 바꾼 것이다. 비상계엄과 윤석열 대통령 1차 탄핵소추안 부결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으나, 법조계에서 수십년간 대표 악법 중 하나로 꼽아온 이중배상금지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된 역사적인 입법이었다.

이 법은 저절로 개정된 것이 아니다. 법 개정 논의에 불을 붙였던 계기가 바로 홍 일병 국가배상 사건이었다. 홍 일병은 2016년 군 복무 중 급성백혈병에 걸렸다. 문제는 발병 사실을 사망한 뒤에야 확인했다는 것이다.

홍 일병은 몸에 반점이 나고 머리가 아프다며 여러 차례 군의관을 찾았지만 그때마다 처방받은 건 피부병약과 두통약이 다였다. 환자가 반복적으로 증상을 호소하고 호전되지 않으면 큰 병원에 보내는 것이 상식인데 군의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민간 병원에 가는 일 역시 부대 전술훈련 기간이란 이유로 뒤로 밀렸고 홍 일병은 그대로 훈련에 참여했다.

훈련 뒤 찾은 민간 병원에서 혈액암 의심 소견을 내고 즉시 대학병원으로 가라 했다. 인솔 간부가 이 사실을 보고했지만 대대장은 이틀 뒤 군병원 외진 버스가 있으니 복귀했다 그때 병원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이틀간 홍 일병은 부대 의무실에서 날마다 토를 하고 굴러다니며 괴로워하다 군 병원 외진 버스에서 의식을 잃었고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에 걸린 걸 알게 된 건 이때다.

홍 일병의 직접 사인은 뇌출혈이다. 백혈병의 대표적 합병증이다. 20대 급성백혈병 환자는 보통 발병 이후 5년 이상 생존하고, 적시 진단과 관리만 잘하면 생존율은 그보다 더 높다. 그런데 병원 한 번 제대로 못가 본 홍 일병은 발병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합병증에 걸려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명백한 국가의 과실이 아닐 수 없다.

국가배상법 개정은 피눈물 나는 호소의 결과

8월 20일 서울 마포구 군인권센터 사무실에서 군 사망사건 유가족, 현역 장병 부모 모임, 군인권센터가 연 '국가배상 항소심 재판부 탄핵 청원 개시' 기자회견 도중 고 홍정기 일병 어머니 박미숙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전선정

당초 박미숙씨는 아들 또래 군의관들이 찾아와 사과하는 모습에 자세한 속 사정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 벌 줘서 뭐 하겠나 싶은 마음이 들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씨는 이날의 일을 지금도 후회한다.

군은 박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용서가 아닌 '책임 없음' 쯤으로 인식했던 모양인지 진상규명은 나 몰라라였다. 이때만 해도 홍 일병 부모는 아들이 세상을 떠나게 된 정확한 경위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뒤늦게 한 방송국 시사교양프로그램에 의해 홍 일병이 군의 부실 의료, 진료 지연으로 사망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씨의 오랜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군은 군의관 2명을 감봉 1개월과 3개월로 솜방망이 징계한 사실을 부모에겐 알리지 않았고, 징계 관련 서류 사망자 이름에 엉뚱한 홍 일병 형 이름을 적어 이후 여러 조사기관과 법원이 홍 일병 관련 징계 기록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뒤늦게 국가배상 사건 1심 재판부에서 징계 기록을 받아내 잘못 기재된 까닭을 묻자 '실수'였다고 대답한 것이 고작이다. 박씨는 군이 일부러 책임을 감추기 위해 이름을 잘못 써둔 것으로 의심한다. 실제 국가 책임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국가배상 재판이 급물살을 탄 것은 이 징계 기록을 발견했을 때부터다. 군이 의도를 갖고 징계 기록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할 의도로 엉뚱한 홍 일병 형 이름을 써뒀던 것이라 생각하는 이유다.

1심 재판부는 국가의 명백한 과실이 인정되는 사건인 데다 이러한 참극이 재발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라도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행법을 무시하고 판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2023년 우회적으로 '화해권고'를 결정했다. 국가가 홍 일병 유가족에게 2500만 원 상당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는 것이 권고의 취지였다.

이때 정부 소송대리를 맡은 법무부 장관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당대표다. 법무부는 현행법상 화해권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수용을 거부했지만, 이중배상금지의 문제점에 공감한다며 국가배상법 개정 추진을 약속하고 정부 입법안을 발의했다. 다만 이 법안은 21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다 임기 만료 폐기되었다.

그러나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군 사망사건 유가족들에게 국가배상은 단순히 배상금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군과 국가로부터 책임을 인정받는 중요한 과정이다. 박씨는 아들 홍 일병을 포함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군인들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제도를 반드시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국회를 찾아 여야 주요 인사들을 만나러 다녔다.

당시 한동훈 국민의힘 당대표를 위시하여 지금은 국무총리가 된 더불어민주당 김민석 수석최고위원, 당대표가 된 정청래 법제사법위원장, 조국 조국혁신당 당대표를 만나 22대 국회에서 반드시 법 개정을 이뤄달라 호소했다. 2024년 12월의 국가배상법 개정은 이러한 피눈물 나는 호소의 결과였다.

재판부 탄핵 국민동의 청원 올린 이유

하지만 마냥 판결을 미룰 수 없었던 1심 재판부는 법 개정 전에 원고 패소를 결정했고,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 제9-3부는 법 개정 논의가 마무리될 때까지 재판 일정을 추정해 두었다. 때문에 법 개정 이후 재개된 홍 일병 국가배상 사건 항소심 재판은 군 사망 사건 유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법 개정의 원인이 된 사건이기도 하고 향후 법원이 복무 중 사망한 군인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가늠자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홍 일병 사망의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배상금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초라한 결정을 내놨다.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가 배상금을 이와 같이 책정한 원인 중 하나는 '백혈병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는 때로부터 불과 11일이 지난 2016. 3. 24. 사망한 점'이다.

부모 입장에선 예후가 좋지 않아 병원에 보냈어도 오래 살기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로 읽힐 법한 문장이다. 하지만 이는 가정일 뿐이다. 병원에 안 보내서 무슨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합병증으로 사망한 사람을 두고 예후가 좋지 않았다는 것이 국가의 과실 책임을 줄여주는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또 재판부는 '망인의 아버지인 원고 홍성원이 구 군인연금법, 보훈보상자법에 따른 사망보상금 및 보훈보상금을 수령한 점'을 고려사항으로 꼽았다. 이미 보상을 받았으니 배상은 적게 책정하겠다는 뜻이다.

국가배상법의 개정 취지가 보상과 무관하게 국가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 군경에게도 배상청구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음에도 법 개정 취지를 몰각하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자격 요건만 갖추면 당연히 받는 보상과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 배상은 엄연히 개념이 다르지만 법원은 오랫동안 보상을 받은 경우 그에 맞춰 배상금을 적게 책정하는 관행을 따르고 있다.

박씨는 재판부에 납득할 만한 설명을 요구하며 법정을 찾아간 적도 있지만, 판사들은 소란을 피우지 말라며 퇴정을 명령하곤 본인들이 법정에서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판결을 이대로 두고 넘어가면 앞으로 사망 군인에 대한 배상청구권 인정 기준이 상식 밖으로 과소하게 굳어질 것이란 걱정이 박씨가 재판부 탄핵 국민동의 청원을 올린 이유다.

10년을 싸워가며 얻어낸 800만 원으로 아들 죽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퉁치고 가라는 말을 납득할 부모는 세상에 없다. 박씨는 "군인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나라에 징집할 자격이 없다"며 국회가 재판부를 탄핵할 자신이 없으면, 그냥 징집을 포기하고 징병제를 폐지하라는 입장이다.

나라 지키려고 데려간 자식을 어이없이 죽이고, 제대로 예우도 해주지 않으며, 책임조차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운운하기란 얼마나 면구스러운 일인가. 5만 국민동의 청원 성사로 홍 일병 어머니의 절규가 법원과 군에 경종을 울릴 수 있길 바란다.

#홍정기 #국가배상 #국민동의청원 #탄핵 #법원

프리미엄 김형남의 갑을,병정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