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제주교안’으로도 불리는 제주의 수난사

1901년 신축년 5월 28일 장두 이재수를 선두로 민군이 요란한 함성을 내며 제주성에 들이닥쳤습니다. 성내의 주민들이 나서서 성문을 개방했기 때문인데요. 프랑스 함대를 기다리던 천주교도들은 관덕정 앞으로 끌려가 이틀 동안 3백 명이 넘게 피살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프랑스인 신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관아에 숨어 목숨을 건졌어요.
이 사건에 대해서 민중운동사의 입장에서는 ‘이재수의 난’이라고 하다가 최근에는 신축항쟁으로 부르는데요. 천주교의 입장에서는 신축교난이라고 하다가 최근에는 반성과 화해를 위해 객관적인 역사용어인 신축교안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런 사태가 일어난 원인과 수습과정을 살펴보면서 국가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지요.

제주교안의 발생원인 하나- 봉세관의 ‘세폐’
‘세폐’란 세금으로 인한 폐단을 말하는데요. 궁내부 내장원경 이용익은 1897년 이후 고종의 강력한 후원을 바탕으로 황실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 대한제국 재정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습니다. 1900년 8월부터는 봉세관을 전국 각지에 파견하여 내장원의 재산과 수입에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지요. 그에 따라 강봉헌이 제주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주 도민들에게는 그동안 내지 않았던 세금이 늘어나거나 세로운 명목의 세금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큰 부담을 안겨 주었어요. 그뿐 아니라 지방관과 향리 및 향임층들에게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수세과정에 개입하여 이권을 챙겨 왔던 특권이 사라지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강봉헌은 현지 지배세력을 협조자로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면제되었던 세금을 비롯하여 부담이 늘어난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중앙에서 파견된 봉세관과 재지 세력들 간의 주도권 다툼에서 세폐가 발생한 측면이 있었어요. 당시 대정군수였던 채구석이 상무사를 조직했던 이유는 봉세관에 대한 대응책이었습니다. 현지 지배세력의 협조를 얻을 수 없게 되자 강봉헌은 천주교인을 세금 징수를 위한 마름으로 활용했습니다.
제주교안의 발생원인 둘- 천주교의 ‘교폐’
프랑스인 신부들이 문명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제주민들을 미개한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에서 천주교로 인한 폐단이 비롯되었어요. 그들은 제주의 전통적 무속행위에 대해 직접적인 제거에 나섰으며 교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지방관과 향임의 공권력을 무시하였고 사사로이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원래 천주교는 조선 사회에서는 박해의 대상이었지요. 1791년의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01년, 1839년, 1846년 그리고 1866년 대원군 정권 하에서 일어났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천주교인들이 대대적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일반 국민들도 천주교는 사학이며 박해를 받아도 마땅한 집단으로 여기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1886년에 조불수호조약 체결 이후에는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었습니다. 나아가 이제 프랑스 신부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국민이라는 것을 내세워 양대인(洋大人) 행세를 하게 되었지요. 특히 뮈텔 주교는 흥선대원군은 물론 대한제국 정부의 유력자들과 소통하면서 천주교의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입교자가 크게 늘었는데, 거기에는 순수한 신앙적 차원에서 입교한 사람도 많았지만 수탈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은 물론 천주교를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들도 있었지요. 그들은 천주교 신자를 배경으로 여러 민폐를 저질렀지만, 신부들은 이들을 비호하고 지방관의 법 집행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정부는 프랑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대응을 못했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천주교 박해 기간에 형성되었던 척사의식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지요. 따라서 전국적으로 교안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전국에서 1886년부터 1906년 사이에 모두 305건이 발생했는데요. 그 가운데 1897년에서 1903년 기간 중에 반 이상이 집중되었습니다.
천주교인 집단 살해 부른 프랑스 신부들의 무장습격
1901년은 가장 교안이 많이 발생하던 시기 중 하나였어요. 바로 이 시기가 뮈텔 주교를 정점으로 하는 천주교가 가장 위세를 떨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교안은 그 가운데 가장 비극적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교폐가 있었다 하더라도 천주교인들을 수백 명씩이나 살해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5월 6일, 대정군의 상무사원들은 천주교도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었어요. 이 자리에서 장두로 뽑힌 오대현과 강우백은 봉세관의 폐단과 천주교도의 횡포를 규탄하며, 이런 피해가 없도록 제주성으로 가서 목사에게 호소하자고 제창했습니다. 그 직후 봉세관 강봉헌은 마침 제주에 정박한 화륜선을 얻어 타고 육지로 도피했어요.
그런데 장두 오대현은 이때만 해도 무력 항쟁을 벌이기보다는 평화적 호소에 그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인 신부들이 무장한 신자들을 이끌고 한림의 명월진을 습격하여 총을 쏘고 장두 오대현 등을 체포해서 관아에 넘겨 버렸어요. 후퇴하는 상무사 회원들을 쫓아 대정군으로 몰려가 무기고를 탈취해 주민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대정군의 관노 출신으로 말단 향임층이던 23살 청년 이재수가 새롭게 장두로 나서서 무장봉기로 발전하였습니다. 5월 15일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동진은 강우백이 맡고, 서진은 이재수가 맡아 제주도를 돌아 제주성으로 향했어요. 그들은 황사평에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하면서 양곡 반입은 물론 교통과 육지로 오가는 길을 모두 봉쇄했습니다.

제주성 안의 천주교인들도 군기고와 탄약고에서 무기와 탄약 등을 탈취해 제주성의 성문을 모두 닫은 채 성벽 위에는 각종 포를 설치해서 민군에 맞섰어요. 5월 23일에 제주군수가 중재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내 주민들은 성문의 개방을 요구했지만 신부는 사흘 동안의 말미를 요구했어요. 프랑스 함대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군의 자진 무장해제, 장두들의 한성 압송과 처형
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5월 31일에야 도착했고 그 사이에 제주성 안에서는 천주교도들에 대한 처형이 일어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프랑스 군함에는 신임 제주목사와 강화진위대 1백 명, 궁내부 고문관을 맡고 있던 미국인 샌드도 함께 왔지요. 하지만 프랑스 해군과 민군 사이의 충돌로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어서 대한제국 정부는 황기연을 찰리사로 임명하여 사태를 진정시키고 수습방안을 찾아 나갔어요. 아울러 순검과 군인들을 추가로 파견하였습니다. 제주에 도착한 황기연이 교폐와 세폐의 시정을 명한 황제의 고유문을 붙여 민중을 달랬어요. 이재수를 비롯한 장두들은 6월 11일 스스로 민군 1만 명을 무장해제시키고 자수했습니다.
제주 민중은 다시 모여 들어 장두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찰리사 황기연과 대대장 윤철규는 "조사가 끝나는 대로 풀어주겠다"고 약속하고 7월 18일에 세 장두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한성으로 압송하였어요. 그 이유는 만약에 도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던 그들을 제주에서 처형할 경우, 엄청난 도민들의 저항이 예상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평리원에서 열린 재판에 회부되었고, 10월 9일에 사형이 언도되어 다음날 한성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재수를 비롯한 민군에서는 이 사건이 제주성을 임의로 점거한 천주교 세력의 교폐와 세폐 때문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국가를 대신하여 난민을 진압한 의병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정부는 ‘교폐’ 탓, 천주교는 ‘세폐’ 탓
그런데 찰리사 황기연은 교폐를 부각시켜 강조하면서, 세폐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요. 그것은 결국 내장원에게 책임이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강봉헌에 대해서 전혀 책임을 묻지 않았어요. 하지만 천주교 측에서는 봉세관의 세폐와 지방관이 상무사를 만들어 교인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 공사관은 대한제국 정부에 피살된 교인들을 위한 공동묘지의 제공을 요구하였어요. 결국 1904년에 민군의 집결지였던 황사평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아울러 배상금 요구에 대해서는 우선 대한제국 정부가 천주교 측에 갚았어요. 그리고 석방된 전 대정군수 채구석을 통해 전 도민이 공동분담하여 처리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국가는 없었어요. 정부는 프랑스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하였고,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의화단의 난같이 비화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였습니다. 양측을 중재하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지방관도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지요.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대량살상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반제(反帝)운동도, 민란도 아닌 ‘교안’이라 하는 이유
프랑스 신부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에 대해 저항을 했다고 해서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요. 그런데 그들은 프랑스인 신부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제주도민의 어업권을 직접 침해하고 있었던 일본에 대해서도 반대운동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심지어 일본 망명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어민들은 특히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 진영에 무기를 제공함으로서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였어요. 이재수가 이끄는 서진의 장두들이 민란 막바지에 비양도에 있는 일본인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도 역시 군함을 파견하여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이 사건을 교폐로 몰아, 프랑스와 천주교를 공격했어요.
그렇다고 이 사건을 민란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민란이란 대개 세금의 불법징수를 비롯한 지방 공권력의 폐단 때문에 일어나지요. 그런데 민군의 대상은 지방관도 향리들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방관들은 당시 봉기를 부추기거나 통제력을 상실한 채 양 측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지요. 따라서 일반적인 민란의 성격과도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재수의 난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당시 이재수가 대표적인 장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민란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장두들도 있었기 때문에 부적절하지요. 대정에서 추모비석을 세울 때, 삼의사비라고 했던 것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이재수는 지나치게 잔인한 수법으로 천주교인들을 살해하였어요.
한편 천주교 측에서는 최근에 교안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천주교가 제국주의와 함께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빚어진 충돌을 의미하는 교안은, 역사용어로서 정착하여 세계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그런데 신축이라는 간지는 젊은 세대들에게 생소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1901년 제주교안’을 제안하고 싶어요.
제주교안 그 이후, 화해와 상생을 위하여
1901년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천주교는 그 후 제주 사회에 기여하는 선교의 모습으로 변모했습니다. 온주밀감을 도입하여 나누어 주고 1909년에는 신성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을 시작했어요. 그 결과 1회 졸업생 가운데 강평국, 고수선, 최정숙은 경성여자고보에 진학했다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천주교인이었던 강평국의 부모는 제주교안 당시에 살해되었지요.
역시 1901년 아버지를 잃었던 전아오는 신부가 되기 위해 대구의 가톨릭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는 한국인 최초의 바티칸 유학생으로 뽑혀서 1920년에 우르바노 대학에 입학했는데요. 거기서 최초로 교황을 알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22년에 안타깝게도 현지에서 세상을 떠나 신부로 서품을 받지 못했는데요. 얼마전 그가 남긴 기록들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주교안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외지인에 의해 작성된 것이 남아 있어요. 갑오개혁 당시 외부대신을 역임하고 아관파천 후에 제주로 유배 중이었던 김윤식의 일기인 「속 음청사」가 현지에서 썼던 가장 직접적인 기록입니다. 현기영 소설가의 「변방에 우짖는 새」도 이 일기를 기본으로 쓰여졌어요. 제주인들의 시각으로 작성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운 대목입니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이미 제주 선교 100주년을 맞아 과거 교회의 잘못을 반성하였고,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 선언]을 채택했어요. 당시 양측은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다짐했습니다. 120주년에도 천주교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가 직접 교회의 과오를 반성하는 입장을 발표했고, 화해의 탑을 황사평에 세우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천주교의 ‘희년맞이 신축교안 토크 콘서트에 주교께서 출연하여 제주 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화해를 언급했습니다. 어떤 인간이나 조직도 살아가면서 과오를 범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1901년 제주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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