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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0일 수요일

"최말자가 해냈다" 61년 만에 바로잡힌 검찰·사법부의 흑역사

 10일 재심 결과 부산지법 "무죄" 선고, 성폭력 사건 첫 사례... 형법학 책 새로 써야

61년 전 성폭행을 시도한 남성의 혀를 깨물었단 이유로 가해자로 몰렸던 최말자씨가 10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에서 무죄 결과를 받아들자 손을 번쩍 들고 있다. ⓒ 김보성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재심 사건은 무죄를 받으면 결과를 공시하게 돼 있습니다. 원하십니까? "

불과 1분 남짓한 판결로 성폭행 남성에 맞섰던 피해 여성을 가해자로 몰았던 검찰과 사법부의 흑역사가 61년 만에 바로 잡히는 순간이었다. 재판부가 이를 공개하겠느냐고 묻자 최말자(79)씨는 당연한 듯 "네"라고 답했다. 동시에 무죄여서 항소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자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법정 안에서 함께한 여성들은 활짝 웃으며 최씨를 반겼다.

최씨 사건 재심 재판부, 사과 없이 짧게 '무죄' 선고

10일 이른바 '강제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불리는 최말자씨 재심 사건의 결론이 내려졌다. 부산지법 형사5부(김현순 부장판사)는 이날 오후 부산법원종합청사 352호 법정에서 선고기일을 열어 최씨의 중상해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 부장판사는 "이 사건 기록에 의하면 피고인의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인정된다. 상해죄도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죄를 선고한다"라고 판결했다. 기나긴 시간 끝에 이날 재판부는 성폭행을 시도하는 가해 남성의 혀를 깨문 건 최씨가 자신의 신체와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에서 벗어나려 한 행위라고 재판단했다.

61년 전 성폭행을 시도한 남성의 혀를 깨물었단 이유로 가해자로 몰렸던 최말자 씨가 10일 부산지법 재심 선고에서 무죄 결과를 받아든 뒤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김보성

최씨는 18살이던 1964년 성폭력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되레 가해자로 몰려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오점이었지만, 형법학 책과 법원 100년사 등에 실리며 정당방위 인정 범위를 다툰 대표적 판례로 거론해왔다.

그러나 이번 재심으로 내용을 다시 써야 할 판이다. 평생 억울함 속에 살아온 최씨가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용기를 내어 지난 2020년 재심을 청구해 받아낸 결과다. 그는 잇달아 기각 결정이 나와도 굴하지 않고 문을 두드렸고 지난해 12월 대법원 파기환송을 거쳐 지난 2월 부산고법 재심 개시를 끌어냈다.

공판기일에서 구형, 최후변론까지 한 번에 진행되면서 속도감 있게 선고일이 잡혔다. 지난 7월 검찰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했을 최말자님께 가늠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드렸다. 깊이 사죄드린다"라며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이로부터 한 달여 이후인 이날 법원도 무죄를 결정하면서 다음 바통을 이어받았다. 최씨가 재심을 시작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법정 밖을 나온 최씨는 후련한 마음으로 "최말자는 무죄다" "최말자가 해냈다"를 여러 번 외쳤다. 그 옆으로는 "정당방위 인정" 손팻말을 든 수십 명의 여성단체 회원들이 나란히 자리했다. 이들은 이번 판결이 갖는 특별한 의미를 짚으며 평생을 싸운 최씨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 속에는 검찰과 달리 별다른 반성이 없는 사법부를 향해 아쉽다는 평가도 있었다. 선고를 지켜본 권아무개(40대) 씨는 "판결이 짧아 좀 화가 난다. 오랫동안 고생한 최말자님께 과거 법원을 대신해 정중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부산 돌려차기 피해자인 김진주(가명)씨도 현장에 나와 "저라면 최 선생님처럼 61년을 기다리지 못했을 것 같다. 이대로 끝나선 안 된다"라며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시대가 바뀌어 무죄가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무죄"

판결 직후 부산변호사회 건물로 자리를 옮긴 여성단체들은 국가에 책임을 묻는 작업까지 최씨와 같이하며 더는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로 몰리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이번 판결이 재심으로 성폭력 사건을 바로 잡은 최초의 사례란 점을 부쩍 강조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61년 전 최씨를 법적 가해자로 몰았던 그 장소에서 그날과 완전히 다른 결정이 나왔다.

"61년 전 수사 재판 과정에서의 잘못, 즉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바꾼 큰 과오를 재심을 통해서 바로잡았습니다. 그간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사건과 마찬가지로 수사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지위를 잃었습니다. 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이번 판결이 관련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길 바랍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무죄인데도 성차별적 편견과 인식 때문에 오판되었던 사건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준 최말자님 덕분에 다시 기회를 얻었습니다...(중략) 또 재심 개시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만으로도 사유를 인정한 역사적 판결입니다. 널리 알려져야 합니다." -김수정 변호사

만감이 교차한다는 최씨는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껏 달려올 수 있었다고 공을 돌렸다. 그는 성폭력에 맞서 대항했을 뿐인데도 가해자가 됐던 과거를 벗어나 이제 희망을 만들고 싶단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 자신과 같은 억울한 사건을 더는 반복해선 안 된다는 쓴소리를 던졌다. 그러기 위해선 엄단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지금도 성폭력 사건이 넘쳐납니다. 피해자들은 성폭행에 죽음까지 당하지만, 가해자들은 어떻습니까? 탄원서를 쓴다든지 하면 사형선고도 무기징역으로 또 (사회로) 나오기도 합니다. (중략) 그들에게 무거운 엄벌이 필요합니다."

61년 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던 최말자 씨가 10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재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최말자는 무죄다"를 외치고 있다. 최씨는 61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2025.9.10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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