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악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나치의 선전 포스터, 나치 소년음악대 사진, 베를린 유대인 묘소
여름휴가를 이용해 초등학교 5학년인 딸과 여대생인 두 조카와 유럽을 다녀왔다. 함부르크에서는 독일인 의사와 결혼해 34년째 사는 화가가 길잡이를 해주었다. 그 지인이 안내해준 곳은 손흥민이 뛰던 축구장이나 비틀스가 초기에 활동했던 공연장이 아니라 나치의 유대인수용소였다.
용서와 화해, 미래로의 전진을 강조하며 아픈 진실을 드러내길 꺼리는 한국의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은 물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어하는 한국의 부모들도 아이들을 잘 데려가지 않을 곳이다. 그러나 지인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곳은 천국이 아니라 그 지옥이었다. 지인은 고3인 딸과, 때마침 한국에서 온 동생과 초등학교 6학년인 조카딸도 데려갔다.
조카들은 이 탐방이 역사유적에 거부감을 보이며 주로 쇼핑에 눈독을 들이는 데 불만을 품은 ‘꼰대 삼촌’의 ‘기획’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인 가족의 전적인 선택이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유대인 수용소 막사, 유대인 수용소 그림, 노이엔감메 수용소
함부르크 시내에서 차로 1시간쯤 걸리는 한적한 시골에 있는 노이엔가메수용소는 흔한 기념품 가게 하나 없었지만, 아이들은 역사를 정치인이나 언론인, 학자에게만 맡겨두지 않은 평범한 함부르크 시민의 열정에 감동한 때문인지 다행히도 불평을 터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딸은 “서대문형무소 같은 곳이지?”라거나 “나치들이 아이들도 죽인 거야?”라고 물으며 관심을 보였다. 나치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동성애자와 공산당원은 물론 나치에 반대한 독일인들도 죽이고, ‘장애인·어린이 안락사 계획’에 따라 아이들을 수도 없이 살해했다는 말엔 딸도 수다스런 입을 한참이나 다물었다.
18개국 점령지에서 끌려온 10만명이 수감돼 5만명이 살해된 북독일 최대의 이 수용소엔 돼지 움막보다 못한 막사가 당시의 참상을 보여줬다. 벽엔 나치가 프랑스 점령지에서 붙인 선전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들(나치)은 유럽을 볼셰비키 혁명(공산화)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피를 흘리고 있으니, 당신들은 노동을 바쳐라’는 글이었다. 이곳에 수감됐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이 사진과 함께 적힌 앨범들도 있었다. 지인은 독일인 청년이 시골마을의 유대인 친구를 잡아가는 것을 항의하다가 끌려와 죽었다는 장면에서 흐느꼈다.
조카들과 딸은 아직은 모르는 듯하다. 이런 비범한 악이 비범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지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독일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인간 쓰레기들을 청소하자’는 히틀러에 열광한 대다수 독일인들의 동조와 찬동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을. 이번 여행 첫 방문지인 프랑스 파리에서 혁명기념일(7월14일 바스티유 데이)을 맞아 에펠탑에서 수백만명의 군중과 함께 즐긴 불꽃축제도 영화 <레 미제라블>에 나오듯 그런 독재를 거부한 평범한 사람들의 각성과 참여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특히 우리의 고국에서도 월남한 개신교인들이 앞장서 ‘공산당을 때려잡자’는 서북청년단과 같은 나치식 살상이 있었고, 아직도 국정원이 게슈타포(비밀경찰) 식으로 평범한 시민의 일상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지인이 우리를 굳이 이곳에 데리고 간 것은 ‘평범의 악’의 두려움을 깨우쳐주고 싶어서였을지 모른다.
*걸림돌과 걸림돌을 보는 아이들.
지인이 시장으로 가는 길에 고급아파트 현관 앞쪽 바닥에 도드라진 금색 보도블록을 보여줬다. 독일인들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들이 살던 집 앞에 유대인들의 약력을 적어 설치한 ‘걸림돌’(슈톨퍼슈타이네)들이다. 한 예술가의 제안으로 시작된 ‘걸림돌 프로젝트’에 참여해 만든 5만개 중 하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가 아니라, 나치에 동조한 자신들의 무지와 죄를 깨우쳐 다시는 그런 자들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자칫 넘어질 수 있는 걸림돌을 현관 앞에 자기 돈으로 설치한 것이다.
해방 70돌을 맞아 다음달 9일 개신교가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행사를 한다. 공산당에게 큰 핍박을 당한 뒤 피의 보복의 주도자가 되기도 한 개신교회의 주도로 ‘광복 70년, 한국교회 평화통일 기도회’를 연다는 것이다. 같은 악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그 ‘걸림돌’을 보고 온, 개신교도인 두 조카와 딸이 그날 서울광장에서도 독일에서의 감동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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