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숨어사는 문재인을 취재하러 갔다가 그의 서재를 구경한 적이 있다. 책은 사방을 가득 채웠고 그 빛깔은 다채로웠다. 변호사답게 낡은 법서들이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셔져 있었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은 손때가 묻은 채 책장에 빼곡해 젊은 시절의 고뇌와 열정을 엿볼 수 있었다. 뭉텅이 뭉텅이로 눕혀져 있는 대하소설은 서재를 흐르는 강 같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야생화 도감은 책 먼지 사이에서 풀꽃 같은 향기를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없는 게 딱 하나 있었다. 경제를 다룬 책이었다. 경세제민(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함)의 의지를 확인해보고 싶어 서재를 몇바퀴 돌았는데도 그 흔한 경제원론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애당초 정치를 해볼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
실물경제 감각은 더 형편없다. 큰맘 먹고 샀다는 집은 멧돼지가 수시로 드나들고 경운기 한 대도 오가기 힘든 골짜기에 파묻혀 있었다. 3500만원짜리 전셋집에 사는 형편인데도 <한겨레> 창간 초기 부산지사장을 억지로 맡아 들어간 비용만 1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던 문재인이 변했다. 대표가 된 뒤 자신과 당의 운명을 온통 경제에 다 걸었다. 하루의 일정 대부분을 경제 관련으로 채우더니 17일 청와대 회동에서는 경제정책만 가지고 박근혜 대통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경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는 얘기다.
문재인은 1년 넘게 경제전문가들로 이뤄진 공부모임 5~6개에 끼어서 꾸준히 공부를 해왔다고 한다. 참여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에는 가슴 아파하면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단다. 지켜본 한 참모는 “노무현 대통령보다 학습능력이 두 배는 뛰어난 것 같다”고 표현했다.
2월말에는 경제지 기자들만 모아놓고 간담회를 연 적이 있는데, 한 참석기자는 “꽤 까다로운 질문이 나왔는데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변하고 몇몇 대목에서는 도도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신감을 내보였다”고 평가했다. 하긴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한 실력이니 경제학인들 습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기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 국가의 경제정책이다. 팍팍한 삶의 현장을 찾아 서민들 등을 두드려준다고 국민들이 감동을 받는 건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큰 틀은 만들었지만 아직 구체적인 내용들은 채우지 못하고 있다. 신장개업하는 식당으로 치자면 입지(경제 주력)가 좋고 간판(소득주도 성장)도 손님을 끌 만하며 주인(문재인)도 많이 친절해졌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주방(정책 생산)이 썰렁하다.
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을 제대로 써먹어야 한다. 새누리당의 여의도연구원은 여론조사에 장점을 발휘해 선거전문 연구소라는 명성을 얻었다. 반면에 민주정책연구원은 정체성이 모호하다. 심지어 연구원은 갈 곳 없는 당직자들이 모여서 국고보조금을 인건비로 축내는 곳이라는 비아냥까지 듣고 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이름을 ‘민주경제연구소’로 바꿀 정도로 확 탈바꿈시켜야 한다.
김의겸 디지털부문 기자
이를 위해서는 원장을 잘 모셔 오는 게 관건이다. 당과 경제철학을 함께하면서도 학계에 신망이 있는 ‘거물’이 필요하다. 그가 손발이 맞는 전문가들로 진용을 새로 짜고 정책을 촘촘하게 만들어내야 한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은 김종인 박사를 삼고초려 끝에 모셔 왔다. 그 뒤 박 대통령은 참모들이 써준 원고 몇줄 읽었을 뿐인데도 경제민주화의 적임자로 자처할 수 있었다. 헌법 제119조 2항인 경제민주화 조항을 주도했다는 김종인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지도자에게는 개인의 학습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필요한 게 사람을 쓰는 방법이다. 문재인의 경제 실력도 누구를 모셔 오는지에서 결정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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