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24 20:54수정 : 2015.03.25 10:12
성한용 선임기자의 현장칼럼 창
강박증과 초조감은 국정을 망가뜨릴 수 있어
지금은 ‘잘하는 일’ 아닌 ‘필요한 일’ 해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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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0일 오후 서울 연무관에서 열린 한국청년회의소 대표단과의 대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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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박근혜 대통령이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 것일까? 중동 순방을 마치고 리퍼트 대사 병문안을 한 3월9일 이후의 일정을 청와대 자료실에서 찾아보았다.
12일 국가조찬기도회, 장교합동임관식. 13일 케이블텔레비전의 날 기념식, 5부 요인 초청 해외순방 성과 설명회. 16일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 산학연 오찬, 부산대 사물인터넷연구센터 시찰,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 임명장 및 위촉장 수여식. 17일 국무회의, 여야 대표 회동. 18일 경찰대학생 간부후보생 합동임용식, 국정원장 임명장 수여식. 19일 무역투자진흥회의. 20일 한국청년회의소 대표단과의 대화. 21일 한·일·중 외교장관 접견. 23일 한-뉴질랜드 정상회담. 24일 수석비서관회의, 빅토리아 스웨덴 왕세녀 접견.
박근혜 대통령은 화면발이 잘 받는 사람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은 대체로 화사하면서도 단정하다. 젊은 시절부터 축적된 ‘의전 내공’ 덕분일 것이다. 1979년 한복을 입고 리콴유 총리와 건배를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당시 스물일곱살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79년 가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을 미8군 장교 부인들이 장교클럽에 초청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쓴 영어 원고를 밤새 통째로 외워서 정확한 발음으로 연설을 했다. 장교 부인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소문을 전해들은 장교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클럽에 다시 초청했다. 10·26이 터져 두번째 연설은 이뤄지지 않았다.
공식 행사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박근혜 대통령의 안정감은 오랫동안 갈고닦은 단련의 결과인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인이다. 텔레비전에서 대통령 얼굴을 매일 보는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 대통령이 일을 열심히 해서 참 좋다’고 생각할까?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꼭 바람직한 일일까? 국무총리, 비서실장, 각 부 장관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된 1980년대 초 ‘땡전뉴스’라는 게 있었다. 9시를 알리는 신호음 직후 시작되는 뉴스의 첫 소식이 늘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해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북한 사회는 최고 지도자의 직접 지시가 없으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최고 지도자가 일년 내내 전국을 돌며 현지 지도를 하는 이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북한 최고 지도자와 같을 리 없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겨레 텔레비전에 출연한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에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건의와 조언을 부탁했더니 이렇게 말을 한 일이 있다. 방송 어투를 그대로 옮긴다.
“내 마음은, 진심은 이게 아닌데 자꾸 이렇게 오해되는 부분 때문에 속상하실 것 같아요. 박근혜 대통령만큼 애국심과 사명감이 투철하신 분이 계실까요? 그만큼 열심히 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전달 안 되는 부분이 아쉽다고 그러시니까. 일을 좀 줄이시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다 내가 잘하셔야 되겠다, 다 잘 파악하셔야 되겠다, 너무 본인을 혹사하시다 보니까, 너무 힘이 드실 것 같아요.”
그렇다. 대통령으로서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증, 그리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좀처럼 성과가 나지 않는 데 대한 초조감, 또는 두 가지 스트레스의 악순환이 지금 박근혜 대통령을 괴롭히고 있을 것 같다.
궁금증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갑자기 사정에 몰두하는 이유가 뭘까? ‘눈치 빠른’ 새누리당 의원에게 물어보았다.
“간단하다.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여권 안에 박근혜 대통령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기분이 나쁜 거다. 대통령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사정이다.”
무시당하기 싫다는 초조감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사정을 해도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는 것일까? “정권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눈치 빠른’ 의원은 “결국 검찰만 좋은 일 시키고 말 것”이라고 했다. 검찰이 이 기회에 박근혜 정권 비리를 수집해 두었다가 정권 이양기에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카드로 사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곁들였다.
새누리당 두 의원의 분석에는 꽤 일리가 있다. 다급해지면 본능을 따르는 게 사람이다. 그래도 대통령은 그러면 안 된다. 대통령의 강박증과 초조감은 국정을 망가뜨릴 수 있다. 의무감에 쫓겨 자꾸 소리를 지르고 일을 만들면 오히려 일은 일대로 잘 안되고 세상 사람들은 대통령과 정권을 우습게 볼 것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잘하는 일’을 할 때가 아니라 ‘필요한 일’을 해야 할 때다. 평상심을 되찾고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비정규직 해소, 청년층 일자리 등 한두 가지만 붙잡고 몰두했으면 좋겠다.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 걱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청년 일자리가 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해외에 많이 있다”고 했다. 이쯤 되면 농담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중동 특수’, ‘선글라스’, ‘리콴유’ 등의 단어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를 그리워하는 향수가 물씬 느껴진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는 29일 리콴유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날아간다. 파격이다. 그런데 꼭 필요한 일일까?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박정희의 딸’에 머물고 마는 것일까?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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