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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3일 화요일

“김일성 장군 만세” 외쳤던 조선일보 1950년 6월28일 호외

“김일성 장군 만세” 외쳤던 조선일보 1950년 6월28일 호외
[단독] 최초 공개, 전쟁 발발 사흘째 "공화국 서울을 해방"… 방응모는 왜 서울을 떠나지 않았을까
입력 : 2015-03-03  23:06:40   노출 : 2015.03.04  09:31:41
미디어오늘 | media@mediatoday.co.kr    
미디어오늘이 1950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호외 원본을 확보했다. 6월 28일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날이다. 이번 호외는 지금껏 조선일보사사(社史)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던 내용으로, 전쟁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6월 28일자 호외 제목은 <人民軍(인민군) 서울 入城(입성)>이며 부제목은 ‘米國大使館(미국대사관) 等(등)을 完全解放(완전해방)’이다. 호외는 “28일 오전 3시 30분부터 조선 인민군은 제 105군 부대를 선두로 하여 서울시에 입성하여 공화국 수도인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호외는 “입성한 부대들은 서대문 마포 양 형무소에 구금된 애국자들을 석방하고 괴뢰집단의 소위 대한민국 중앙청 서울시청 검찰청 미국대사관 은행 소위 유·엔 위원단 및 중요한 도로 교량 체신 철도 및 각 신문사를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호외는 “오래 갈망하여 맞이하던 조선인민군대를 서울시민들은 열열한 환호로서 환영하였다”고 밝혔으며 “서울에 있던 만고역적 리승만 도당들과 미국대사관 및 유·엔위원단들은 이미 27일 오전 중에 서울에서 도망하였다”, “서울은 완전히 우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도로 되었으며 서울 전체 시민들의 거리로 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1950년 6월28일자 호외.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호외는 서울시민들을 향해 “치안당국의 지시를 절대 신임하고 반동들의 온갖 모략에 귀를 기우리지 말라”, “반동분자들의 데마(데마고기, 유언비어·선전선동)와 테로(테러) 방화 파괴 등에 최대의 경각성을 돌리라!”고 촉구했다. 조선일보는 호외 마지막 부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우리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인 김일성장군 만세!”를 적었다.
미디어오늘이 확인한 조선일보 호외는 조선일보 공식기록에 없다. 조선일보는 1950년 6월 26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을 보도한 뒤 6월 27일 저녁 서울 본사의 신문 제작을 중단했다. 조선일보는 10월 23일에서야 1차 전시판을 냈다. 따라서 이번 호외는 역사에 없던, 전쟁기간 중 발행된 조선일보 지면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일보 6월 28일자 호외는 누가 썼을까.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첫날 북한 기자들이 내려와 윤전기를 장악해 그날 오후 바로 호외를 찍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북한을 지지했던 일부 조선일보 기자들이 호외 제작을 주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조선일보 90년시사편찬실, 2010)에는 “6월 26일 조선일보 안에 지하조직으로 있던 좌익세력들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회사 분위기도 급변했다. 신문사에 들어서는 사장 방응모에게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때도 모르고 나타나느냐’고 막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혀있다. 조선일보 내에 북한지지 세력이 존재했다고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태평로일가>(조선일보사, 1983)에 따르면 방일영은 방응모와 함께 6월 26일 조선일보사를 찾아갔을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조부를 가까이 모셨던 총무부장 김석택이나, 또 신문사에 꽤 오래 근무했고 가깝다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이 이미 지하조직을 구성해 놓고 있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만저만 상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피난을 가지 않고 신당동 자택에 머물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그해 7월 6일 납북됐다. 그는 1884년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언론사 최초로 취재용 비행기(Salmson 2A2)를 구입한 재력가였으며 1946년 8월 한국독립당(위원장 김구)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방응모의 납북 후 행적은 “1950년 9월 28일 트럭에 실려 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는 증언만 있고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조선일보 사람들>(랜덤하우스 중앙, 2004)에 따르면 조선일보에서는 전현직 직원 20여명이 전쟁 기간 중 납북됐다.
방응모는 왜 피난을 떠나지 않았을까. <방일영과 조선일보>(방일영문화재단, 1999)에서 전택보씨는 “방응모씨가 피난을 가지 않은 것은 전체 상황을 잘못 판단한 원인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자기가 은혜를 베푼 사람들을 지나치게 믿었기 때문이다. 방응모씨는 조선일보를 경영하면서 서중회라는 장학회를 조직하여 성적이 우수하지만 가정이 빈곤해 고생하는 학생 60여명을 도왔는데, 그들 가운데 대부분이 좌익이 되었고 월북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고 밝혔다.  
<계초 방응모>(방일영 문화재단, 1996)의 저자 이동욱은 방응모가 피난을 떠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방응모)는 자신이 키우다시피 한 계초장학회 학생들의 일부가 공산당에 가입하고 있었다는 점에 너무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이 같은 서술을 종합하면 조선일보 6월 28일자 호외는 조선일보 일부 기자들의 작품이고, 평소 이들의 성향을 용인해 왔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이들을 믿고 피난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남아있다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임종명 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만약 조선일보 직원들이 호외를 발행했다면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남한에서 대대적으로 정리된 프락치들이 여전히 살아남아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당시 소련군이 사용하던 어투,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문법도 확인할 수 있다”며 “역사적 사료로서 유용하다”고 밝혔다.
이번 조선일보 호외와 관련,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은 “조선일보가 발행한 신문이 아니다. 28일에 발행한 신문은 따로 보관되어 있다. (호외가) 발행됐다는 기록도 없다”고 밝혔다. 조선일보가 보관하고 있는 28일자 신문은 27일 오후에 발행된 것이다. 당시에는 석간신문을 다음 날짜로 발행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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