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3.20 14:39수정 : 2015.03.20 15:20
“낸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아…정신과 치료
주변 학생들 보면 단원고 아이들 계속 떠올라”
세월호 뒤 집안 엉망…1억짜리 화물차도 잃어
복지부에 의상자 신청했지만 심사 대상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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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증인으로 나온 김동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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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당시 배 안의 소방호스를 이용해 단원고 학생들을 구조해‘세월호 의인’, ‘파란바지의 영웅’으로 불린 김동수(50·제주시 조천읍)씨의 휴대폰 전화번호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4월16일을 가리키는‘010-xxxx-0416’이다. 핸드폰 뒷면에도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김씨가‘세월호의 고통’ 속에 심한 정신적 내상(트라우마)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다 자해를 시도했다. 그는 19일 오후 8시43분께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자택에서 흉기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자해한 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로 있다가 딸에게 발견됐다. 김씨의 딸은 경찰에 신고했고, 긴급 출동한 119구급대가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 그는 응급치료를 받은 뒤 귀가했다.
20일 오전 치료를 받기위해 경기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로 가는 김씨를 제주공항에서 만났다. “몸이 따로 놀아요. 병원에 가서도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다’고 해요. 어제도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녀왔고, 기분이 좋았어요. 하지만 손이 너무 아프니까 이런 쓸모없는 손을 갖고 있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거고요.”
세월호 참사 이전 체격이 좋았다는 김씨는 수척해 보였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국민들은 모든 일이 해결된 것으로 생각해요. 다 보상받고 해결됐는데 왜 그때 일을 못잊느냐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변에서 학생들을 보면 그 학생들이 생각나고, 창문을 보면 세월호 창문에 (매달려)있는 아이들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 일을 쉽게 잊겠어요. 얼마나 머리가 아팠으면 머리까지 밀었겠습니까? 사는 것이 너무 비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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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학생들을 구하고 있는 김동수씨. SBS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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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울컥했는지 잠시 시선을 발밑에 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언론에서는 그를 ‘의인’ 이라고 칭찬했지만 세월호 참사 뒤 김씨의 집안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화물차주였던 그가 세월호 침몰과 함께 1억원 가까운 화물차를 잃어버린 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내는 일하러 다니고, 고3인 딸은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병원 치료와 안산을 오가고, 트라우마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돈을 거의 다 썼다고 한다. 지금은 대출로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주도는 그에게 도비와 국비, 기탁금 등을 합쳐 지금까지 1100만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김씨는 지난해 11월 복지부에 의상자 신청을 했지만, 복지부의 추가자료 보완 요청이 까다로워 자료를 제출하지 못해 심사대상에서 빠졌다.
제주도에 있는 세월호 생존자 23명도 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지만 이들을 치료해줄 시설은 적다. 그는 “제주에도 트라우마센터가 있지만 안산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서 편하게 들려 대화를 하거나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생존자들이 앉아서 얘기하고 고통도 나눌 수 있는 쉼터를 제주도에 처음부터 요구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올해 들어서만 4차례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안산을 드나들었다. 안산에 기거하면서 치료를 받고 싶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1년이 다 됐는데 국민들은 어떻게 안전을 믿을 수 있나.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그래서 답답하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당시 3층 객실에서 난간대를 잡고 갑판으로 올라가 배에 있던 소방호스를 풀어 4층으로 내려가 단원고 학생 20여명을 구했다. 지난해 7월 광주지법 형사11부 임정엽 재판장은 세월호 선원들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했던 김씨에게 “우리들이 본 사람 중 가장 책임감이 강한 분이다. 사람들을 많이 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적 고통을 받고 계신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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