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 시대인 1984년 11월 15일 판문점에서 제1차 남북경제회담이 열렸다. 1983년 10월 '아웅산 폭탄 테러'의 여진이 남아 있는 가운데, 남북 공동번영을 목표로 하는 당국 간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회담은 전두환 대통령의 '8.20' 제의, 북측의 대남 수해물자 지원, 신병현 경제부총리의 '남북한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제의(1984.10.12)' 등을 거치며 성사됐다. 1985년 1월 북측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빌미로 2차 회담 연기를 요청하는 우여곡절 끝에 5차까지 이어지다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됐다.
회담 과정에서 제기된 여러 쟁점들이 경제회담에서 다룰 수준을 넘어선데다, 1985년 7월부터 남측 박철언-북측 한시해 라인 간의 역사적인 비밀접촉이 시작된 사정과도 관련 있다.
30일 공개된 1984년도 외교문서들은 당시 북측이 경제회담에 응한 배경, 북측 관심 분야와 남측 대응 전략, 남북 거래의 성격과 합의 문서의 명칭 등을 둘러싼 남측 정부의 과도기적 인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O 북측이 경제회담에 응한 배경
'경제대책실무위원회'가 작성한 '남북교역 및 경제협력추진계획안(1984.10.29, 아래 계획안)'는 "최근 북한의 태도 및 여건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그 해 북한은 '합영법'을 제정.시행했다. "경제특구의 설정, 대 서방교역의 확대 등 중공(중국)의 사회주의경제체제 개혁시도가 북한에 영향"을 줬다는 게 남측의 인식이었다. 아울러 "남북 간 경제격차로 북한의 집권층은 경제교류가 실익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고 봤다.
남측은 "북한측은 상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남북 간 대화를 장기간 지속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차 경제회담 사흘 전인 11월 12일 최종 확정된 '남북교역 및 경제협력추진계획(아래 계획)'은 "북한은 김정일의 지도자 위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경제 침체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남북교류를 어느 정도까지 수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O 북측 관심 분야와 남측 대응전략
'계획'은 "북한이 제시해온 합작 분야는 지하자원개발, 관개사업, 공동어로 및 어장의 공동이용 등"이라고 밝혔다.
남측의 접근방법과 관련, '계획'은 "남북교역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우선 용이하고 가능한 것부터 제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현이 어려운 합작투자보다는 상품교역을 우선으로 추진"하고 "상호 필요한 상품으로서 정치적 영향이 없고 경제적 실익이 있는 원자재 등 품목부터 교역(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북측의 무연탄.철광석, 남측의 섬유류.종이 등이 첫 단계 교역품목으로 거론됐다.
"초기에 제한된 품목의 교류가 이루어지면 점차 교역의 폭을 확대"하여, "원자재 위주에서 중간재.완제품 등으로 발전시키"는 구상도 제시했다.
아울러 "북한측이 상품교역을 뒤로 하고 이른바 '합작' 사업의 우선적 추진을 주장할 경우에는 우리측에 유리한 합작사업을 제시하면서 '선교역.후합작' 방식으로 유도"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1차 경제회담에서 북측은 '상품교역' 보다는 '합작투자'에 더 관심을 보였다.
O 남북 간 거래의 성격 등
'계획안'은 '내국간 거래'와 '외국간 거래'로 나누어 장단점을 비교한 뒤 "헌법규정, 무역의 편리성 등을 감안"하여 "원칙적으로 내국간 거래로 간주하여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거래방식과 관련해서는 "원칙적으로 제3국 은행발행 신용장에 의한 거래가 가장 합리적이나 초기단계에는 손쉽게 추진하기 위하여 구상교역형태(물물교환)도 수락하되, 일정단계까지 교역이 확대될 경우에 대비하여 청산협정방식에 의한 거래를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계획안'에 대한 관계부처의 검토과정에서 "교역의 지속적인 확대를 위해서는 남한과 북한의 기본적인 경제체제 및 관련법규 상이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협정체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남북 협정의 성격과 문서의 효력을 둘러싼 검토 과정에서 서로 다른 국가 간의 조약으로 보일 수 있는 '합의서' 대신 '약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최종 정리된 '계획'에는 남북 교역 및 투자 '약정안', 남북경제협력위원회 설치 '합의서안'이 함께 들어 있다.
이같은 혼란은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가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정리함으로써 해소된다. 이후 남북 간의 협정은 대체로 '합의서'라는 명칭을 달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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