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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월요일

‘진보 싸가지론’, 독인가 약인가?


‘진보 싸가지론’, 독인가 약인가? 등록 : 2014.09.09 10:33 수정 : 2014.09.09 11:38툴바메뉴 스크랩 오류신고 프린트기사공유하기facebook29twitter18보내기 진중권(왼쪽), 강준만(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좌우 구분 없는 ‘싸가지 결핍’, 왜 진보만 튀어보일까 ‘생활 보수’와 ‘태도 보수’의 공감 얻어내야 집권 가능 [임석규의 정치빡 ⑪] 강준만의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변론도 있고 반론도 나온다. 공감하든, 반감을 갖든 책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좋은 약도 과용하면 독이 되고, 쓴소리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란 선연한 ‘주홍글씨’가 초래할 역효과에 눈감을 수도 없다. 강준만은 이번에도 ‘논쟁적 발제자’를 자임했다. 책 제목을 봤을 때 유시민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영춘이 유시민을 비판하며 했던 그 유명한 말 때문일 것이다. “저토록 옳은 얘기를 어쩌면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할까”라는 표현 말이다. 김영춘의 이 말을 유시민은 매우 아파했다. 유시민이 “싸가지 없다는 비판이 두고두고 나를 가두는 올가미가 될 것”이라고 침울한 목소리로 예언하듯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무렵 유시민의 딸이 고교생이었다. 그 딸이 김영춘을 원망하며 아빠에게 했다는 말이 걸작이다. “그토록 싸가지 없는 얘기를 어쩌면 저렇게 예의 바르게 말할 수 있을까요?” 유시민한테 들은 얘기다. 뛰어난 언어 순발력이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김영춘의 말이 맞을 수 있다. 나는 논리적이라고 말을 했는데 그 말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내 안에서도 그런 지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복지부장관으로 갈 때부터 나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유시민은 나중에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유시민에게서 ‘싸가지 올가미’를 벗겨낼 때가 된 것 같다. 싸가지에 관해서라면 유시민도 욕을 먹을 만큼 먹었고 당할 만큼 당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 김영춘이 “그 말이 너무 일파만파 파장을 일으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헤아릴 필요도 있겠다. 진중권은 강준만의 ‘싸가지론’을 이렇게 평했다. “싸가지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싸가지가 있어도 그 좋은 싸가지로 대중에게 할 말이 없다는 것. 할 말만 있으면 싸가지는 문제가 안 됩니다. 진보·개혁이 무슨 도덕 재무장 운동도 아니고...” 강준만이 무슨 ‘싸가지 비축 운동’ 같은 도적 재무장 캠페인 펼치자는 건 아닐 거다. 논점은 뚜렷하다. 할 말이 있어도 싸가지 있게 말하지 않으면 대중들이 공감하지 못 하는가. 아니면 할 말만 있으면 싸가지 같은 건 문제 안 되는가. 진보진영에서 더욱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는 ‘할 말’인가 ‘싸가지’인가. 이럴 땐 도식적 절충론이 편리하다. ‘할 말’과 ‘싸가지’ 둘 다 필요하다.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싸가지 없이 얘기하면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아무리 싸가지 있게 말해도 할 말이 없다면 공허하다.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파이프가 왕창 새면 수돗물을 마시지 못한다. 아무리 파이프가 좋아도 흙탕물은 못 마신다. 강준만은 파이프가 샌다는 점이 진보의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사람들에겐 옳음과 그름의 잣대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좋음과 싫음의 잣대가 사람들의 판단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옳은 얘기보다 그걸 싸가지 있게 말하는 법이 더 중요할 때도 많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 옳은 얘기라도 싸가지 있게 전달하지 않으면 오히려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이다. 대중은 이성과 논리보다 감성과 감정에 더 크게 좌우되는데, 진보는 대중의 이런 속성을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진보는 상대를 비판하기 위해 상처를 후비고 헤집어내는 데 지식과 논리를 총동원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큰 상처를 입고 만다. 상대에게 모멸감을 주고, 담론에만 집중한 나머지 예의를 벗어난 표현을 마구 쓰고,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하고, 왜 진보를 좋아하지 않고 보수에 표를 찍느냐고 호통치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동료에게도 상처를 주고, 번드르르하게 말해놓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입장을 바꾼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구멍이 뚫리고 깨져버린 진보의 파이프로 훌륭한 수돗물을 아무리 흘려보내도 결국 줄줄 새버린다는 것이다. 진보로 분류되는 몇몇 논객과 정치인들을 보면, ‘정말 말 한 번 싸가지 없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들 ‘싸가지 없는 상위 5%’가 ‘싸가지 없는 진보’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한 ‘공로’가 80%는 넘는다고 본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보수 쪽에도 싸가지 없는 말들만 골라서 하는 정치인이 5%는 족히 될 것이다. 굳이 이름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싸가지 결핍증’으로 말하자면 보수도 예외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보수는 좀체 ‘싸가지 결핍증’에 걸리지 않는 건 도대체 무슨 연유인가. 싸가지 없음이 진보의 ‘전매 특허’도 아닐 텐데 말이다. 물론 ‘보수도 싸가지 없기는 마찬가지’란 주장은 논점을 벗어난 얘기다. 진보가 ‘싸가지 없는 보수론’을 펴서 위안을 찾고 알리바이로 삼는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 문득 우울한 예감이 든다. 진보는 ‘싸가지 없는 족속’이란 올가미를 결코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탓이다. 유시민이 아직도 ‘싸가지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이건 좀 심한 자기비하 아닌가. ‘싸가지’란 단어는 어감이 매우 강해서 욕설로 쓰이기도 한다. ‘싸가지 없는 놈’이란 표현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일단 ‘싸가지 없는 부류’로 분류되면 ‘구제불능 왕 싸가지’란 선명한 낙인이 찍혀버린다. 좀체 탈출할 수 없는 강력한 올가미에 걸리는 거다. 그러고 보면 ‘싸가지 없다’는 손가락질만큼 싸가지 없는 행위도 없는 셈이다. 진보에 ‘싸가지 없다’는 굴레를 씌우고 족쇄를 채운 게 다름 아닌 진보다. 결과적으로 진보는 ‘싸가지 없는 진보’ vs ‘싸가지 있는 보수’의 구도를 만들어내 스스로 덫에 갇히고 늪에 빠져버려 허우적대고 있는 꼴이다. 전남도지사 이낙연이 2012년 대선 직후 ‘생활 보수, 태도 보수’란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다. 어떤 정치적 주장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내 생활에 나쁜 영향을 줄지도 모를 변화는 거부하는 성향을 ‘생활 보수’, 민주주의·인권·복지 같은 진보적 가치를 충분히 중시하지만, 막말이나 거친 태도, 과격하고 극단적인 접근은 싫어하는 성향을 ‘태도 보수’로 명명한 것이다. 유권자의 16%에 이른다는 생활보수층의 공감대를 얻을 만한 콘텐츠를 개발하지 못하면 진보는 집권이 어렵다. 이들은 진보가 말을 싸가지 있게 한다고 진보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진보는 이들에게 ‘할 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진보가 아무리 훌륭한 말을 해도 싸가지 없다는 인식을 씻지 못하면 태도보수층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것이 진보가 딛고서 있는 현실이다. 강준만의 지적대로 새누리당과 보수를 숭배하거나 존경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여 집권할 수 있어지고 그래야만 집권 후에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보를 옴짝달싹 못하도록 가두는 두 개의 강력한 올가미가 있다. ‘무능한 진보’와 ‘싸가지 없는 진보’란 낙인이 그것이다. 두 개의 올가미 모두 사실이나 과학이라기보다 풍문이나 미신에 가깝다. 무능한 진보와 싸가지 없는 진보는 그 자체로 ‘유능한 보수’와 ‘싸가지 있는 보수’를 기정사실화한다는 점에서 더욱 위협적이다. 수많은 반론이 있지만 한 가지만 예로 들자. 보수가 유능하다면 ‘구제금융 사태’ 같은 건 발생하지 말았어야 한다. 무능과 싸가지 없음이란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보는 결코 집권하지 못할 것이다. 무능한 데다 싸가지조차 없다면 도대체 누가 표를 주겠는가. 임석규 논설위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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