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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월요일

외국 경제학자가 파헤친 '이명박근혜'의 실체


[게릴라칼럼] 미리 본 <21세기 자본>... 피케티가 한국에 보내는 경고 14.09.02 10:49l최종 업데이트 14.09.02 10:49l 강인규(foucault) '게릴리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기사 관련 사진 ▲ <21세기 자본> 겉그림 ⓒ 글항아리 관련사진보기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다니. 700페이지 가까운 이 책은 전화번호부만큼 두껍고 벽돌처럼 무거워 들고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표지 디자인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투박하고 단순한 영어판 표지는 1970~80년대 한국에서 공안당국의 눈을 피해 찍어낸 '불온서적'을 연상시켰다. 글자만 찍힌 소박한 표지는 현란한 그림과 사진으로 도배된 책 속에 묻혀 잘 드러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학술서 아닌가. 그것도 수치와 그래프가 가득한 경제이론서다. 애초에 일반대중을 겨냥한 책이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이 책은 미국시장에 풀리자마자 무섭게 팔려나갔고, 매진 사태가 계속되어 출판사를 놀라게 했다. 결국 이 책은 하버드대학교 출판부 신기록을 세워, 출간 첫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되었다. 책은 5월 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올랐고, 20주가 지난 8월 초 현재까지도 순위권을 지키고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딱딱한 책에 열광하는 것일까? 경제학, 99%가 분노하는 이유를 보여주다 <21세기의 자본>은 저자의 모국 프랑스에서도 그런대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미국의 '피케티 광풍'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영국에서의 반응은 미국 같지 않았다. 미국의 빈부차가 영국과 프랑스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 같다. 이 책이 나오기 전, '점령시위'가 미국 월스트리트와 전국을 뒤덮으며 '99%를 위한 사회'를 만들 것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미국사회는 <21세기 자본>이 분석하는 자본의 문제점을 몸으로 깨닫고 있던 것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진행되면 소수에게 부가 집중될까? 아니면 반대로 성장, 경쟁, 기술발전으로 인해 부가 고루 나뉘게 되어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인가? 첫 번째 관점은 19세기에 칼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이고, 두 번째는 20세기 이후 사이먼 쿠즈네즈 등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것이다. 21세기에 살게 된 우리는 어떤 입장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누가 자본주의의 결말을 제대로 예견했을까? 토마 피케티는 앞의 두 입장 모두가 충분한 증거 없이 내려진 판단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물론, 직관에 의한 결론이라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저자는 오노레 드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 등의 문학가가 직관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삶을 섬세하고 예리하게 포착해 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피케티는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자본주의의 속성을 입증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본주의에 대해 상반된 입장이 서로 목소리만 높이는 상황에서는 경제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진단과 처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15년에 걸쳐 방대한 문서작업을 했다. 지난 300년 동안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일본 등 20여 개국의 세금자료 등을 비교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척 흥미롭다. 오늘날 미국 = 18세기 혁명 전 프랑스? 기사 관련 사진 ▲ 미국과 유럽의 소득불균형을 보여주는 그래프. 유럽 국가들은 1920년 이래로 소득불균형이 급격히 줄어든 반면, 미국은 1940-1970년 사이에 소득 불균형이 크게 줄어든 것을 볼 수 있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80년대 레이거노믹스로 대표되는 방임주의의 도입으로 인해 소득격차가 다시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피케티는 자본에 대한 전 지구적 과세강화와 누진세 강화를 통해 소득불균형이라는 자본주의의 핵심적 모순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 Piketty 관련사진보기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의 소득집중도는 세계 최악이다. 2012년 기준으로 상위 10%가 전체소득의 48%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려 절반을 1할의 부유층이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소득 집중도가 낮은 편이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상위 10%가 전체의 약 33% 가량을 점하고 있고, 스웨덴의 경우는 더욱 낮아 28% 미만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미국이 항상 그랬던 것이 아니며, 유럽도 항상 그랬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의 소득집중도는 미국보다 높았다. 네 나라 모두 45%를 훌쩍 넘어설 때 미국은 40%를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이것이 1910~1920년 동안,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뒤집히게 된다. 이 시기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많은 유럽국들이 '1차 세계대전'에 휩쓸렸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이 사실은 마르크스가 비판받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왜 자본주의가 발전했던 영국이나 독일 등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농업국을 벗어나 산업혁명이 겨우 불붙기 시작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피케티의 설명은 간단하다. 전후 유럽국가들이 대거 사민주의로 전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서유럽국가들의 복지정책 대부분은 전후에 고통 받던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그때 채택된 사회보장제도는 지금까지 비교적 견고하게 유지되며 소득불균형을 막아주는 기능을 했다. 주류경제학이 가르쳐온 바에 따르면,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조절기능을 통해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려면, 개입을 최소화해 '순수한 시장'을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탈규제'와 '작은 정부'로 대표되는 자유방임주의를 가장 열렬히 신봉해 온 나라다. 하지만 미국은 혁명 전 프랑스 왕정과 비슷하거나 더 심한 소득불균형을 겪는 나라가 되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부자를 편애하는 '보이지 않는 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보이지 않은 손'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그런 게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물론 <21세기 자본>도 '보이지 않는 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 손이 전혀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핵심내용은 부등식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r > g 여기서 "r"은 자본수익률을 의미하고, "g"는 경제성장률을 의미한다. 자본수익률이란 돈 있는 사람이 그 돈을 굴려 얻어내는 수익을 말한다. 부가 사회에 분배되려면 경제가 성장해야 하는데, 만일 경제성장률이 부자들의 소득 증가율보다 크다면 장기적으로 부는 균형 있게 분배될 것이다. 반대로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크다면,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양극화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피케티의 부등식을 보면,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크다. 이것이 피케티가 밝혀낸 자본주의의 '핵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근원적으로 부를 편중시키는 제도라는 것이다. 피케티는 여기서 소득 불균형이 '시장 실패'나 정책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시장 자체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방임주의가 가르치는 대로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둘 경우, 소득 불평등을 막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토마 피케티의 <자본> 열풍을 다룬 미국 경제주간지 <비지니스위크> 표지. 불어 원서를 번역한 이 책은 미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 Bloomberg 관련사진보기 그렇다면 소득 불평등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인가? 피케티는 소득 불균형이 줄어들었던 예외적 사례로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전쟁이고, 하나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다. 전쟁은 재산을 파괴하고, 재산권자를 살해하며, 살인적 인플레이션으로 금융재산을 종잇조각으로 만든다. 전시에는 국가가 필요에 따라 사유재산을 국유화하는 일도 잦다. 전쟁을 불균형 치유의 대안으로 고를 수는 없으므로, 남은 것은 정부의 개입이다. 부자에 대한 누진세를 강화하고 복지를 확충함으로써 시장 고유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다. 미국이 한때 누렸던 1940~1970년 유례없는 활황기는 바로 이렇게 찾아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0년대 경제공황으로부터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대적인 복지정책을 마련했다. 사회보장제도 도입, 노동자 단체교섭권 보장, 실업자 구제, 누진세 강화 등 대대적인 정부 개입에 나선 것이다. 부유층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빈곤층 보호에 열을 올리는 대통령을 향해 부자들은 '계급의 배반자', '빨갱이(pinko)'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세기가 다 되어 가는 현재, 루스벨트는 워싱턴, 링컨과 함께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이명박근혜 노믹스'의 저주 기사 관련 사진 ▲ 2013년 2월 25일, 박근혜 신임 대통령과 이명박 전임 대통령이 제 18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뒤 연단을 내려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1980년대부터 미국의 소득불평등은 다시 심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자랑하던 두터운 중산층은 얇아지기 시작했고, 일은 더 많이 하면서도 실질임금은 줄어드는 기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집권 후 방임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가는 동시에,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어야 가난한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낙수(trickle-down)'론을 탄생시켰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외환위기 이래 심화되어 왔지만, 이를 가속화시킨 것은 탈규제와 부유층 세금감면으로 대표되는 'MB노믹스'였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이 '레이거노믹스'와 닮은 이름으로 불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명백한 실패로 드러난 20세기 정책을 21세기에 추진했다는 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거노믹스'를 탄생시켰던 미국은 2008년 세계금융 위기 이후 정 반대의 철학을 지닌 개혁주의자 오바마를 당선시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같은 해, 우리는 가장 극단적인 방임주의자를 지도자로 골랐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던 것일까. 한국사회는 'MB노믹스'를 이름만 바꿔 계승한 후보를 또 다시 대통령으로 맞이했다. 우리나라가 미국보다는 상황이 낫기 때문일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의 상위 10% 소득 집중도는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46%에, 하위 50%의 소득 점유율은 미국보다도 열악하기 때문이다. 비록 피케티는 한국 사례를 인용하지 않지만, 그의 경고는 한국에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에 소개된 <21세기 자본> 서평 대부분이 소득 불균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이 책은 교육과 지식인의 역할 등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예컨대 미국에서 교육이 더 이상 계층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비싼 등록금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정부는 부유층이 진학하는 사립대에 집중투자하면서 나머지 학교들은 소외시킴으로써 계급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한다. 결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아직 나오지도 않은 <21세기 자본> 한국어판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있다. 우리 사회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징표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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