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1.05 19:46l최종 업데이트 15.01.05 19:46l
이들은 누구인가
이곳은 어디인가
대체 언제인가
대관절 무엇 때문인가
사람에게 다가가고파 /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는 것
너무도 외로워 / 고립을 결단한다는 것
소곤소곤 말하고파 / 목이 터져라 외친다는 것
따뜻한 아랫목이 간절해 / 하늘에서 칼바람을 맞는다는 것
늘어지게 자고파 / 긴 밤을 새운다는 것
구수한 밥상이 그리워 / 식음을 전폐한다는 것
지상에 서고파 / 고공에 매달린다는 것
살고 싶어 / 죽는다는 것
이것은 가능한 언어인가.
불가능한 언어가 현실로 구현되는 이 세계에
우리가 있다.
우리가 눈 뜬 세상은 우리가 눈 감은 세상
목 메인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히는 활이 되기는커녕,
구경거리 헐~이 되는 세상
굶고, 오르고, 외친다.
굶고, 오르고, 외친다.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인이 무명천으로 엮은 줄을 타고 위태롭게 기와지붕 위를 기어올랐다. 5미터 높이라고는 하나, 11미터 축대 위에 지어진 누정이었기에 떨어지면 죽음이었다. 사실 죽기로 작심한 터였다. 목을 매려던 무명천이었다. 허나 마음을 달리 먹었다.
지붕 위에 쪼그려 앉아 아침을 맞은 그녀는 사람들이 몰려들자 비로소 외쳤다.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저임금을! 그마저 다시 깎고 해고를 남발하는 공장주의 횡포를! 규탄했던 그의 이름은 강주룡, 평원고무농장 노동자였다.
9시간 30분의 점거농성 끝에 그녀는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그로 인해 해고됐으나,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임금인하를 막아냈다. '체공녀' 강주룡, 이듬해 8월 빈민굴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그녀는 최초의 고공농성자였다.
2006년 9월 13일, 경기도 평택 대추리
진압경찰에 포위된 평화운동가들이 지붕 위에서 농성하고 있다. 대추리는 수난의 땅이었다. 1943년 일본군 해군시설대가 비행장을 짓겠다며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주민들은 땅을 잃은 설움을 토로하지도 못한 채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해방이 되어 이제 사는가 싶었는데, 전쟁이 터졌다. 1952년 갑자기 쳐들어온 미군은 비행장이 필요하다며 주민들을 밀어냈다.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한겨울에 쫓겨난 주민들은 산목숨을 끊을 수 없어 언덕 아래 움막을 지었다. 그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과 아기들이 죽어 나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갯벌을 다졌다. 고향 땅이 그리워 미군기지 캠프험프리 옆에 다닥다닥 집을 짓고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러길 반세기. 대추리와 도두리를 잇는 황새울 들녘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옥토가 되었고, 마을은 평화로웠다.
허나 2006년 가혹하게 집행된 미군기지 확장사업은 마을공동체와 들녘을 산산이 파괴했다. 진압복을 입은 경찰과 굴착기를 앞세운 용역이 구름처럼 밀려들 때, 마을을 지키고자 했던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붕 위에 올라 끝까지 저항하는 일뿐이었다. 정부가 "극렬좌파들의 투쟁"이라 불렀던 그것은 참으로 '가련하고 처연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 4철거구역 남일당 빌딩
망루가 불타고 있다. 철거민들이 망루를 세운 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경찰의 특공작전이 전격적으로 펼쳐졌다. 이들이 왜 망루를 세웠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는 자는 없었다. "도심 테러리스트"들은 그저 응징의 대상일 뿐이었다.
경찰청장에 내정됐던 김석기의 공명심은 아무런 대화도 타협도 없는 잔인한 진압작전을 감행케 했다. 철거민 다섯 명과 진압경찰 한 명이 화마에 쓰러졌다. 숯 덩어리가 된 철거민의 시신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다시 난도질당했고, 장례는 1년 동안 치러지지 못했다. 그날의 참사로 김석기는 경찰청장의 꿈을 접어야 했다. 허나 오사카 총영사관으로, 공항공사 사장으로, 아울러 차기 정치인으로 행복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2009년 5월 17일 한낮의 광주, 금남로 분수대 앞 교통감시탑 위
로케트전기 해고노동자 이주석과 유제휘가 68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직원을 새로 뽑을 때 정리해고자를 우선 채용하겠다"던 회사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일자리를 돌려 달라!" 그 한마디가 이들의 요구였다.
고용주가 귀를 막고, 지역사회도 힘이 되지 못하는 좌절의 시간 끝에 이들은 내려왔다. 70일 만이었다. 몸 하나 펼 수 없던 0.5평 좁은 철탑 위의 두 달 열흘은 육신을 갉아먹는 파괴의 시간이었다.
2009년 8월 20일, 석 달 뒤 다시 찾은 금남로 분수대 앞 교통감시탑 위
해고노동자 이주석과 유제휘가 떠난 그곳엔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쇠사슬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2008년 10월 15일, 한강 양화대교 북단 고압 송전탑
15만 볼트가 흐르는 송전탑 허리에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매달려 있다. 콜트악기는 세계 기타시장의 30%를 차지하며 매해 흑자를 기록해 왔는데도, 박영호 사장은 더 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을 찾아 위장폐업과 공장 해외이전을 단행했다.
123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창문마저 없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고분고분했던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섰다. 거리투쟁, 단식투쟁, 고공투쟁, 법정투쟁까지 안 해본 투쟁이 없었다. 법원도 이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박영호는 요지부동이다. 어느새 3천일이 흘렀다. 미칠 듯한 복직투쟁의 나날이 흐르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평택,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15만 볼트 고압 송전탑 위
어둠 속의 철탑 위로 함박눈이 쏟아진다. 3천 명의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회사가 어렵다고 했다. 2009년, 77일간의 목숨 건 옥쇄파업 끝에 64명이 구속됐다.
서맹섭 김봉민 김을래는 70미터 공장굴뚝에 올라가 86일 동안 "살인해고 철회!"를 외쳤다. 2013년 5월 10일, 저 건너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15만 볼트의 고압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던 한상균 복기성은 171일 만에 눈물을 쏟으며 땅으로 내려왔다. 함께 올랐던 문기주는 건강악화로 116일 만에 내려온 터였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도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해고 이후 6년, 26명이 삶을 등졌다. 살인해고란, 빈말이 아니었다.
2011년 6월 12일 아침,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35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158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는 크레인으로 올라가는 출입문을 걸어 잠근 채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지 않으면 결코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은 2003년 김주익 노조위원장이 129일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었다. 한국 시민운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발적 연대운동이었던 '희망버스'는 크레인 위에서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6월 1차에서부터 11월 6차 희망버스까지 수천 명의 시민들이 그녀의 고공농성에 연대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침내 11월 10일 노사합의가 이루어지면서 김진숙은 땅으로 내려왔다. 309일만이었다. 하지만 사측은 선별복직의 꼼수와 복직 후 바로 휴직을 시킴으로써 사실상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158억 원의 손해배상 가압류는 죽으란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같은 해 12월 21일 노조 조직차장 최강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0년 10월 20일,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 포클레인 위
시인 송경동과 해고노동자 김소연이 포클레인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6년 넘도록 피눈물 나는 복직투쟁을 벌여온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초라한 천막을 철거하려고 포클레인이 달려들 때 그들은 삽날을 타고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포클레인이 멈추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송경동이 매달린 건 전깃줄이었다. 그는 고함을 낭송했다.
"너희가 다가오면/ 나는 손을 놓는다/ 손을 놓는 건 나지만/ 나를 죽이는 건 너희들이다."
경찰은 물러갔다. 2010년 11월 1일, 기륭사태는 타결됐다. 1895일 만이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고도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급기야 2013년 12월 30일, 최동열 회장은 직원들 모르게 야반도주를 자행했다.
2013년 6월 21일,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 성당 옥상 위
해고노동자 여민희와 오수영이 "해고자 전원복직, 단체협약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136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202일 되던 8월 26일, 그늘은 '하늘집'에서 내려왔다. 그날 '협력와 상생을 위한 노사합의문'이 체결되었다.
이후 해를 넘기며 20여 차례의 노-사 단체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14년 8월 20일 서울고법은 학습지 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단체협약은 물론 노동조합도 의미 없다는 얘기였다.
2013년 1월 5일, 울산 현대차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고압송전탑 위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자 최병승·천의봉이 "불법파견, 하청제도 철회"를 외치며 15만 볼트 고압 송전탑에 올라 81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8월 8일, 296일에 걸친 '하늘집' 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을 기다린 이들은 경찰이었다. 대법원은 "최병승을 현대차 정규직원으로 인정한다"고 판결했지만 인사발령을 내고도 일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법을 앞세우던 이들이 법을 우습게 아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
2014년 3월 15일, 경부고속도로 충북옥천 지점 대형광고판 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해온 유성기업은 살인적인 야근으로 악명 높았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소박했다. "제발 잠 좀 자자"는 거였다. 회사는 컨택터스라는 용역구사대를 동원,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2013년 10월 13일, 노동자 이정훈이 고속도로의 굉음이 귀를 찌르는 대형광고판에 올라가 '하늘집'을 지은 건 그 때문이었다. 해를 넘기고, 전국에서 그를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몰려왔지만 회사는 요지부동이었다. 6월 28일, 극심한 디스크 통증과 탈수로 그는 내려왔다. 259일 만이었다.
2011년 9월 2일,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 길목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이름의 해군기지를 주민들은 반대했다. 구럼비 해안은 천혜의 자연유산이자 마을공동체의 숨통이었다. 정부는 주민들을 회유해 이간질했다. 오랜 세월 따습던 마을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말을 듣지 않자, 9월 2일 새벽을 기해 대규모 경찰병력을 동원해 구럼비를 장악했다. 고권일 주민대책위원장은 망루로 기어 올랐다. 이날 하루만 36명이 강제연행 되었고, 2명이 구속되었다. 용천수가 솟아오르는 용암습지 구럼비는 완전히 파괴되고, 그 자리에 지금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 '아름답게' 건설되고 있다.
2013년 10월 2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산꼭대기 움막
76만5천 볼트가 흐르는 초고압 송전탑이 산과 마을과 들녘을 가로지르며 들어선다는 말에 늙은 농부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한전은 막무가내였다. 2012년 1월 16일, 일흔네살 이치우 어르신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겨 목숨을 끊었다. 이듬해 12월 2일 일흔네살 유한숙 어르신이 음독을 하고 나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송전탑은 강행되었다. 높이 100미터가 넘는 초대형 송전탑을 저지하기 위해 노인들은 산 위에 움막을 지었다. 함정을 파고,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2014년 6월 11일, 대규모 경찰병력이 들이닥치자 '하늘집'은 순식간에 철거되었다. 지금 이 자리엔 127번 송전탑이 번뜩이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2014년 9월 1일, 종로구 청운동 세월호 유가족 천막
빨랫줄에 노란 수건이 걸려 있다. 영석이 엄마 권미화씨는 노란 수건에 얼굴을 묻고 이렇게 서럽게, 날마다 울게 될 줄은 몰랐다. 4월 16일 이후 그녀의 삶은, 삶이 아니었다. 왜 영석이가 구조되지 못하고 세월호에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려 달라 호소했을 뿐인데, 대통령은 외면했고 국회의원은 조롱했다. 자식 팔아 팔자 고치려 한다는 악마의 저주마저 들었다.
3백여 명이 수장된 이 참사 앞에 정치는 무능했고, 교활했다. 아이들 따라 엄마도 하늘로 올라가고만 싶지만,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그걸 알지 못하면 아들을 만날 면목이 없기에 엄마는 청와대가 보이는 아스팔트 위에 천막을 지었다. 그것이 엄마의 망루이자, 굴뚝이었다.
9시간, 70일, 77일, 116일, 129일, 171일, 309일, 1895일, 2013일, 2350일....
굶고 오르고 외쳤다,
굶고 오르고 외쳤다.
울었다,
때로는 죽었다.
이것이 인간의 굶음인가.
이것이 인간의 오름인가.
이것이 인간의 외침인가.
이것이 인간의 숫자인가.
이것을 '기록'이라 부른다면,
이곳은 잔인한 기록갱신의 나라.
말로 활을 쏘아도,
눈물로 활을 쏘아도,
죽음으로 활을 쏘아도,
하늘에서 활을 쏘아도,
아무도 맞지 않는 평화세계.
말로 쏜, 눈물로 쏜, 죽음으로 쏜 화살이 도처에서 날아와도 꿈쩍 않고 용맹정진하는 건강사회.
누구 말마따나 "100% 대한민국!"
폭력을 탓하는가.
세상 모든 폭력은 '공조'와 '방조'로 완성된다.
'자조'로 추앙된다.
'체공녀' 강주룡은,
여전히 / 우리들,
머리 위에 있다.
그리고 2014년 12월 27일, 평택 쌍용차 공장 안 70미터 굴뚝 위
조금 전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이 안간힘을 다해 굴뚝에 '사랑해'라고 썼다. 붉은 글씨가 보이는가. 그들은 12월 13일 새벽 4시 공장 안 70미터 굴뚝으로 기어 올라가 기약 없는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고등법원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진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꼭 저래야 하느냐고 묻는가. 꼭 올라야 하느냐고 묻는가. 그들에게 기댈 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굴뚝인' 김정욱과 이창근은 "우리가 기댈 곳은 법도 아니오, 권력도 아닌 바로 당신뿐"이라고 조용히 외치고 있다.
저 붉은 글씨, '사랑해'는 온 힘을 다한 구조요청이다. 굴뚝인은 저 멀리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에도 있다. 차광호가 200일 넘는 굴뚝투쟁을 견디고 있다. 우리는 왜 이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지 않는가.
그리고 2014년 12월 24일, 서울 마포대교 위
10년이라는 "미칠 것만 같은 세월"을 복직투쟁에 바친 기륭의 해고노동자들은 끝내 복직을 포기했다. 고공농성 3번, 국회 점거투쟁 2번, 집단단식 94일, 1080명의 동조단식 등 "죽는 것 빼놓고는 다해 본 세월 10년"이었다. 2010년 국회에서 조인한 사회적 합의에 따라 복직하였으나, 회사는 일도 급여도 주지 않았고 급기야 2013년 겨울 야반도주를 자행했다. 이것이 악덕자본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만의 만행인가.
10년 투쟁의 교훈은 이것이 기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노동'의 뜻이 '불안'과 '차별'이 되어버린 이 사회를 바꾸지 않고는 제2, 제3의 기륭을 막을 수 없다는 자각이었다. 복직을 포기한 해고노동자들은 구로동에서 광화문광장까지 한겨울 길바닥에 온몸을 던지며 호소했다.
"좋은 노예제도가 없듯이, 좋은 비정규직과 좋은 정리해고란 없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마포대교를 기어가던 노동자들이 잠시 쉬기 위해 벌러덩 누웠다. 누군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리 위에서 올려다 본 겨울 하늘에 기러기가 날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끙끙 기어가는데, 저 녀석들은 훨훨 날아갑니다."
비정규직 1천만 시대,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친구는 이 몹쓸 노예제도에서 자유로운가. 나만은 굴뚝인이 아닐 거라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구인가.
2015년 1월 7일, 다시 구로동에서
2차 오체투지가 시작된다. 이번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맨 앞에 선다. 아니 맨 앞에서 긴다. 우리사회의 지렁이들이 '꿈틀!'하기 위해 긴다. 청와대를 향해 긴다. 우리 사회 또 다른 지렁이들의 응원을 호소하고 있다. 또 다른 지렁이들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다. 그 긴 줄이 70미터와 0미터를 잇는 밧줄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 밧줄을 타고 모든 굴뚝인은 내려와야 한다.
이윤, 오로지 이윤을 앞세우다가 차가운 바다에서 304명을 잃었다. 모든 것이 '근혜' 탓이고, '아해' 탓인가. 구경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가해'가 아닌가.
이곳은 어디인가
대체 언제인가
대관절 무엇 때문인가
사람에게 다가가고파 /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는 것
너무도 외로워 / 고립을 결단한다는 것
소곤소곤 말하고파 / 목이 터져라 외친다는 것
따뜻한 아랫목이 간절해 / 하늘에서 칼바람을 맞는다는 것
늘어지게 자고파 / 긴 밤을 새운다는 것
구수한 밥상이 그리워 / 식음을 전폐한다는 것
지상에 서고파 / 고공에 매달린다는 것
살고 싶어 / 죽는다는 것
이것은 가능한 언어인가.
불가능한 언어가 현실로 구현되는 이 세계에
우리가 있다.
우리가 눈 뜬 세상은 우리가 눈 감은 세상
목 메인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히는 활이 되기는커녕,
구경거리 헐~이 되는 세상
굶고, 오르고, 외친다.
굶고, 오르고, 외친다.
▲ 1931년 5월 29일 평양 을밀대 |
1931년 5월 29일 새벽, 평양 을밀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작은 체구의 여인이 무명천으로 엮은 줄을 타고 위태롭게 기와지붕 위를 기어올랐다. 5미터 높이라고는 하나, 11미터 축대 위에 지어진 누정이었기에 떨어지면 죽음이었다. 사실 죽기로 작심한 터였다. 목을 매려던 무명천이었다. 허나 마음을 달리 먹었다.
지붕 위에 쪼그려 앉아 아침을 맞은 그녀는 사람들이 몰려들자 비로소 외쳤다.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저임금을! 그마저 다시 깎고 해고를 남발하는 공장주의 횡포를! 규탄했던 그의 이름은 강주룡, 평원고무농장 노동자였다.
9시간 30분의 점거농성 끝에 그녀는 일본경찰에 체포됐다. 그로 인해 해고됐으나,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임금인하를 막아냈다. '체공녀' 강주룡, 이듬해 8월 빈민굴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 그녀는 최초의 고공농성자였다.
▲ 2006년 9월 13일, 경기도 평택 대추리 | |
ⓒ 노순택 |
2006년 9월 13일, 경기도 평택 대추리
진압경찰에 포위된 평화운동가들이 지붕 위에서 농성하고 있다. 대추리는 수난의 땅이었다. 1943년 일본군 해군시설대가 비행장을 짓겠다며 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주민들은 땅을 잃은 설움을 토로하지도 못한 채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해방이 되어 이제 사는가 싶었는데, 전쟁이 터졌다. 1952년 갑자기 쳐들어온 미군은 비행장이 필요하다며 주민들을 밀어냈다.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한겨울에 쫓겨난 주민들은 산목숨을 끊을 수 없어 언덕 아래 움막을 지었다. 그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노인과 아기들이 죽어 나갔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갯벌을 다졌다. 고향 땅이 그리워 미군기지 캠프험프리 옆에 다닥다닥 집을 짓고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러길 반세기. 대추리와 도두리를 잇는 황새울 들녘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옥토가 되었고, 마을은 평화로웠다.
허나 2006년 가혹하게 집행된 미군기지 확장사업은 마을공동체와 들녘을 산산이 파괴했다. 진압복을 입은 경찰과 굴착기를 앞세운 용역이 구름처럼 밀려들 때, 마을을 지키고자 했던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지붕 위에 올라 끝까지 저항하는 일뿐이었다. 정부가 "극렬좌파들의 투쟁"이라 불렀던 그것은 참으로 '가련하고 처연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 4철거구역 남일당 빌딩 | |
ⓒ 노순택 |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 4철거구역 남일당 빌딩
망루가 불타고 있다. 철거민들이 망루를 세운 지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경찰의 특공작전이 전격적으로 펼쳐졌다. 이들이 왜 망루를 세웠는지, 무엇을 요구하는지 묻는 자는 없었다. "도심 테러리스트"들은 그저 응징의 대상일 뿐이었다.
경찰청장에 내정됐던 김석기의 공명심은 아무런 대화도 타협도 없는 잔인한 진압작전을 감행케 했다. 철거민 다섯 명과 진압경찰 한 명이 화마에 쓰러졌다. 숯 덩어리가 된 철거민의 시신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다시 난도질당했고, 장례는 1년 동안 치러지지 못했다. 그날의 참사로 김석기는 경찰청장의 꿈을 접어야 했다. 허나 오사카 총영사관으로, 공항공사 사장으로, 아울러 차기 정치인으로 행복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 2009년 5월 17일 한낮의 광주, 금남로 분수대 앞 교통감시탑 위 | |
ⓒ 노순택 |
2009년 5월 17일 한낮의 광주, 금남로 분수대 앞 교통감시탑 위
로케트전기 해고노동자 이주석과 유제휘가 68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직원을 새로 뽑을 때 정리해고자를 우선 채용하겠다"던 회사의 약속은 거짓이었다. "일자리를 돌려 달라!" 그 한마디가 이들의 요구였다.
고용주가 귀를 막고, 지역사회도 힘이 되지 못하는 좌절의 시간 끝에 이들은 내려왔다. 70일 만이었다. 몸 하나 펼 수 없던 0.5평 좁은 철탑 위의 두 달 열흘은 육신을 갉아먹는 파괴의 시간이었다.
▲ 2009년 8월 20일 한낮의 광주, 석 달 뒤 다시 찾은 금남로 분수대 앞 교통감시탑 위 | |
ⓒ 노순택 |
2009년 8월 20일, 석 달 뒤 다시 찾은 금남로 분수대 앞 교통감시탑 위
해고노동자 이주석과 유제휘가 떠난 그곳엔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쇠사슬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 2008년 10월 15일, 한강 양화대교 북단 고압 송전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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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5일, 한강 양화대교 북단 고압 송전탑
15만 볼트가 흐르는 송전탑 허리에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매달려 있다. 콜트악기는 세계 기타시장의 30%를 차지하며 매해 흑자를 기록해 왔는데도, 박영호 사장은 더 싸고, 말 잘 듣는 노동력을 찾아 위장폐업과 공장 해외이전을 단행했다.
123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다. 창문마저 없는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고분고분했던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섰다. 거리투쟁, 단식투쟁, 고공투쟁, 법정투쟁까지 안 해본 투쟁이 없었다. 법원도 이들의 손을 들어줬지만, 박영호는 요지부동이다. 어느새 3천일이 흘렀다. 미칠 듯한 복직투쟁의 나날이 흐르고 있다.
▲ 2012년 12월 19일 평택, 저 건너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15만 볼트의 고압 송전탑 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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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9일 평택,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15만 볼트 고압 송전탑 위
어둠 속의 철탑 위로 함박눈이 쏟아진다. 3천 명의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회사가 어렵다고 했다. 2009년, 77일간의 목숨 건 옥쇄파업 끝에 64명이 구속됐다.
서맹섭 김봉민 김을래는 70미터 공장굴뚝에 올라가 86일 동안 "살인해고 철회!"를 외쳤다. 2013년 5월 10일, 저 건너 쌍용차 공장이 보이는 15만 볼트의 고압 송전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던 한상균 복기성은 171일 만에 눈물을 쏟으며 땅으로 내려왔다. 함께 올랐던 문기주는 건강악화로 116일 만에 내려온 터였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도 오를 수밖에 없었다. 해고 이후 6년, 26명이 삶을 등졌다. 살인해고란, 빈말이 아니었다.
▲ 2011년 6월 12일 아침,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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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2일 아침,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타워크레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35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158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는 크레인으로 올라가는 출입문을 걸어 잠근 채 "해고노동자들이 복직되지 않으면 결코 내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진중공업은 2003년 김주익 노조위원장이 129일간 고공 크레인 농성을 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이었다. 한국 시민운동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자발적 연대운동이었던 '희망버스'는 크레인 위에서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되었다.
6월 1차에서부터 11월 6차 희망버스까지 수천 명의 시민들이 그녀의 고공농성에 연대하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침내 11월 10일 노사합의가 이루어지면서 김진숙은 땅으로 내려왔다. 309일만이었다. 하지만 사측은 선별복직의 꼼수와 복직 후 바로 휴직을 시킴으로써 사실상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158억 원의 손해배상 가압류는 죽으란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같은 해 12월 21일 노조 조직차장 최강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2010년 10월 20일,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 포클레인 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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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0일,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옛 사옥 앞 포클레인 위
시인 송경동과 해고노동자 김소연이 포클레인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럴 계획은 아니었다. 6년 넘도록 피눈물 나는 복직투쟁을 벌여온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초라한 천막을 철거하려고 포클레인이 달려들 때 그들은 삽날을 타고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포클레인이 멈추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송경동이 매달린 건 전깃줄이었다. 그는 고함을 낭송했다.
"너희가 다가오면/ 나는 손을 놓는다/ 손을 놓는 건 나지만/ 나를 죽이는 건 너희들이다."
경찰은 물러갔다. 2010년 11월 1일, 기륭사태는 타결됐다. 1895일 만이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복직시키고도 일거리를 주지 않았다. 급기야 2013년 12월 30일, 최동열 회장은 직원들 모르게 야반도주를 자행했다.
▲ 2013년 6월 21일,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 성당 옥상 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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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21일, 재능교육 본사 맞은편 혜화동 성당 옥상 위
해고노동자 여민희와 오수영이 "해고자 전원복직, 단체협약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136일째 고공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202일 되던 8월 26일, 그늘은 '하늘집'에서 내려왔다. 그날 '협력와 상생을 위한 노사합의문'이 체결되었다.
이후 해를 넘기며 20여 차례의 노-사 단체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2014년 8월 20일 서울고법은 학습지 교사를 노동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단체협약은 물론 노동조합도 의미 없다는 얘기였다.
▲ 2013년 1월 5일, 울산 현대차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고압송전탑 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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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5일, 울산 현대차 공장이 내려다보이는 고압송전탑 위
현대자동차 비정규노동자 최병승·천의봉이 "불법파견, 하청제도 철회"를 외치며 15만 볼트 고압 송전탑에 올라 81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다. 8월 8일, 296일에 걸친 '하늘집' 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을 기다린 이들은 경찰이었다. 대법원은 "최병승을 현대차 정규직원으로 인정한다"고 판결했지만 인사발령을 내고도 일을 주지 않았다. 언제나 법을 앞세우던 이들이 법을 우습게 아는 세상에 우리가 산다.
▲ 2014년 3월 15일, 경부고속도로 충북옥천 지점 대형광고판 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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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5일, 경부고속도로 충북옥천 지점 대형광고판 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해온 유성기업은 살인적인 야근으로 악명 높았다. 노동자들의 요구는 소박했다. "제발 잠 좀 자자"는 거였다. 회사는 컨택터스라는 용역구사대를 동원,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2013년 10월 13일, 노동자 이정훈이 고속도로의 굉음이 귀를 찌르는 대형광고판에 올라가 '하늘집'을 지은 건 그 때문이었다. 해를 넘기고, 전국에서 그를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몰려왔지만 회사는 요지부동이었다. 6월 28일, 극심한 디스크 통증과 탈수로 그는 내려왔다. 259일 만이었다.
▲ 2011년 9월 2일,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 길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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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일,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 길목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라는 이름의 해군기지를 주민들은 반대했다. 구럼비 해안은 천혜의 자연유산이자 마을공동체의 숨통이었다. 정부는 주민들을 회유해 이간질했다. 오랜 세월 따습던 마을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말을 듣지 않자, 9월 2일 새벽을 기해 대규모 경찰병력을 동원해 구럼비를 장악했다. 고권일 주민대책위원장은 망루로 기어 올랐다. 이날 하루만 36명이 강제연행 되었고, 2명이 구속되었다. 용천수가 솟아오르는 용암습지 구럼비는 완전히 파괴되고, 그 자리에 지금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 '아름답게' 건설되고 있다.
▲ 2013년 10월 2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산꼭대기 움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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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일,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산꼭대기 움막
76만5천 볼트가 흐르는 초고압 송전탑이 산과 마을과 들녘을 가로지르며 들어선다는 말에 늙은 농부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한전은 막무가내였다. 2012년 1월 16일, 일흔네살 이치우 어르신이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당겨 목숨을 끊었다. 이듬해 12월 2일 일흔네살 유한숙 어르신이 음독을 하고 나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송전탑은 강행되었다. 높이 100미터가 넘는 초대형 송전탑을 저지하기 위해 노인들은 산 위에 움막을 지었다. 함정을 파고,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묶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2014년 6월 11일, 대규모 경찰병력이 들이닥치자 '하늘집'은 순식간에 철거되었다. 지금 이 자리엔 127번 송전탑이 번뜩이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 2014년 9월 1일, 종로구 청운동 세월호 유가족 천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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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일, 종로구 청운동 세월호 유가족 천막
빨랫줄에 노란 수건이 걸려 있다. 영석이 엄마 권미화씨는 노란 수건에 얼굴을 묻고 이렇게 서럽게, 날마다 울게 될 줄은 몰랐다. 4월 16일 이후 그녀의 삶은, 삶이 아니었다. 왜 영석이가 구조되지 못하고 세월호에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려 달라 호소했을 뿐인데, 대통령은 외면했고 국회의원은 조롱했다. 자식 팔아 팔자 고치려 한다는 악마의 저주마저 들었다.
3백여 명이 수장된 이 참사 앞에 정치는 무능했고, 교활했다. 아이들 따라 엄마도 하늘로 올라가고만 싶지만,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그걸 알지 못하면 아들을 만날 면목이 없기에 엄마는 청와대가 보이는 아스팔트 위에 천막을 지었다. 그것이 엄마의 망루이자, 굴뚝이었다.
9시간, 70일, 77일, 116일, 129일, 171일, 309일, 1895일, 2013일, 2350일....
굶고 오르고 외쳤다,
굶고 오르고 외쳤다.
울었다,
때로는 죽었다.
이것이 인간의 굶음인가.
이것이 인간의 오름인가.
이것이 인간의 외침인가.
이것이 인간의 숫자인가.
이것을 '기록'이라 부른다면,
이곳은 잔인한 기록갱신의 나라.
말로 활을 쏘아도,
눈물로 활을 쏘아도,
죽음으로 활을 쏘아도,
하늘에서 활을 쏘아도,
아무도 맞지 않는 평화세계.
말로 쏜, 눈물로 쏜, 죽음으로 쏜 화살이 도처에서 날아와도 꿈쩍 않고 용맹정진하는 건강사회.
누구 말마따나 "100% 대한민국!"
폭력을 탓하는가.
세상 모든 폭력은 '공조'와 '방조'로 완성된다.
'자조'로 추앙된다.
'체공녀' 강주룡은,
여전히 / 우리들,
머리 위에 있다.
▲ 2014년 12월 27일, 평택 쌍용차 공장 안 70미터 굴뚝 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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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12월 27일, 평택 쌍용차 공장 안 70미터 굴뚝 위
조금 전 해고노동자 김정욱과 이창근이 안간힘을 다해 굴뚝에 '사랑해'라고 썼다. 붉은 글씨가 보이는가. 그들은 12월 13일 새벽 4시 공장 안 70미터 굴뚝으로 기어 올라가 기약 없는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고등법원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진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꼭 저래야 하느냐고 묻는가. 꼭 올라야 하느냐고 묻는가. 그들에게 기댈 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굴뚝인' 김정욱과 이창근은 "우리가 기댈 곳은 법도 아니오, 권력도 아닌 바로 당신뿐"이라고 조용히 외치고 있다.
저 붉은 글씨, '사랑해'는 온 힘을 다한 구조요청이다. 굴뚝인은 저 멀리 구미 스타케미칼 공장에도 있다. 차광호가 200일 넘는 굴뚝투쟁을 견디고 있다. 우리는 왜 이들에게 마이크를 건네지 않는가.
▲ 2014년 12월 24일, 서울 마포대교 위 | |
ⓒ 노순택 |
그리고 2014년 12월 24일, 서울 마포대교 위
10년이라는 "미칠 것만 같은 세월"을 복직투쟁에 바친 기륭의 해고노동자들은 끝내 복직을 포기했다. 고공농성 3번, 국회 점거투쟁 2번, 집단단식 94일, 1080명의 동조단식 등 "죽는 것 빼놓고는 다해 본 세월 10년"이었다. 2010년 국회에서 조인한 사회적 합의에 따라 복직하였으나, 회사는 일도 급여도 주지 않았고 급기야 2013년 겨울 야반도주를 자행했다. 이것이 악덕자본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만의 만행인가.
10년 투쟁의 교훈은 이것이 기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노동'의 뜻이 '불안'과 '차별'이 되어버린 이 사회를 바꾸지 않고는 제2, 제3의 기륭을 막을 수 없다는 자각이었다. 복직을 포기한 해고노동자들은 구로동에서 광화문광장까지 한겨울 길바닥에 온몸을 던지며 호소했다.
"좋은 노예제도가 없듯이, 좋은 비정규직과 좋은 정리해고란 없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마포대교를 기어가던 노동자들이 잠시 쉬기 위해 벌러덩 누웠다. 누군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리 위에서 올려다 본 겨울 하늘에 기러기가 날아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끙끙 기어가는데, 저 녀석들은 훨훨 날아갑니다."
비정규직 1천만 시대,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친구는 이 몹쓸 노예제도에서 자유로운가. 나만은 굴뚝인이 아닐 거라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구인가.
▲ 2015년 1월 7일~11일, 2차 오체투지가 시작된다. | |
ⓒ 비정규직 정리해고 없는 세상위한 오체투지행진단 |
2015년 1월 7일, 다시 구로동에서
2차 오체투지가 시작된다. 이번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맨 앞에 선다. 아니 맨 앞에서 긴다. 우리사회의 지렁이들이 '꿈틀!'하기 위해 긴다. 청와대를 향해 긴다. 우리 사회 또 다른 지렁이들의 응원을 호소하고 있다. 또 다른 지렁이들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다. 그 긴 줄이 70미터와 0미터를 잇는 밧줄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 밧줄을 타고 모든 굴뚝인은 내려와야 한다.
이윤, 오로지 이윤을 앞세우다가 차가운 바다에서 304명을 잃었다. 모든 것이 '근혜' 탓이고, '아해' 탓인가. 구경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가해'가 아닌가.
덧붙이는 글 | 격월간 <말과 활> 창간호(2013)에 실었던 글과 사진을 수정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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