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교과서 대전현충원 20] 일제강점기 우리 말과 글을 지킨 최현배와 신석우
▲ 1935년 1월 충청남도 온양(현재의 아산시)에 있는 세조대왕 비각 앞에서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최현배 선생이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
ⓒ 조선어학회 |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최현배 작사, 박태현 작곡의 한글날 노래다. 일정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한글이 목숨"이라고 외치며 평생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던 위대한 스승 외솔 최현배 선생.
선생은 1894년 울산에서 태어나 1910년 상경,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에 입학해 주시경 선생을 처음 만나 한글을 배웠다. 그 이래로 60여 년을 오로지 한글을 위해 살았다. 일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유학하고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1938년 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교육학 관련 대학 졸업논문 '조선민족 갱생의 도'(1930)를 통해 민족주의적 국민 계몽사상을 고취하기도 했다."말씨는 겨레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생명이요 힘이다. 말씨가 움직이는 곳에 겨레가 움직이고, 말씨가 흥하는 곳에 겨레가 흥한다"며 목숨처럼 한글을 지키고자 노력하다 1941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1945년 광복까지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글에 민족의 정체성이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 마련, 표준말 정립, 우리말 사전 편찬 등에 힘썼다.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어 어법 바로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법연구를 집대성한 <우리말본>(1937)과 한글 연구를 체계화시킨 <한글갈>(1941) 등을 저술했다. 이 책은 주시경 이래의 문법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 연구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광복 후 문교부(현 교육부) 편수국장으로 재직했고, 1954년부터 1961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이밖에 학술원 부회장,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특히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국어운동의 대표 인물로 활동했다.
최현배는 국어학의 연구, 국어정책의 수립, 그리고 교육학의 연구와 국어운동의 추진에 전념하여 그와 관련한 20책에 이르는 저서와 100편에 이르는 논문을 발표했다. <글자의 혁명>(1947), <한글의 투쟁>(1958), <한글 가로글씨 독본>(1968), <한글만 쓰기의 주장>(1970) 등 단행본으로 한글전용과 풀어쓰기의 이론을 발표하여, 이 운동의 이론적인 지침서가 되었다. 현행 각종 교과서에서 한글만으로 가로쓰는 체재를 확립한 일은 그의 업적이다.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로서, 국어와 한글운동의 이론가이며 실천가로서, 민족의 중흥과 민주국가 건설을 외친 교육자로서 남긴 업적과 공로는 크다.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 그 의지는 민족사의 한 귀감이 된다.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회는 해마다 국학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70년 3월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2009년 9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있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묘소 | |
ⓒ 국립대전현충원 |
외솔 최현배가 목숨으로 한글을 지켰다면 한글로 글을 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이가 언론인 신석우다. 189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 조선산직장려계에 계원으로 참여해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주식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돼 1917년 보안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되었다.
일본으로 유학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고 신문 <아등(我等)의 소식>을 발간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서 개최된 임시정부의 첫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초대 교통총장으로 선임됐다. 그는 이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발안하였다.
▲ 상하이 망명시절 신석우의 모습(가운데), 오른쪽은 신채호, 왼쪽은 신규식이다.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
ⓒ 독립기념관 |
1924년 귀국해 9월에 부친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팔아서 마련한 자금 8만 5000원으로 송병준으로부터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가 1927년 이상재가 별세하자 제5대 사장에 취임했다.
이상협을 고문으로, 민태원을 편집국장으로 선임한 후 르포르타주식 고발 기사를 연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대표적인 것이 7월부터 연재한 '창작(創作)'이다. '국경 순사의 독백'이란 제목으로 시리즈를 게재했는데, 국경지역에서 벌어진 일본 경찰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그 포악에 신음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묘사했다.
1928년에는 문자보급운동을 개시했다. 1929년 제1회 남녀 학생문자보급반 요원을 공모해 고향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게 했으며, '한글 철자법 강좌'를 연재하고, 한글 원본을 4만 부 발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에는 한글원본 9만부, 1931년에는 30만부를 배포했고, '한글기념가'와 '문자보급가' 현상공모, '춘계 문자 보급반' 강좌 개설 등을 연이어 펼쳤다.
1927년 2월 안재홍·김준연 등 30여 명의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신간회'에 참여하여 총무간사, 신간회 경성지회 대표로 선임됐다. 하지만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된 뒤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그해 7월 상하이로 탈출했다.
8.15 광복 후 귀국했고, 1949년 8월부터 1년 4개월간 주중화민국 대사를 지냈다. 1953년 부산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부는 1995년 신석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국립대전현충원은 신석우를 2021년 4월의 현충인물로 선정해 나라사랑정신을 고취했다.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있는 신석우 선생의 묘소. | |
ⓒ 우희철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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