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북침 교육' 재심 무죄 선고받은 강성호 교사의 일갈
[기사 수정 : 7일 오전 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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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8월 10일 자 <제천신문>. 법정에 들어서는 강성호 교사가 손바닥에 쓴 "진실·승리"라는 글씨를 펴보이고 있다. | |
ⓒ 제천신문 |
1989년 7월 25일 두 번째 재판에 출두해야 하는 날 새벽, '빨갱이 교사'로 몰려 감옥에 갇힌 강성호 교사는 독방에서 볼펜을 들었다. 당시 한 젊은 교도관이 규정을 어기는 위험을 감수하며 슬쩍 넣어준 것이었다. 강 교사는 자신의 두 손바닥 위에 수백 번에 걸쳐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어떤 글자를 남몰래 덧칠했다.
그리고 교도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쥔 채로 수갑을 차고 법정에 들어섰다. 그 순간, 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때 강 교사는 손바닥을 쫙 펼쳤다. 땀이 흥건한 손바닥 위엔 다음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진실·승리" 1989년 당시 강 교사는 충북 제천시 제원고등학교에 온 27살 새내기 교사였다. 석 달이 흘러 아이들과 정이 들어가기 시작할 무렵인 5월 24일, 강 교사는 수업 도중 호출을 받고 교장실에 갔다가 경찰에 강제 연행됐다.
"6.25 전쟁은 미군에 의한 북침"이라고 가르쳤고, '수업시간에 북한을 고무·찬양'한 혐의였다. 강 교사를 옭아맨 건 국가보안법 제7조(반국가단체 찬양·고무 등) 1항 위반죄. 당시 경찰은 그 증거로 학생 6명의 증언을 내세웠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강 교사가 문제의 발언을 했다는 그날 이들 가운데 2명은 결석생이었다.
같은 학교 300명의 제자들이 "우리 선생님은 친북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집회도 하고 탄원서도 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1990년 6월 22일 대법원은 강 교사에 대해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형을 확정했다. 이후 '빨갱이 교사', '북침교육 교사', '간첩 교사'란 꼬리표가 그를 계속 따라다녔다.
31년 만에 대법 판결이 뒤집어진 순간
▲ 노태우 정권 당시 수업시간에 6.25 북침설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교직을 잃고 수감생활까지 했던 강성호(가운데) 교사가 2일 오후 청주지방법원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청주지법 형사항소2부(오창섭 부장판사)는 과거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던 강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 |
ⓒ 연합뉴스 |
대법원 판결 이후 31년이 흐른 지난 2일 오후 2시 청주지법 621호 재심 법정. 오창섭 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의 진술을 종합해 볼 때 '6·25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 아니고, 미군이 먼저 북한을 침범해 일어난 것'이라는 피고인의 발언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그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 선고로 위안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31년만에 대법 판결이 뒤집어진 순간이었다. 강 교사를 옭아맸던 국가보안법 오랏줄이 뒤늦게나마 풀린 것이다. 2020년 1월 재심 개시 뒤 1년 8개월 만이다.
강성호 교사(59, 현 청주 상당고)는 6일 <오마이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원심 파기' 재심 선고가 났을 때 오히려 마음이 착잡했고 담담했다"고 말했다. 이어 강 교사는 "그 당시 나의 무죄를 밝혀주기 위해 시위에 나섰던 300여 명의 제자들은 물론 나를 고발했던 6명의 제자들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강 교사는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6명의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89년 5월 25일 새벽에 제천경찰서 조사실에서 그 학생들과 대질신문을 했어요. 그 학생들이 나에게 '북침설을 가르쳤다. 간첩이다'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당시엔 정말 억울해서 그 학생들을 원망하며 가슴을 쳤습니다. 하지만 이날 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던 그 학생들의 눈빛을 봤어요."
결국 강 교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학생들이 진심이 아니라 겁에 질려서 나에게 이런 누명을 씌우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 이상 이 학생들을 원망할 수 없었어요."
재심 기간 동안 강 교사에게 누명을 씌웠던 6명의 제자들 가운데 4명이 법정에 나왔다. 이들은 대부분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심 기간 중에 증인 출석을 거부한 한 학생은 2019년 12월 동창회 총무에게 보낸 문자에서 "(강성호 선생님께는) 죄송하다는 말조차도 꺼내기 (어려울 정도로) 죄스럽다. 살아가면서 더 벌 받고 살라고 하면 그리할게"라는 내용의 '거짓 증언' 시인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관련기사 '친북교사' 증언 제자, 30년만에 "선생님께 죄스럽다" http://omn.kr/1rwap)
강 교사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30년이 지난 뒤에도 이런 문자를 보낸 채 재심법정에 나오지 못했겠느냐"면서 "이제는 장년이 되었지만 그 6명의 제자들이 너무 안타깝고,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수렁 빠뜨리고 편하게 연금 생활... 사과하라"
는 "전교조 결성 여론 나쁘게 몰아가려 '북침설 발언' 교사 구속시기 조정 경찰 수사기록서 드러나"라고 보도했다. " class="photo_boder" style="border: 1px solid rgb(153, 153, 153); display: block; text-align: center; max-width: 600px; width: 600px;"> | |
▲ 1989년 10월 17일 <한겨레>는 "전교조 결성 여론 나쁘게 몰아가려 "북침설 발언" 교사 구속시기 조정 경찰 수사기록서 드러나"라고 보도했다. | |
ⓒ 한겨레 |
하지만 강 교사는 이 제자들을 앞장세운 당시 제원고 2학년 7반 담임교사, 강 교사를 감시하고 탄압했던 교감, 강 교사에 대한 고발장을 냈던 교장에 대해서는 "재심 결과가 나왔으니 6명의 제자들에게 사과하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재심 기간 중 당시 담임교사는 법원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증인 출석을 요구받고도 출석하지 않았다.
"6명의 제자들은 아직도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여전히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대들이 제자들과 나를 수렁에 빠뜨리고 퇴임해서 편하게 연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그냥 지켜볼 수 없습니다."
특히 강 교사는 "당시 6명의 아이들을 앞장 세워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담임교사는 퇴임 뒤 지금도 충북 제천에서 유능한 원로 교육자 대우를 받고 있다"면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 분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응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 교사를 빨갱이 북침교육교사로 옭아맸던 법은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강 교사는 이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제 무죄 판결에 대해 축하해주신 분들이 많았지만, 정말 축하받아야 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는 현실 때문입니다. 평화통일교육을 좌경용공교육으로 몰아 초임교사를 빨갱이 교사로 짓밟은 반인권적 국가보안법, 스승과 제자를 갈라놓은 국가보안법, 이것이 그대로 살아있는 한 저와 저의 제자들 같은 비극의 피해자는 또다시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1989년 9월 이철 의원(무소속)이 대정부질문에서 공개한 청와대 비공개 문서인 '교원노조분쇄대책'을 보면 당시 노태우 정권은 전교조 결성을 저지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였다. 안기부(현 국정원), 문교부, 총무처, 감사원, 문공부 등의 국가기관이 '교원노조분쇄를 위한 대책기구'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들이 사용한 무기는 좌경용공 의식화교육론이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은 국가보안법이었다.
현재 강 교사는 정년을 3년 앞두고 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일까?
"저는 빨갱이 교사로 몰려 학교에서 내몰린 뒤 10년 만인 99년 9월 1일자로 학교로 복직할 때 다시 초임교사로서 복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도 빨갱이 교사라는 누명을 벗지는 못했죠. 그런데 이제 누명까지 벗었으니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입니다. 이제 더 가벼운 마음으로 32년 전 초임교사 때 가졌던 그 마음처럼 아이들을 만날 겁니다. 정년까지 교단을 지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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