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도 훈민정음 100주년 기념했을까
서양과 다른 시간 구분
올해는 광복절을 맞아 귀한 일이 있었다. 봉오동 전투의 지휘자 홍범도(1868~1943)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왔다. 순국한 지 78년 만이고, 연해주로 간 지 꼭 100년 만이다.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까지의 길은 강제이주라는 고려인의 아픈 역사가 있었다. 봉오동 전투 100주년인 지난해 귀환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돌발로 연기됐다고 한다. 100주년에 맞췄으면 더 나았으려나? 부질없는 생각이다. 홍범도 장군에게 무슨 영예가 더하겠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고 구획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1546년, 명종 1년이다. 한 해 전 인종이 세상을 뜨자 곧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이 격돌했고, 새로운 왕 명종을 등에 업은 소윤은 윤임 등 정적뿐 아니라 송인수·이언적·권벌·노수신·유희춘·백인걸 등 비판 세력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다. 사화는 권세가가 왕이나 왕실을 끼고, 공식 조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제도나 절차 외의 사적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데서 발생했다.
1546년을 챙긴 이유가 있다. 1546년에서 딱 100년 전인 1446년(세종28), 한글이 완성돼 반포된 해다. 요즘으로 치면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하고, 각종 이벤트가 한 해 내내 지속했을 것이다. 명종의 조선 정부에서는 아무런 행사도 하지 않았다.
한글, 즉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보편 언어로 사용되지 않아서였을까.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명종 다음 임금인 선조 때 정철은 이미 입에 착착 붙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한글로 ‘관동별곡’ ‘사미인곡’ 같은 명문장을 남겼다. 가끔 시험에 나와 우리를 애먹이지 않았던가. 사화에 몰두하느라 관심이 멀어졌을 수도 있다. 100주년 기념식을 하지 않았던 아마 가장 큰 이유는 ‘100주년’이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서양 역법은 갑오년(1894년)에 도입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그레고리력이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부활절을 조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법이다. 조선 사람들은 갑오년(1894)부터 이 역법을 사용했다. 당연히 세종 때 사람들은 한글이 반포된 해를 ‘1448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세계 표준이었던 명나라 연호인 ‘정통(正統) 11년’이라고 부르거나, ‘금상(今上·지금 임금) 28년’이라고 하거나, 갑자로 ‘병인년’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니 연도의 호칭은 지금 더 획일적이다.
아무튼 ‘1894년’이라는 그레고리우스 역법의 채택은 자본주의의 세계화, 더 정확히 말하면 제국주의-식민지에 의한 ‘세계사’의 탄생과 관련된다. 이 무렵 우리 몸에 장착된 태양 시계는 전기에너지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밤낮의 교차에 길들여진 인간의 생물학적 리듬은 체온·혈압·소변·배설 등 적어도 150개 이상이라고 한다. 생활 환경의 변화와 생물학적 진화 사이의 괴리는 아주 오래 계속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간은 ‘시(時)’ 또는 ‘시각(時刻)’이라고 했다. ‘시간(時間)’은 ‘타임(time)’의 번역어다. 자시(子時)라고 하면 밤 11시~새벽 1시를 말하며 자시라는 말 자체가 ‘간(間)’을 의미했다. 하루는 12시가 되고, 각각의 시는 8각(刻)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니까 하루는 12×8=96각이었고, 1각은 15분이니까, 15분 단위로 구성됐다.
출퇴근과 같이 행정의 효율성이 필요했던 관청에서는 시각이 쓸모 있었다. 하지만 하루 12시 96각이라는 구분은 대다수 농민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농업사회에서는 하루의 절차가 사회적 규약보다 농업의 리듬, 계절 주기, 일출과 일몰에 의해 규정됐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간 감각은 주기적이었다. 시간은 반복되는 단위(날짜, 계절, 출생과 사망의 순환, 규칙적인 신체적 욕구 등)로 구분됐다. 우리가 알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정밀한 시계는 ‘위장(배꼽시계)’ 아니던가? ‘밥 먹기 전(食前)’ ‘밥 먹은 뒤(食後)’라는 시간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상상보다 강고하고 정확한 것이었다.
자연적 주기에 따라 규정되는 시간관이 선명하게 의식되는 경험은 역시 죽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 태어나서 죽는다는 사실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상반된 성격의 시간관을 제시해준다. 이는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적·일회적인 성격의 시간이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나’라는 개체가 태어났고, 언젠가 죽는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그리고 이런 시간관은 종말론과 목적론의 기저를 이룬다. 시간이 한 줄로 늘어섰다 해서 선형적이라고 한다. 2021년, 2022년 식으로….
이 탄생과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두고 조선 사람들은 전혀 다른 순환의 관념, 60갑자(甲子)를 썼다. 10간, 12지의 최소공배수로 탄생한 60간지(干支)는 늘 60을 넘지 않는다. 다시 말해 60을 주기로 순환한다. 셈을 하다가 10이 넘으면 다시 엄지부터 접으며 수를 세는 어린이들처럼 조선인들은 연도를 순환하는 시간으로 파악했다. 이 60간지는 연도의 셈법이기도 했고, 인생의 단위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노동과 놀이의 순환
이 60간지에도 묘한 이중성이 있다. 먼저, 말이 60간지일 뿐 각각의 간지는 ‘1 다음에 2, 2 다음에 3’ 하는 식의 서수 관념보다 독립된 연도의 의미를 띤다. 이는 60간지의 순환을 한 번 끝내 놓고 보면 훨씬 분명해진다. ‘병자년’ ‘임진년’이 또 나온다. 이를 두고 각 연도 사이의 인과성이 약하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음으로, 인생의 60간지는 다르다. 탈 없이 지내온 인생을 축하하는 회갑(回甲)은 분명 60간지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이벤트다. 하지만 이때의 60간지는 무한한 순환으로 열려 있었다기보다도 무덤을 향해 닫혀 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농업사회의 주기적 시간, 절기가 포개진다. 입추와 처서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농사를 결정하는 계절의 순환은 결국 태양을 도는 지구의 공전에 따라 좌우되는 만큼 어떤 방식으로든 그 순환을 포착하는 타이밍이 필요했으므로 그에 부응하여 절기를 배치했다.
그곳엔 숨쉬기의 리듬감과 같은 휴식이 있다. 농번기를 마감하고 몸을 추스를 농한기가 기다리고 있다. 추수를 마치고 가을떡을 돌린다. 이듬해 씨나락 담그고 모내기를 할 때까지 서너 달은 놀아도 됐다. 묵 쒀서 먹고, 돗자리도 짜고 새끼도 꼬고, 사랑방에 모여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노동도 놀이도 자연의 역학과 리듬에서 떨어져 나와 산업·기술적으로 재배치됐다. 쉬는 날은 겨울이 아니라 토·일요일이다. 이렇게 신축년과 2021년은 표기만 다른 게 아니다.
마르크 블로흐는 “우리는 더는 영웅의 이름을 따서 시대를 명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척 사려 깊게 100년 단위로 각각의 시대를 셈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점으로 1년에서 시작하여 모든 역사를 그렇게 센다. 13세기의 예술, 18세기의 철학, ‘볼품없는 19세기’ 등등. 산수의 마스크를 쓴 얼굴들이 우리들 저서의 페이지 곳곳을 배회한다. 우리들 중 누가 감히 이 명백히 편리한 유혹의 제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비판은 지금도 논문발표회 때 곧잘 등장한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매우 근대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전형적인 현재주의이며, 시대착오의 오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세종대 운운’ ‘중세 운운’은 정확한가? 누가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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