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장호 편집국장
- 승인 2021.08.0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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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대안 모색(1)
한국경제에 대한 새연재를 시작합니다.
이 연재는 상반기 민주노총 민주노동연구원과 서비스연맹 정책연구원 공동으로 진행된 <한국경제 구조진단>(예속과 불평등을 중심으로)보고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독자들에게 보다 알기 쉽게 재구성하여 전달하고자 합니다.
연재방식은 <전환기 한국경제, 무엇이 문제인가 : 예속의 덫 불평등의 함정>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주요 주제별로 동시병행하여 연재합니다.
● 달러패권에 의한 금융팽창과 금융종속
● 금융팽창과 금융종속
● 외국계 기업의 국부유출
● 재벌 경제의 대외의존성
● 한국경제의 대안 모색
한국경제의 대안 모색
1. 한국경제 잔혹사
지금까지 해방 후 한국경제사를 ‘미군정기-원조경제-차관경제-개방경제’라는 경로를 거쳤다고 개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구분만으로는 부족하다. 첫째로 개방경제라는 표현이 마치 한국의 주동적 조치인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고,1) 둘째로 IMF외환위기 이후의 경제적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주1) 구한말에도 함포외교로 ‘개방’을 강요당했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에도 우루구아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개방’을 강요당했다. 구한말은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1차 세계화 시기이고, 1980년대 이후는 미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2차 세계화의 시기였다. 역사적으로 제국주의가 주도하는 개방담론은 언제나 식민지 경제침략을 은폐하는 기능을 하였다. 때문에 그 용어를 그대로 받아쓰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한국경제의 역사를 크게 3시기로 나누어 재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첫 번째 시기는 ‘신식민지 경제로의 재편기’로 ‘미군정~원조경제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종속적 산업화 시기’로서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종속적 세계화 시기’로서 ‘경제개방이 시작되고, IMF외환위기를 거쳐 최근까지 이르는 시기’이다.
1. 제1기 : 신식민지 경제예속화
이 시기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시기라는 두 개의 소시기로 나눌 수 있다. 미군정기는 신식민적 경제예속화가 진행된 시기이고, 이승만정권 시기는 식민지 원조경제로 한국경제의 명맥을 이어가던 시기이다.
미군정 3년은 일제식민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남측 점령지를 미국의 신식민지로 재편되는 과정에 불과했다. 당시 남한 총자본의 80~90%에 해당하는 적산 대부분은 해방직후 노동계급이 자주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탈취하여 친일친미세력에게 불하 하였고, 적산은 민족자산이 되지 못하고 오늘날 친미친일재벌의 뿌리가 되었다. 적산불하가격은 30~90%까지 할인한 헐값이었고, 10~15년 분할납부방법이었으며, 물가가 64배 폭등하며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었다.
해방직후 남측에서 산출된 쌀은 미군정의 묵인 하에 일본으로 대대적으로 밀반출됨으로써 민중들은 기아선상에 헤매게 되었는데, 강제식량공출로 인해 더욱 심각한 착취속에 고통받았다. 재정금융을 틀어쥔 미군정은 통화를 증발하여 물가를 폭등시켰다. 이같은 상황은 조선인민들의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농지개혁으로 민중을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지개혁에 대해 오늘날 학계에서 경제성장이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결과론적 평가가 나오고 있으나, 사실상 북의 토지개혁에 대한 예방혁명적 궁여지책이었고, 유상매입, 유상불하로 진행된 불철저한 농지개혁이었다. 농지개혁은 농민이 아니라 미군정, 이승만 정권이 주도하여 두 차례 진행되었다. 대상 토지 역시 각각 귀속농지 29만여㏊, 한국인 소유농지 3만여㏊, 총 61만여㏊로, 해방직후 소작지 140만여㏊의 42.4%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도 가난한 농민들은 분배농지를 되팔 수 밖에 없게되고, 다시 신흥지주계급이 등장하고 소작제 부활로 이어졌다.
지속된 경제적 위기를 미국은 전후 과잉생산된 원조물자로 메꾸었다. 미국은 유럽에는 마샬플랜을 통해 자본을 투하하고, 식민지에는 원조물자를 투하함으로써 전후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세워나갔다. 1960년까지 미국이 한국에 투하한 원조총액은 109억 6700만 달러로 당시 GDP의 31%를 차지했다.
원조물자는 일차적으로 식민지군사경제를 구축하는데 대부분 사용되었는데 원조총액의 70%가 군사원조였다. 또한 한국 곡물생산의 40%에 이르는 미국산 잉여농산물 원조는 오히려 식량농업, 원료농업 양 측면에서 한국 농업기반을 와해시켰다. 농산물 원조의 70%는 밀가루였다. 원조물자는 친미매판재벌에게 독점불하되어 국내농산물과 유리된 삼백산업의 성장을 가져왔고, 이승만 정권은 원조대충자금으로 예산의 절반가량을 메꾸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 양자는 미국원조물자에 기생하고, 정경유착으로 연결되며 친미매판정치, 우익파쇼통치로 민중들을 억압, 착취하였다.
이러한 원조경제도 50년대 말 미국이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정책을 전환하자 한국경제는 급격히 무너지고 4.19혁명의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2. 제2기 : 종속적 산업화
이 시기는 한국경제가 미제국주의 국제분업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는 과정으로서 경공업 중심의 종속적 산업화 시기와 중화학공업 중심의 종속적 산업화라는 두 개의 소시기로 나눌 수 있다.
60년대 시작하여 70년대 본격화한 초국적 자본의 성장을 통해 미국은 세계경제질서를 제국주의 국제분업체계로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미국은 60년대 남북체제경쟁전략을 본격화하면서, 남측에 외채에 의한 수출산업화 전략을 추진하였다. 이른 바 박정희 개발독재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박정희 정부가 아니라 미 국방부 ‘랜드 연구소’의 찰스 울푸 박사와 미 오리건대 경제자문단의 의견을 반영하여 작성된 것으로써, 미일한 수직분업구조에서 한국을 하청경제화하는 전략이었다.
수출산업개발 종자돈은 일제식민지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대가로 마련했고, 한미일 삼각무역편대에 편입되어 경공업 중심의 덤핑수출전략으로 본격화하였다. 여기로부터 한국경제는 수출을 하면 할수록 대일적자가 누적되고,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외채경제의 취약성을 확대해 갔다. 수출산업화는 국내 내수기반 중소기업이나 농업 등과는 괴리된 채 불균형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한국 수출산업화전략은 저임금, 저곡가에 기반하여 수출기업의 자본축적을 위한 가혹한 착취체제가 구조화하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바로 이런 조건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1970년 무렵 외채의 원금과 이자가 늘어나고 경공업 제품수출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박정희정부는 그 출로를 유신체제의 구축과 외국인 직접투자확대, 중화학공업 추진에서 찾았다. 마산, 이리(익산)에 수출 자유 지역이 만들어지고, 울산, 포항, 창원, 여천(여수), 구미 등에 대규모 공업 단지가 들어섰으며, 철강, 조선, 기계, 전자, 비철금속, 석유 화학 등 중화학 공업 등에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었다.
1974~1979년간 총 1조 4,385억원의 대출 중 61%에 해당하는 9,782억 원이 중화학공업부문에 투자되었고, 1978년의 경우 국민투자기금, 산업은행자금, 산업합리화 자금 등 정책자금 중 92.8%가 중화학부문에 집중되었다.
수요없는 중화학공업부문의 과잉중복투자는 70년대 말 오일쇼크와 스테그플레이션에 따른 세계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외채위기, 경제위기로 쓰러졌다. 1980년 외채는 271억 달러(GNP의 48.2%)에 이르렀으며, 빈부격차는 1978년 상위 20%가 전체 국부의 46.7%를 차지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YH무역노동자 투쟁, 부마항쟁 등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산업화 또는 공업화의 유형에는 자본주의적 공업화와 사회주의적 공업화, 자립적 공업화와 종속적 공업화의 길이 있다. 이 시기 남과 북은 모두 산업화, 공업화를 달성했다. 북은 사회주의 국제분업조차도 거부하고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 발전시키는 자기완결구조를 갖는 자립적,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길을 걸었다. 반면 남쪽은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국제분업체계 속에 깊숙이 편입되어 외자에 기반한 종속적, 자본주의적 공업화의 길을 걸었다.
3. 제3기 : 종속적 세계화
이 시기는 1997년 IMF외환위기를 전후에서 점진적 세계화 시기와 전면적 세계화시기로 나눌 수 있다.
80년대 이후 미국은 금융제국을 발판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한국경제는 종속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길을 걷게 된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기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종속적 세계화를 점진적으로 강제하던 시기이다. 전두환 시기의 구조조정을 거쳐 노태우 정권 시기의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라는 3저호황으로 한국경제는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였으나, 그 성과는 모두 부동산 투기와 재벌의 비대화로 이어졌다.
한편 이 시기 미국은 무역분쟁을 야기하며 강력한 개방압력을 들이댔고, 박정희 친미독재시절부터 강화되어온 관료체계에 자리잡은 친미신자유주의자들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점진적 개방일정을 밟아나가게 된다.
1986년 7월 21일 담배·지적소유권(물질특허·소프트웨어·저작권)·보험시장 개방에 관한 통상협상을 일괄 타결되고, 쇠고기·오렌지·포도·사과 및 밀·옥수수·콩 등의 주요 곡류가 1991년 1월까지 3단계에 걸쳐 수입이 자유화됨과 동시에 사료·원료·곡물에 대한 수입쿼터제가 1988년 말까지 폐지되었다. 미국 통상압력에 따른 수입개방 정책으로 수입자유화율이 1987년 91.5%, 1994년 98.5%에 달했다. 농산물 수입개방도 90% 이상 높아져 농가의 몰락과 농촌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전략은 금융개방압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1988년 12월 발표된 “자본시장 국제화의 단계적 확대 추진 계획”은 외국인의 국내투자펀드와 주식의 직접투자를 제한적,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외국 증권회사의 국내지점 설치를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1991년에는 주식시장개방 추진방안과 4단계 금리자유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1990년 3월에는 환율제도를 “복수통화 바스켓 제도”에서 “시장 평균 환율제도”로 전환했다.
미국은 “한미 금융정책 회의”에서 자본·금융 시장의 개방과 자유화의 확대를 거듭 요구했고, 김영삼 정부 시기 1992년 3월 “제1단계 금융자율화 및 개방계획”, 1992년 6월 “제2단계 금융자율화 및 개방계획”, 1993년 “제3단계 금융자율화 및 개방계획”, 1995년 10월 외국기업의 국내 주식발행과 상장허용으로 이어지더니, 마침내 1996년 9월 한국경제의 전면적 금융개방을 의미하는 OECD 가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종속적 세계화는 훨씬 더 폭력적인 방식으로 강행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미국은 본격적인 한국에 대한 “양털깍기”에 들어갔다. IMF외환위기가 터진 것이다.
97년초 미국은 금리인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 금융개방체제를 구축한 데 기초하여 태국 바트화 공격을 시작했다. 태국 금융위기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에 이어 한국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한국은 금융개방의 흐름에 따라 기업들의 외채차입에 의한 글로벌 과잉투자와 우후죽순 설립한 종금사들이 장단기 금리차를 이용한 단기외채, 장기자산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한보, 기아 부도 사태 등으로 한국경제는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은 급격한 자본이탈, 외채상환요구, 외채 만기연장 거부라는 3가지 충격을 가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원화 환율이 급등함에 따라 부채부담이 더욱 증가하고, 외환고갈이라는 유동성 위기에 빠지면서 결국 IMF 구제금융으로 가게 되었다. 투기자본의 공격과 병행하여 미 국무부 정보조사국 INR은 외환위기 발생 1년 전부터 한국경제 동향을 관찰해왔고, 주한 미 대사관은 IMF 직후 일일보고서를 작성했으며, 클린턴 행정부는 일본을 압박하여 단기외채 만기연장을 거부하도록 강요하였다.
문제는 IMF 구제금융이후에 더욱 커졌다.
미국의 입김에 따라 사실상의 총독부 역할을 하던 IMF는 재정과 금융 긴축, 금융시장 전면개방, 외국 금융기관의 한국금융기관 인수합병 참여 허용, 상업은행에 대한 외국인 100% 지분 허용, 자본계정 자유화 가속, 노동시장 유연화 확대 등을 요구했다. 특히 IMF 고금리 정책으로 시중은행 금리가 연 29.5%까지 올라가면서 자기자본 5배 이상의 부채에 시달리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하고, 금융부실화가 심화되었다. 미국 자본들은 알짜기업과 거대은행, 토지와 빌딩 등의 자산을 헐값에 인수하였다. 또한 경제성장률이 –6.9%로 급락하게 되었고, 실업률은 2.6%에서 7.0%로 급등하면서 100만 실업자가 양산되었고, 물가는 4.4%에서 7.5%로 뛰었다. 여기에 공기업 민영화까지 진행되어 공공부문에서만 전체 인력의 약 20% 정도가 감원되었다. 그리고 구조조정, 외주화, 민영화가 본격화되고, 실업이 일상화되었으며, 비정규직 고용이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IMF 구조조정을 계기로 한국경제는 전면적인 종속적 세계화 과정을 겪으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강제이식 당하였다. 주요 은행들이 미국 금융자본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대우, 삼성그룹을 포함한 재벌소속 대기업들 자산이 헐값에 매각되었으며, 주요 공기업들이 분할 민영화 해외매각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농업이 파탄나면서 1:99사회라는 불평등한 헬조선의 문을 열게 되었다.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강제이식된 종속적 신자유주의 경제는 한미FTA를 통하여 더욱더 심화되었다. 2008년 금융공황과 2021년 코로나 펜데믹 위기를 한국경제는 자산버블과 부채 폭탄을 키워가는 방법으로 더 큰 위험을 축적하는 방식으로 끌어 왔다. 또한 위기를 노동자민중에게 전가하고, 제국주의 자본과 수직적으로 일체화된 재벌독식체제, 고용불안, 비정규직 확대,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 산재확대라는 양극화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해 왔다.
종속적 세계화 과정을 통하여 한국경제는 수출을 많이 하면 할수록 국부유출이 심해지고, 한국경제와 유리된 수출재벌들이 살찌는 구조로 고착되었으며, 자산불평등, 소득불평등이 심화되어 노동자민중들은 더욱더 가난해지는 경제구조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종속적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구조 속에서 주기적인 양털깍기 위험에 노출된 경제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돌아보면, 미국에 의해 한국경제는 적산이라는 민족자산을 수탈당했고, 수출주도 경제개발자금을 만들기 위해 막대한 대일 식민지배상금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IMF를 거치며, 그나마 덤핑수출과 민중의 고혈위에 쌓아놓은 내부자산을 송두리째 다시 미국에 약탈당하는 결과를 빚었다. 이것이 예속경제의 숙명이다. 이 구조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또 부채폭탄이든, 자산버블 붕괴 등의 과정을 거쳐 또 다른 경제재앙, 예속경제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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