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우체국 택배 노동자의 백신 휴가 방치하는 우정사업본부
▲ 한 우편집중국에 택배가 쌓여 있다. 자료사진. | |
ⓒ 연합뉴스 |
나는 8년 차 우체국 택배 노동자다. 보통 새벽 5시 반이면 우편집중국에 출근하여 분류 작업을 시작한다. 집중국에 도착하면 팔레트(롤테이너라고도 하는 바퀴 달린 화물 운반대)에 6~10명분의 물건이 담겨 있다. 팔레트마다 사람들이 달라붙어 본인과 타인의 물건을 구분해 빈 팔레트에 옮겨 담는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이런 분류 작업을 시작하면 15분만 지나도 상의가 땀에 흠뻑 젖는다. 노동량이 많기도 하지만 아무런 냉방 시설이 없는 탓이다.
분류 작업에는 손바닥만 한 가벼운 물건도 있지만 20kg 넘는 물건도 있다. 이런 고중량 물건은 팔레트 바닥에 있기 마련이어서 허리를 숙여 물건을 들어 올려 옆에 있는 빈 팔레트에 옮겨 담으려면 힘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이따금 허리나 등에 담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픈 티를 내는 것은 동료들에게 차마 못 할 일이다. 일손 하나가 줄어들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만큼 짐을 나눠서 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참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아픈 줄 모르고 일을 하게 된다. 어쩌면 '고통을 참고 견디는 능력이 택배 노동자의 필수 자질이자 덕목'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8시까지는 개인별로 구분된 물건을 배송하는 순서대로 정리하는 '순로구분 작업'을 한다. 차에 물건을 실을 때는 가장 안쪽부터 싣고 배송할 때는 바깥쪽부터 꺼내게 되니 배송의 역순으로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포인트다.
이때 택배 노동자가 사용하는 차량이 곧 작업의 강도와 질을 결정짓게 된다. 화물 탑차의 종류는 화물실 안쪽의 층고에 따라 1.8m 하이 탑차, 1.58m 정 탑차, 1.27m 저상 탑차로 구분된다. 짐을 싣는 상차 시간은 평균적으로 40여 분 소요된다. 화물실 안쪽 층고가 1.8m인 하이 탑차는 평균 신장을 가진 남성이라면 큰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으나, 평균적인 탑차인 1.58m만 되어도 허리를 30도 이상 구부린 채 일하게 된다.
층고가 1.27m인 저상 탑차는 허리를 90도 굽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화물실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 때때로 난데없는 '오리걸음'을 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저상 탑차에서 짐 싣기 상차 작업은 작업자가 매일 아침 유격 훈련을 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차에 모든 물건을 싣고 나면 9시 무렵부터 실질적인 배송을 시작한다. 오전 내 긴장했던 몸은 배송 시작과 함께 조금씩 풀려간다. 그렇게 또 하루의 물량을 배송한다. 하루 물량은 그날의 일용할 양식이다.
필수노동자 코로나 우선 접종
택배 일을 하다 보면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엘리베이터 같은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마주치는 사람만 해도 얼추 200~300명은 족히 될 것이다. 동선이 겹치는 사람들을 따져보면 매일 수천 명을 마주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조건에서 택배 노동자들은 자신이 확진자가 되는 것에 대한 우려만큼이나 본의 아니게 슈퍼전파자의 낙인이 찍히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압박감을 가지고 있다.
올 초 정부에서 발표한 '필수노동자 코로나 백신 우선 접종 계획'은 마음속 불안을 다소나마 가시게 해준 청량음료 같은 소식이었다. 우리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된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도 세계적인 'K-방역'의 세례를 받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7월부터 구체화하기 시작한 우선 접종 계획에 따라 CJ대한통운과 쿠팡 등을 비롯한 각 택배사는 택배 노동자의 수요조사를 시작했다. 우체국 택배를 운용 중인 우정사업본부도 우체국물류지원단을 통해 수요조사를 진행했다.
우체국물류지원단은 우정사업본부 지시에 따라 본사가 각 지사에 수요조사 업무를 할당해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과정에서 각 지사는 보유 중이던 소포위탁배달원 명단에 연락처를 병기하여 방역 당국에 공유했다. 업무 미숙인지 부주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연락처가 잘못 표기된 탓에 문자 통보를 받지 못해 우선 접종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냥 지나쳐버린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접종 후 통증에 시달렸다는 말에 우려되어, 접종일을 토요일 오후로 해달라는 요청도 했으나 우체국물류지원단은 접종 당사자들의 요청을 묵살한 채 월요일로 일괄 신청해 접종을 포기한 사례도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화요일은 일주일 중 물량이 가장 많은 날이어서 통증이 심하다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월요일에 접종하고 통증이 있어서 화요일에 일을 못 하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택배기사의 질문에 "그런 게 걱정되면 그냥 맞지 마라"는 우체국물류지원단 관계자의 답변이 돌아오기도 했다.
특수고용노동자의 방역은 각자도생
▲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2천명을 넘어선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문화체육센터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에서 시민들이 이상반응을 살피기 위해 모니터링 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다. | |
ⓒ 연합뉴스 |
필수노동자 우선 접종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조성되면서 민간 택배사 중에서 CJ대한통운과 롯데글로벌로지스(롯데택배)는 백신 휴가를 공식화했다. 업계 1~2위 택배사가 나란히 국가 시책에 화답한 모양새다.
그러나 우체국 택배를 운용하는 우정사업본부는 이에 대해 아무런 공식 입장과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내놓은 답변은 "접종으로 인한 통증이 있으면 전날 못한 물건을 다음 날 배송하도록 하라. 지연 배송으로 인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라는 것이었다.
정부의 백신 휴가 적용 원칙은 이틀을 보장하되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하루를 더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주요 시책인 '필수노동자 우선 접종'에 대해 정부기업인 우정사업본부는 사실상 구체적인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예방접종 마치고 나면 의자에 앉아 15분 동안 머물면서 이상 반응이 있는지 살펴보셔야 합니다. 접종 후 3시간 동안은 안정을 취하고 최소 3일 동안은 무리한 운동을 삼가셔야 합니다. 고열이나 이상 반응이 있으시면 즉시 의료기관을 찾아가서 의사의 진찰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찌어찌 정해진 날 접종을 받는 데 성공했다. 주사를 맞은 팔이 뻐근하다. 팔을 들어 올리니 뻐근함이 더해온다. 다행히 아직 별다른 증상은 없다. 접종 후 주의사항을 안내해준 방역 담당자의 친절함에 감사하면서도 한 편으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3일 동안 무리하지 말라'는 지침이 택배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특수고용노동자에게는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 말이다.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정부기업인 우정사업본부의 무책임한 방치 속에 오늘도 특수고용노동자의 방역은 각자도생이다.
1차 접종을 마친 지 며칠이 지나 1339 질병 관리청으로부터 접종 간격 변경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모더나 백신의 공급상황이 불확실하여 접종 일정이 기존 3~4주에서 5~6주로 갑작스럽게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5~6주 후면 연중 택배 물량이 가장 많은 추석 특별수송 기간이다. 이에 소포위탁배달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우정사업본부의 집배과 관계자에게 대책을 물었다. 아직도 공식적인 답변은 없는 상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