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1-05-07 05:00수정 :2021-05-07 10:48
시설 아닌 지역사회 주택에서 돌봄
옷 갈아입기, 밥 먹기 등 일상 배워
“행동치료사 찾아오면 ‘엄마 빨리 들어가’
손짓하며 발걸음 떼…상상 못 했던 일”
연중무휴 24시간 지원체계 구축
“장애인 새 복지모델, 전국 퍼지길”
“자, 동민씨, (돌아왔으니) 옷 갈아입어야지요.”
지난달 30일 오후 5시45분. 조용하기만 했던 광주시 남구 방림동 한 단독주택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광주시 서구장애인복지관 최중증 발달장애인 융합돌봄센터에서 돌아온 최중증 발달장애인인 최동민(가명·23)씨는 거실에 들어서며 “어”라고 대답했다. 20평(66㎡) 남짓한 이층집은 동민씨 등 발달장애인 2명이 사는 쉼터이자 ‘집’이다. 동민씨는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주거코치’ 최윤구(51)씨의 돌봄을 받으며 씻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튿날 돌봄센터에 가는 생활을 한다. 언어장애도 있는 동민씨가 손짓을 섞어 “어, 어” 하자, 최씨가 “아, 동민씨, 배고프다고~” 하며 주고받는 대화가 거실 밖으로 흘러나왔다.
자폐성장애인과 지적장애인을 통틀어 이르는 발달장애인은 2020년 보건복지부 장애인 등록현황을 기준으로 전국 24만791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도전적 행동’을 보이는 성인 최중증 발달장애인은 3%가량이다. 동민씨도 이 가운데 한명으로 강박행동, 과잉행동, 얼굴 때리기, 상처 파기, 가구 무너뜨리기 등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심할 때는 공공기관의 장애인 복지서비스조차 받기 힘들다. 동민씨가 두달 전까지 머물던 ‘원가정’(원래 살던 집)도 창문이 모두 강화유리로 돼 있다. 유리창을 깨지 못하도록, 깨지더라도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동민씨의 도전적 성향은 코로나19 확산 뒤 주간보호센터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심해졌다고 한다. 엄마의 머리를 끌고 몸을 밀쳐 다치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올해 쉰일곱살인 엄마는 “더 아프지만 말라”며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엄마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다. 스스로 추스르기도 어려워진 것이다. “아, 이 세상에 너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하나….” 여느 발달장애인 부모처럼 동민씨 엄마도 ‘아들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망이 됐다. 삶은 이들 모자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은 듯했다.
발달장애인 가정에 닥치는 절망감은 동민씨 가족 이상인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해 6월3일 오전 10시께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의 한 도로에 주차된 승용차에서는 모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코로나19로 주간보호센터가 문을 닫자 집에서 발달장애인 아들을 돌봐야 했던 엄마는 아들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아들은 몸무게가 많이 줄었고, 죄책감을 느낀 엄마는 아들을 석달 만에 퇴원시켰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아들을 돌봐줄 다른 복지시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주변에 “성인이 된 아들을 집에서 돌보는 게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던 엄마는 결국 아들과 극단적 선택을 했다.
공동체에 충격을 던진 그 사건 뒤 실험이 시작됐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 고통과 책임을 본인과 가족에게만 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시는 발달장애인 부모 단체, 장애인 활동가, 복지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전담팀(TF)을 꾸렸다.
전담팀에는 지난해 8월 광주시 발달장애인 전문관으로 임명된 김창우(52)씨가 참여해 최중증 발달장애인을 위한 복지그물망을 촘촘히 엮었다. 2017년 영국 요크대에서 발달장애인 관련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 전문관은 “발달장애인들이 활동하는 데 일대일 지원을 해달라”는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절절한 요구를 담아내려면 주거코치가 24시간 함께 한 공간에서 이들을 돌보고 소통하는 24시간 돌봄 체계를 짜야 한다고 판단하고 여기에 몰두했다. 영국, 유럽이 2009년 발달장애인법을 제정한 뒤 국가가 이들의 돌봄 책임을 지는 모델을 본보기로 삼았다.
결국 전담팀은 지난해 9월 시 예산 32억원을 들여 24시간 돌봄 서비스를 하는 내용을 담은 ‘광주광역시 최중증발달장애인 지원 계획’을 내놨다.
시는 단독주택 2채를 마련해 18살 이상 최중증 발달장애인 4명을 오후 5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까지 주거코치가 돌보는 체계를 만들었다. 2014년 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됐음에도 여전히 돌봄을 각 가정과 부모의 몫으로 넘겨온 한국 사회의 게으름에 변화를 시도한 것이었다.
지난 3월16일 동민씨 등 2명이 먼저 생활을 시작했고, 이달엔 1명이 추가로 합류한다. 주거코치 3명은 교대로 근무한다.
지원주택에서 동민씨는 혼자 옷을 갈아입고, 밥을 떠먹고, 칫솔질하는 등 ‘일상’을 배운다. 주거코치는 입소자들을 ‘○○씨’라고 부르고, 미세한 갈등은 손짓으로 소통하며 해결한다. 주거코치인 최윤구씨는 소통의 한 장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번은 동민씨가 무슨 이유로 화가 났는지 저를 꼬집고 방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똑, 똑 하고 노크를 해서 저도 따라 했지요. ‘화났느냐?’, ‘괜찮다’는 대화였지요.”
임은주 광주시 서구장애인복지관 최중증 발달장애인 융합돌봄센터장은 “도전적 행동은 발달장애인이 ‘내 말을 들어줘. 내 생각을 좀 받아줘’라고 외치는 소리다. 그들의 행동엔 긍정적 지원을 하는 게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동민씨는 30일 오전엔 도심 여행을 했다. 평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는 행동치료사 4명과 함께 광주시 서구장애인복지관 최중증 발달장애인 융합돌봄센터에서 생활하는데, 이날은 류성훈(30) 행동치료사와 함께 37번 시내버스에 올랐다.
지하철 교통카드도 처음 샀다. 류씨는 “(동민씨가 차 타기를 좋아하지만) 시내버스에 오르기까지 3시간 정도 걸리기도 했다. 재촉할 수도 있지만 동민씨가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기다린다”며 “발달장애인은 선택이 다소 까다로울 뿐이다. 자기 결정권을 존중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말이면 동민씨는 부모와 함께 살던 ‘원가정’으로 돌아간다. 요즘은 오랜만에 엄마를 볼 때마다 꼭 껴안는다. 엄마는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동민씨의 변화가 반갑다.
“아이를 보내놓고 잠도 못 잤어요. 아이가 머무르는 집 주변 골목길을 혼자 걷기도 하고요. 가족들은 아이한테 벌벌 하며 살았어요. 그런데 아들이 그곳에서 규칙을 배우며 달라지고 있어요.”
월요일 아침이면 집으로 찾아오는 행동치료사 선생님을 보면 동민씨는 표정이 달라진다고 한다. 신이 나서 ‘엄마 빨리 들어가’라는 손짓과 함께 가볍게 발걸음을 뗀다. 엄마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요. 요즘은 정말 행복하네요. 한편으론 저만 이런 혜택을 봐 미안하기도 하고요”라고 말했다.
광주시는 주중 집에서 지내는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주말·휴일 돌봄서비스도 도입했다. 주간활동서비스 제공 기관 등 7곳에서 40명까지 돌봐준다. 평일에 발달장애인 자녀들을 돌보느라 지친 부모들에게 주말에라도 휴가를 주자는 취지다.
최종건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광주지부 사무처장은 “발달장애인들을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 안 주택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새로운 장애인 복지 모델이다. 주말·휴일 돌봄 지원 서비스도 전국 첫 사업이어서 반갑다”고 밝혔다. 김창우 전문관은 “광주시의 발달장애인 정책을 보고 광주로 이사 온 가정까지 생겼다. 광주가 첫걸음을 뗀 발달장애인 정책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rea/honam/994231.html?_fr=mt1#csidx18d922e9f044adc9b9363fd15e0a0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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