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메모리·파운드리 녹록치 않아…정부, 분야별 장기 전략 세워야”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고 한다. 전 산업에 걸쳐 안 들어가는 곳이 없다는 얘기다. 스마트폰과 TV, 컴퓨터 같은 IT·가전 제품뿐 아니다.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는 반도체 부족으로 공장이 멈춰 섰다. 5G 통신 기지국에도 반도체가 들어간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언택트 환경에서 전 세계 온라인 접속이 늘며 수요가 급증한 서버 구축에도 다량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한국은 반도체 산업 강자로 불리지만, 일부 분야에 국한된 평가다. 특히 설계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하다. 수요처 다변화로 반도체 설계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한국의 위상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경고가 나온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규모의 반도체 설계 연구개발(R&D) 사업을 지휘하는 김형준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단장를 만나 한국 반도체 산업 현황과 발전 방향, 정부 정책을 짚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12일 대면으로 진행하고, 27일 추가로 전화 통화를 했다.
김 단장은 시장이 한정된 메모리에만 집중해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지속가능한 경쟁력를 확보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또한, 비메모리에서도 제조 기반의 파운드리뿐 아니라 설계 기반의 팹리스를 육성해 영역 확대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단장은 “팹리스는 고용 창출 효과가 크고 부가가치가 높다”며 “시장 성장 전망도 뚜렷하다”고 설명했다. 메모리의 반도체 시장 비중은 약 30%다. 나머지는 비메모리 영역이다.
반도체는 크게 메모리와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는 데이터를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범용 성격을 띠어, 반도체 기업이 생산한 후 수요처가 사가는 방식이다. 연산 기능을 가지는 비메모리는 수요처 요구사항에 맞게 반도체를 설계 생산하는 주문형 방식으로 거래된다.
메모리 시장은 한 업체가 설계와 생산을 모두 수행하는 종합반도체업체(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가 주를 이룬다. 메모리는 수급 상황에 따라 가격 변동 폭이 크다. 수요가 떨어지는 불황을 견뎌야 해 자금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사업을 유지하기 어렵다.
비메모리는 수요처별로 종류가 다양해 설계와 생산이 나뉜다. 최종 수요 기업이 설계 업체에 주문을 넣으면, 설계 업체는 설계만 하고 생산은 위탁을 맡긴다. 설계 업체는 반도체 생산 공장(Fab·Fabrication facility)을 보유하지 않아 팹리스(Fabless)라 부르고, 위탁생산 업체는 파운드리(Foundry)라 한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1위 국가다. D램(데이터 단기 저장)과 낸드플래시(데이터 장기 저장) 모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2위를 지키고 있다.
비메모리 산업은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17%를 차지하는 수준에 그친다. 순위로는 세계 2위지만, 1위인 대만 TSMC 점유율이 절반을 넘어서 격차가 크다. 팹리스 점유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한국 팹리스 업체는 약 150개로 중국에 비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김 단장은 메모리 시장 환경이 녹록지 않다고 진단했다. 그는 “메모리 ‘초격차’를 얘기하는데,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기 어렵다”며 “마이크론이 치고 올라오고 있어, 예전처럼 안전하게 따돌렸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마이크론이 D램과 낸드 모두에서 한국 기업보다 먼저 기술개발 성과를 내놨다”며 “기술개발과 양산은 별개이기는 하지만, 마이크론 추격이 거세진 것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마이크론은 세계 메모리 시장 3위 업체다. 반도체는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선폭이 좁을수록 성능이 좋은데, 마이크론은 올해 초 세계 최초로 메모리에서 10나노 공정 양산을 발표했다. 실제 양산 과정에서 얼마나 높은 수율을 확보할지는 미지수지만, 선단 공정 양산 돌입 시점이 삼성전자를 앞질렀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낸드에서도 세계 최초로 176단 반도체 공급을 시작했다. 낸드는 높이 쌓을수록 좁은 면적으로 저장공간을 늘릴 수 있어, 단수는 기술력 가늠자가 된다.
파운드리에서 TSMC를 추격하는 일도 쉽지 않다. 김 단장은 “격차가 오히려 벌어지는 느낌”이라며 “TSMC는 스마트폰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와 PC·서버용 CPU(중앙처리장치)·GPU(그래픽처리장치) 등 고성능 제품군에서 지속적인 수요 증가가 전망되는 선단 공정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운드리 기술력 핵심은 D램과 마찬가지로 선폭이다. 파운드리에서는 7나노 이하부터 선단 공정으로 본다. 현재 7나노 이하 공정을 양산하는 업체는 삼성전자와 TSMC뿐이다. 양사는 5나노 공정 양산에 성공한 상태다.
7나노 이하 공정을 위해서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가 필수다. 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하고 있는데, 생산량이 한정돼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삼성전자 확보 물량은 20대 안팎으로, TSMC의 절반 수준으로 알려졌다.
김 단장은 “삼성전자는 공정 개발과 수율 개선 속도 경쟁 가운데, 적기 투자를 통해 생산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TSMC도 공격적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고 인텔도 파운드리 시장 진출에 나서 경쟁이 심화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팹리스, 돈보다 인력…웨어러블·IoT 칩 시장 가능성 열려 있어”
팹리스 경쟁력 강화의 핵심으로 인력 양성이 꼽힌다. 김 단장은 “회사 쪽과 만나보면 입을 모아 ‘인력’을 얘기한다”며 “구직난이라는데, 현장에서는 인력이 없다고 한다. 미스매치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팹리스의 기반은 인력”이라며 “물론 자금 지원도 필요하지만, 현장에서는 돈보다 인력 확보가 최우선”이라고 했다.
이어 “중소·중견 업체가 반도체를 하나 개발하려면 모든 연구진이 달라붙어서 설계-시제품 테스트-수정 등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인력이 있으면 비용 부담을 감내하고서라도 연구개발과 양산을 추진할 수 있는데, 인력 부족으로 양산 단계까지 가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사업단은 2026년까지 세계 팹리스 점유율 10% 달성을 목표로 제시한다. 지난 2001년부터 2011년까지 시스템집적반도체개발사업단장을 맡은 바 있는 김 단장은 “굉장히 과감한 도전”이라고 운을 뗐다.
“그때도 팹리스 산업 육성을 시도했으나, 역시 인력 부족이 가장 컸다. 우수한 설계 인력 대개가 메모리 중심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흡수됐다. 팹리스는 기본적으로 창의력을 갖고 도전하는 일인데, 젊은 인력이 계속 빠져나가면서 혁신이 정체됐다”
시장 환경도 따라주지 않았다. 김 단장은 “10여년 전 한국의 세계 시장 팹리스 점유율이 4% 초반까지 갔다가, 지금은 3% 초반으로 떨어졌다”며 “당시 한국은 모바일 칩을 주로 만들었는데, 개별적으로 들어가던 칩이 기술 발전에 따라 AP로 통합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모바일 AP는 중소기업 영역이 아니다. 한국 기업이 시장을 잃은 것”이라며 “앞으로도 통합칩 확대 추세는 지속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 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가 적을수록 효율성이 높아진다. 차량을 예로 들면, 부품마다 반도체가 탑재되는 것보다 통합칩으로 여러 부품을 조작하는 편이 유리하다. 통합칩은 많은 기능을 수행하기에, 필연적으로 고도의 기술력이 수반된다.
김 단장은 한국 팹리스 산업의 단계적인 성장을 제시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AP·CPU·GPU 등 주요 품목은 글로벌 대기업이 자리 잡고 있어 후발 주자가 파고들 틈이 없지만, 상대적으로 진입이 유리한 중급 기술 반도체 시장은 노려볼 만 하다는 판단이다.
“스마트폰 AP는 퀄컴이 잡고 있다. 이제 애플도 AP를 자체 설계한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경쟁한다. 차량용 통합칩은 테슬라가 치고 나온다. 대기업이 버티는 커다란 시장에서 중소·중견 팹리스가 이길 수 있겠나. 첨단 기술이 아니더라도 시장이 있는 칩을 개발해 상용화해야 한다. 또한 아이디어를 통해 시장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스마트워치를 비롯한 AR(가상현실)·VR(증강현실) 기기 등 웨어러블 기기와 사물인터넷(IoT) 쪽에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제 김치냉장고에도 반도체가 들어간다. 완성품 기업과의 협업을 바탕으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정부 대책, 가려운 곳 긁어줬지만…중장기 전략 아닌 단기 지원 그쳐”
정부는 지난 13일 ‘K-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메모리와 파운드리뿐 아니라 팹리스를 아우르는 산업 전반에 걸친 인프라를 민관이 공동으로 구축한다는 취지다.
김 단장 평가는 큰 틀에서 긍정적이다. 그는 “이번 종합 대책은 요약하면 세제 지원과 인력 양성인데, 일단 업계에서 원하는 걸 수용했다”고 말했다.
다만, 김 단장은 이번 종합 대책 한계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발표 내용은 가려운 부분을 긁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장기 전략이라기보다는 단기 지원책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은 반도체 산업에 대한 장기 전략이 없다”며 “메모리·파운드리·팹리스 분야별 치밀하고 세밀한 장기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세부사항에서도 의문부호가 붙었다. 김 단장이 강조한 인력 양성 방안이 그렇다. 정부는 향후 10년간 반도체 산업 인력 3만 6천명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확대하고 학사 인력 약 1만 6천만명을 배출한다. 석·박사급 전문 인력 7천명을 육성하고, 재직자와 취업준비생 대상 교육으로 실무인력 1만3천명을 양성한다.
김 단장은 “제시한 목표 수치는 아마 업계 요구에 맞췄을 것이기에, 달성된다면 양적으로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양보다는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학부 인력보다는 석·박사급 전문 인력이 핵심”이라며 “전문인력 양성 방안을 내실 있게 운영해 7천명 확보를 달성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파운드리와 팹리스 간 상생도 강조된다. 김 단장은 현실적인 방안으로 MPW(Multi Project Wafer) 확대를 제안했다. MPW는 파운드리 업체가 웨이퍼 하나에 여러 팹리스 업체의 칩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팹리스의 시제품 생산 비용을 낮출 수 있다.
“7나노 공정 칩 하나를 만드는 데 100억원이 든다. 양산이 아니라 샘플을 만드는 비용이다. 20~30나노 공정도 30억원이 든다. 작은 회사에는 큰 부담이다. 삼성전자와 TSMC 등 파운드리 업체가 MPW로 샘플을 만들어주는데, 상대적으로 비용을 덜 받는다. MPW를 확대하면 팹리스 업체가 비용을 절감하고 개발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공장을 증설하면서 MPW를 확대할 것으로 기대한다.”
한편, 차세대지능형반도체사업은 지난해부터 10년간 총사업비 1조 96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설계와 미래 소자, 공정·장비 기술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올해 103개 기업, 32개 대학, 12개 연구소가 82개 과제에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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