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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1일 금요일

[커버스토리]자식이라는 ‘희망’ 잃고 ‘유가족’으로 다시 서다

 김민아 선임기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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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훈씨(59)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들 이름은 ‘삶의 희망’이었다. 대학생이던 아들은 지난달 22일 경기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300㎏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숨졌다. 스물세 살, 이선호씨다.

    김혜영씨(63)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아들 이름은 ‘나의 희망’이었다. tvN PD이던 아들은 2016년 10월 드라마 제작 현장의 장시간 노동과 부당한 업무 강요를 고발하며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스물일곱, 이한빛씨다.

    ‘희망’을 빼앗긴 아비와 어미들은 투사가 된다. 초등학교 교사의 딸로 자라 중·고교 교사로 평생을 살아온 김혜영씨도 그랬다.

    김씨가 대학 4학년이던 해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재학 중이던 충북대 캠퍼스에서도 집회가 열렸지만 “전두환 타도” 구호가 무섭기만 했다. 교사이던 남편 이용관씨(65)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을 때도 ‘노동’이란 말이 낯설었다. ‘근로라는 말도 있는데 왜 굳이 노동을 쓰지’ 생각했다.

    아들의 죽음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중학교 교감의 안온한 일상은 사라졌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간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디든 쫓아갔다.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가족이 겪는 슬픔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회사 측의 사과를 받아내고, 보상금으로 미디어산업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를 세웠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한 싸움에도 앞장섰다.

    지난해 8월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김씨가 최근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냈다. 한빛센터 홈페이지에 연재한 글 80여편 가운데 50여편을 가려 뽑고 새로 쓴 글 10편을 보탰다. 그는 책날개에 “이름처럼 빛나는 삶을 살았던 아들의 꿈을 기억하며, 남겨진 사람으로서,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썼다.

    지난 18일 경향신문사에서 김씨를 만났다. “지금까지는 ‘유가족’이란 말을 쓰지 못했습니다. 너무 슬프고, 동정받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어요. 책을 내면서 달라졌습니다. ‘나는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이 생겼어요. 그러고 나니 할 일도 많아졌고요. 제 힘이 닿는 한, 현장에 찾아가 어려운 이들의 곁에 있을 겁니다.”

    김씨는 지난 13일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고 이선호씨 추모문화제’에 참석했다.

    ■아들 떠난 후 시간이 멈춘 듯, 껍데기로 살아…‘유가족’ 단어 받아들이고 나서 달라져

    2017년 4월18일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기자회견에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오른쪽). 이한빛 PD 3주기를 하루 앞둔 2019년 10월25일 추모제 ‘다시는’에서 김혜영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지윤·권도현 기자

    2017년 4월18일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기자회견에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씨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오른쪽). 이한빛 PD 3주기를 하루 앞둔 2019년 10월25일 추모제 ‘다시는’에서 김혜영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지윤·권도현 기자

    세월호 연대·KTX 해고승무원 등에
    적금 대신 ‘후원금’ 보냈던 이한빛씨
    아들의 고민 알아주지 못한 게 ‘후회’

    - 아드님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한빛이 스물일곱에 떠났습니다. 떠나고 나서 보니까, 한빛에 대한 기억이 스물일곱에 멈추는 거예요.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일기장에도 ‘한빛이 이랬었는데’ 과거형만 쓰고 있더라고요. ‘한빛아, 지금 어떻게 지내니’ 물어보고 싶어도 카톡을 보낼 수도 없고요. 너무나 그리운데도 기억이 금방 흐릿해지는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홈페이지의 ‘빛이 머문 시간’ 코너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쓰면서 ‘이 작업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고 한빛을 기억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儀式)’이란 생각이 들게 됐어요.”

    - 책으로 묶어내는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았나요.

    “(자식을 잃은) 다른 엄마들은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자주 들여다본다고 해요. 저는 그것도 잘 못해요. 마지막 원고 교정 볼 때는 너무 힘들어서 진이 빠졌어요. 책은 내면 뭘 하나, 아들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싶기도 했고요.”

    원고 교정작업은 충남 도고의 집에 가서 했다. 마침 지난해 말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29일간 단식했던 남편 이용관씨(한빛센터 이사장)가 휴식하며 보식을 해야 하던 터였다. 부부만 도고에 가서 “통곡하며” 교정을 봤다.

     김혜영 지음" style="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none; outline: none 0px; vertical-align: top; background: none 0px 0px repeat scroll transparent; display: block; max-width: 710px;">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 김혜영 지음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쓴 글 출판
    내고 싶었지만…내고 싶지 않았던
    결국엔 그래도 ‘내게 힘이 된 책’

    - 책을 내고 나니 어떻습니까.

    “책 읽고 글쓰는 걸 좋아했고, 평생 국어 교사로 일했어요. 퇴임하기 전에 책을 쓸 거란 희망은 늘 품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책을 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 운명이 왜 이렇게 됐지?’ 싶어서 많이 슬펐어요. 하지만 책으로 묶는 작업을 하면서 한빛에게 ‘약속’을 하게 되고, 그 약속을 실천하기 위한 동력을 얻었습니다. 한빛 추모제 때마다 ‘빚을 갚겠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책으로 내고 나니 조금은 갚은 느낌이 듭니다. ‘내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고 싶지 않았던’ 책, 그러나 ‘결국에는 힘이 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이 농담 반 진담 반 건네는 ‘노동 착취’라는 단어가 가슴을 후벼팠어요. 물론 나도 노동자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그네들 앞에선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이한빛의 유서 중에서)

    2016년 10월26일. 이한빛이 조연출로 일하던 드라마 <혼술남녀>가 종영한 다음날이었다. 그는 마지막 글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그해 1월 CJ E&M의 케이블채널 tvN에 정규직 드라마PD로 입사한 그는 촬영 준비, 촬영장 정리, 정산, 편집 업무 등을 맡았다. <혼술남녀>는 방영을 한 달가량 앞두고 촬영·장비·조명 담당 외주업체를 대거 교체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계약직 스태프가 일자리를 잃었다. 이한빛은 아버지에게 “계약금으로 받은 돈을 이미 다 썼는데, 반환하라고 독촉하는 건 정말 못할 일”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시절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하고 투쟁했던 이한빛은 “스스로 경멸하는 삶”을 이어가는 대신 죽음을 택했다. 입사 9개월 만이었다.

    생전의 이한빛 PD. 김혜영씨 제공

    생전의 이한빛 PD. 김혜영씨 제공

    - 한빛씨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요. 원래부터 PD를 꿈꾸었나요.

    “중학교 때부터 꿈이 신문기자였어요. 학교신문 편집장도 하고 그랬어요. 대학 갈 때도 ‘기자 되려면 정외과 가야 해’ 하더라고요.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서 영화에 관심이 커졌습니다. 계절학기에 영화 강의 듣고, 공군 복무할 때는 외박 나왔다 들어가며 영화를 많이 다운받아 가더라고요. 휴가 때도 조조영화 보고요. 서울대 ‘대학문학상’ 영화평론부문 가작을 받기도 했어요. 결국 메시지를 대중에게 바로, 쉽게 전달하는 드라마 PD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저하고 아이 아버지는 속으로 기자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믿어줬습니다.”

    tvN에 입사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너 결혼할 때 집 못 사준다”며 적금을 들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러마 하던 아들은 몇 달이 지나도록 적금을 들지 않았다. 어머니가 서운해하자 “사실 돈 벌면 기부하고 싶은 데가 많았다”며 월급을 세월호 4·16연대, 기륭전자, KTX 해고승무원, 빈곤사회연대 등에 후원금으로 보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내년엔 꼭 적금 들겠다”고 약속했다. 아들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 한빛씨 생전에 이런 사정을 알고 계셨습니까.

    “구체적으론 몰랐어요. 유서에도 이렇게 썼어요. ‘엄마 아빠, 제 통장에 남은 돈은 힘들고 어려운 곳서 일하는 제 친구들한테 주세요.’ 죽은 아들 통장을 정리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한빛 아빠가 정리하며 대성통곡을 했지요. 생활비 빼곤 다 후원금으로 나갔더라고요. 사실 지난해 제가 정년퇴직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후원금 리스트 정리였어요. 꼭 내야 될 곳만 내게 되더라고요. 한빛의 결정이 쉬운 게 아니었구나 다시 한번 실감했어요.”

    - 한빛씨는 “노동자를 쥐어짜는 관리자”로 사는 현실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그런 대화할 시간도 없었어요. 꼭두새벽에 나가서 한밤중에 들어오니까…. 함께 식사할 때 한두 번 이야기한 건 기억나요.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면서 ‘비정규직은 하루아침에 해고될 수도 있고, 일회용품처럼, 도구처럼 취급받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말을 중간에 끊었나봐요. ‘원래 사회생활이 다 그래.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 어쩔 수 없는 거야’ 하고요. 정말 후회돼요. 용균이 엄마(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도 ‘용균이가 일하는 곳이 그런 줄 알았으면 안 보냈을 것’이라고 했는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엄마들이 어찌 알겠어요. 유서에 보면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구절이 있어요. 그게 한빛의 소신이었는데, 저는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것’이라고 했으니…. 대화를 길게 했으면 ‘그럼 그 회사 나와서 다시 공부해. 어디 못 들어가겠니’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래도 죽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한빛은 스스로 경멸하는 삶을 살 수도 없고, 혼자만 살겠다고 나오는 것도 어려웠을 거예요.”

    이한빛이 떠난 뒤, 가족들은 회사 측에 객관적 조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측은 고인의 성격과 근무태도 탓으로 돌렸다. 불성실했다, 적응을 못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했다…. 가족들은 믿을 수 없었다.

    - 분노가 컸겠습니다.

    “사람이 스물일곱 해 동안 성실하게 살다가 9개월 만에 휙 변할 수 있습니까. 회사 관계자를 만나는 자리에 지인과 함께 갔어요. 이 지인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사측이 말하는 한빛과 자신이 알던 한빛이 다르다고 생각해 녹음을 시작했어요. 이 녹음이 나중에 진상규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한빛의 동생 한솔(31)은 형이 숨질 당시 군 복무 중이었다. 이한솔은 휴가 나올 때마다 <혼술남녀> 외주업체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대부분 만나주지도 않았지만, 몇몇은 용기 내 진실을 증언했다. 청년유니온은 고인의 휴대전화 통화기록 분석 등을 통해 <혼술남녀> 제작환경이 열악하고 노동착취적이었음을 입증했다. 유가족과 청년유니온 등 시민사회단체로 꾸려진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는 2017년 4월18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건을 공론화했다. 김혜영은 싸움의 중심에 섰다.

    아들이 세상을 뜨기 전 김혜영은 평범한 교사이자 주부였다. 책에 이렇게 썼다. “졸업 후 줄곧 학교에서만 근무했기에 나는 노동자로서 사회의 흐름에 민감하지 않았다. 비정규직이란 말도 관심 밖이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숨진 김군에 대해 이야기하며) 무슨 법 제정까지 필요하다고 하는 한빛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 아들의 부재가 어머니의 삶을 바꿔놓은 건가요.

    “저는 시골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제가 어느 정도 ‘순진’했냐면…. 1980년 대학(충북대 사범대) 4학년 때 5·18이 있었거든요. 교문 앞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신현확 타도, 전두환 타도’ 하는데 그냥 무섭기만 했어요. 81년 2월에 졸업하고 3월부터 교사로 일했습니다. 3년 있다가 야간에 고려대 교육대학원에 다니게 됐어요. 고대 갔더니 4~5월이면 매일 데모를 해요. 그때 최루탄 냄새를 처음 맡아봤어요. 5월이 되니까 고대 학생회관 앞에 5·18 관련 사진들이 전시돼 있어요. 수업에 조금 일찍 간 날, 한 번 봤습니다. 처참해요. 마치 그림같이 느껴져서 몰래 긁어보기도 했는데, 사진이더라고요. 혼란스러웠지요. 결혼 후 남편이 전교조 사건으로 해직됐어요. 그때도 ‘근로라는 말도 있는데, 왜 굳이 노동이란 말을 쓸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 2017년 4월18일 기자회견에도 원래 남편이 참석할 예정이었다면서요.

    “맞습니다. 당시 저는 교감이었는데, 학교에서 괜찮은 척하고 지냈어요. 동정받기 싫었거든요. (한빛의 사인을) 교통사고라고 숨겼어요. 아들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서 대책위에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회견 이틀 전 한빛 아빠가 간농양으로 입원하게 됐어요. 한빛이 떠난 후, 남편은 밤마다 제가 잠들고 나면 술을 마시거나 수면제를 삼켰다고 해요. 그러다 간에 무리가 온 거죠. 회견 전날 밤 우리를 도와주던 청년유니온 관계자가 와서 ‘어머님이 하셔야 합니다’ 하는 겁니다. 앞이 캄캄했지요. 한빛의 죽음만으로도 힘든데, 돌아가는 상황도 한빛 아빠만큼 알지 못하는데, 회견 전날 밤에 갑자기 회견문을 써야 했어요.”

    김혜영은 책에서 술회한다. “기자회견을 앞두고 정신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중략) 자식 잃은 부모의 감정은 조롱거리가 되기 쉬웠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단식투쟁을 할 때 그 앞에서 피자 100판과 치킨, 핫도그 등을 먹었다는 기사를 본 뒤 인간이 어디까지 극악할 수 있는가 싶어 치를 떨었던 기억이 소환됐다. 한빛을 두 번 욕되게 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할 일은 진상 규명을 넘어서
    그들에게 먼저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
    청년들 더 이상 불행해져선 안 돼

    - 그 후 수많은 곳에 가서 아드님 이야기를 했지요.

    “한빛에 대해 알릴 수 있다면 어디든 갔습니다. 광화문광장에도 섰고요.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으니 눈물도 안 났어요.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 담담할 수 있지’ 싶을 정도였습니다. 단순한 진상규명을 넘어서 이겨야 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우리 가족이 겪는 슬픔을 누군가 다시 겪어선 안 된다, 청년들이 불행해져선 안 된다, 더 이상 죽어가선 안 된다, 생각하니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요. 그 전까지는 주로 제 가정과 아이들 중심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그 무렵부터 타인을 위해 기도하게 됐어요. 그동안은 나 스스로 성실하고 민폐 안 끼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옆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바라보아야 하고, 옆사람이 힘들면 손을 잡아줘야 된다, 비빌 언덕이 돼줘야 한다, 옆 사람이 잘 살아야 나도 잘 살 수 있다…. 제 변화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산재 참사는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어 힘 닿는 한 연대하며 살 겁니다

    지난 1월8일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안이 통과된 뒤 고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관씨(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지난 1월8일 국회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안이 통과된 뒤 고 이한빛 PD 아버지 이용관씨(가운데)가 발언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졸지에 유가족 되고 멈춰버린 시간
    산 사람은 살라는데…잘 안되더라
    자식의 죽음은 버티고 견딜 수밖에

    CJ E&M 측은 2017년 6월14일 이한빛 PD 유가족과 대책위에 공식 사과하고 재발방지 대책 마련, 책임자 징계, 회사 차원의 추모식, 이한빛 PD 사내 추모편집실 조성, 고인 뜻을 기릴 수 있는 기금 조성에 관한 재정적 후원을 약속했다. 또 적정 근로시간·휴식시간 등 포괄적 원칙 수립, 외주사와 스태프 간 계약 시 합리적 표준 근로계약서 마련 권고 등 방송 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과제도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유가족은 가족이 받은 보상금과 회사 측 기부금으로 2018년 한빛센터를 설립했다. 한빛센터는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방송·미디어 분야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 기자회견 두 달 만에 사측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외주업체 스태프 등) 진실을 말해주신 분들이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당시 청년과 시민들이 대단히 우호적이었어요. 기자회견 다음날부터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동참하겠다고 해서 ‘1인 시위 예약자’가 밀릴 정도였습니다. 관련 기사에 지지하고 응원하는 댓글도 많이 달아주시고요. 그분들이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견디기 수월한 슬픔이란 없다. 하지만 위로조차 보태기 어려운 슬픔은 흔치 않다. 자식을 앞세운 사람들의 슬픔이 그럴 것이다. 김혜영은 쓴다.

    “제사상 앞에서 형제자매 중 누가 돌아가신 부모님을 찾을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막내의 ‘엄마가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같이 훌쩍이다가도 언니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금방 깔깔대기도 한다. 자식의 죽음은 다르다. 남편이나 나나 매일매일 공허하다. 한집에 살면서도 각자의 방법으로 슬픔을 마주한다. 그리움에 지치면 부둥켜안고 엉엉 울면서 덜어내도 될 것 같지만 나도 남편도 참고 참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더 큰 고통을 줄까 봐 두려워한다.”

    - 책에서 “나는 졸지에 유가족이 되었고 유가족은 이래야 한다고 학습하지 않은 채 유가족이 되었다”는 대목이 가장 슬펐습니다.

    “죽음이라는 게, 한 세계의 끝이잖아요. 한빛이란 세계의 끝. 고 이선호씨 추모문화제에도 가봤는데, 아버님(이재훈씨)이 ‘선호의 죽음으로 한 가정이 박살났다’고 하시더라고요. 박살이란 말,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어요. 흔히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하는데, 그게 안 돼요. 살아갈 의미가 모두 사라집니다. 한빛이 떠난 이후 4년가량 더 교직에 있었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껍데기로 산 느낌이랄까요. 지금 당장은 제가 인터뷰에 몰입하고 있지만, 끝나고 나가서 지하철만 타도 ‘왜 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한빛이 떠난 이후로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듭니다.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고…. 산다는 말보다 버텨낸다, 견뎌나간다는 말이 더 어울리죠. 자식 잃은 부모는 모두 같을 겁니다.”

    - 이선호씨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 심경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선호씨 아버님이 휴대전화에 아들을 ‘삶의 희망’이라고 저장해 놨다지요. 제 휴대폰에도 한빛이 ‘나의 희망’으로 저장돼 있어요. 저는 희망이라는 말이 운명보다 강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것이지만, 희망은 이런 운명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라고요. 선호 아버님도 그런 의미로 썼을 것 같아요. 선호 소식을 듣고, 사람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지는구나 싶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남편이 지난해 말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요구하며 29일간 단식했는데요. 법이 통과되고 두세 달 만에 젊은 친구가 안전요원도 없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어요. 이건 사회적 타살입니다. 개인적인 죽음이 아닌 사회적인 죽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선호나 용균이나 한빛처럼 선하게, 평범하게 살던 젊은이들이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회입니다. 바뀌어야 됩니다. 저도 다시 정신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눈곱만큼이라도 역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 이선호씨 아버님, 그리고 자식을 먼저 보낸 모든 부모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자식을 먼저 보낸 사람에게는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도 위로를 받아봤지만 사실 위로가 안 됐어요. 전에 고양시에 살 때 경의선 타고 서울로 나오는데, 상암DMC역이 다가오면 눈을 감아버립니다. 한빛이 다니던 회사가 상암동에 있으니까요. 지하철 2호선 타면 서울대입구역도 못 지나가요. 한빛이 예전에 그 역 근처 원룸에 살았거든요. 2호선이 순환선이잖아요. 서울대입구역을 지나 여섯 정거장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도 반대방향으로 타고 스무 개쯤 갑니다.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요. ‘혜영아, 너 이겨내야 돼.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지난해 말에야 조금 극복했어요.”

    아직도 한빛센터에는 잘 가지 못한다. 상암동에 있어서다. 아파트 앞마당에 들어서는 CJ대한통운 택배차량만 봐도 떨린다. “선호 아버님이나 용균 어머님도 그럴 겁니다.” 김혜영의 소망은 이런 슬픔을 겪는 가족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 일이다. 가족 모두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앞장섰던 이유다.

    처벌보다 안전 위한 중대재해처벌법
    취지 살려야 제2의 용균·선호 안 나와
    사회 안 바뀌면 반복될 수밖에 없어

    - 산업재해 유가족들의 목숨 건 투쟁으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습니다. 하지만 5인 미만 사업장은 적용 대상에서 빠지고, 5~49인 사업장은 적용이 2년 동안 미뤄졌습니다. 최근에는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사용자 측이 대표이사를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 법의 취지는 처벌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안전을 지키자는 데 있습니다. 취지를 살리지 못하면 제2, 제3의 용균이, 선호가 나올 수 있어요. 제가 교장으로 일해본 경험에 비춰보면, 최고경영자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컨대 학교에서 교장이 안전 문제에 책임감을 가지면, 안전에 예산과 인력을 충분히 투입하고 교사 연수도 실시하게 됩니다. 교장이 솔선수범하면 교사도 의욕을 갖고 더 열심히 챙기게 되고요. 교장이 책임을 나 몰라라 하고 ‘안전 문제는 담임이 알아서 책임지라’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최고경영자가 안전에 최종 책임을 져야 할 이유가 여기 있어요. 사람이 죽은 다음에 보상금을 주면 뭘 합니까. 사람이 죽지 않게 해야지요. 사람 목숨과 기업 이윤 가운데 뭐가 중요한지는 초등학생도 압니다.”

    - 한국에선 해마다 2000명 이상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입니다. 그럼에도 사고 발생 직후에만 공분이 일 뿐, 분노가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저도 제 아들이 죽을지 몰랐고, 나와 내 가족이 열심히 살고 행복하면 된다고 여겼어요. 사실 좁게 살았어요.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그런데 언제든 누구한테든 닥칠 수 있는 일이에요. 사회가 바뀌지 않는 한, 나와 내 가족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내 일처럼 생각해 귀를 기울이고, 서로 업고 업히고, 기대고 등 내주고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런 연대가 없으면 ‘매일 7~8명이 퇴근하지 못하는’ 현실이 바뀌지 않아요.”

    고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 박민규 선임기자

    고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 박민규 선임기자

    교단서 노동교육 못한 게 가장 후회돼
    생명이 이윤보다 우선이라는 가치관
    모두 배웠다면 함께 잘 살았을 텐데

    4·7 재·보궐 선거 이후 청년세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같은 20대라 해도 그 내부에 지역·가정·학력·직업 등에 따른 격차는 존재한다. 이한빛은 서울대를 나온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였다. 김용균과 이선호는 하청기업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40년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김혜영에게 기성세대의 책임을 물었다.

    “한빛이 떠난 뒤, 제가 가르치던 중학생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들도 5~6년 후면 청년이 되고 사회에 나갈 텐데, 자기가 추구하던 가치가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좌절하면 얼마나 힘들까…. 교사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실질적 노동교육을 하지 못한 게 가장 큰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지난 12일 전곡중학교에서 열린 교사 연수에 갔을 때 노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어요. 우리는 누구나 일을 하고 살아가는 노동자이며 사회 구성원이 됩니다.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자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 많은 아이들이 노동자가 되든, 하청업주가 되든, 대기업 사장이 되든 생명이 이윤보다 앞서야 한다는 가치관이 확립돼 있으면 지금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일은 사라질 거라 생각해요. 그럴 때 출신 지역이나 배경이나 학력이나 직업이 달라도 모두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될 수 있을 테고요.”

    - 한빛씨 가족들은 한빛센터를 세워 고인의 유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센터를 운영하며 어떤 보람을 느낍니까.

    “한빛이 죽음으로 고발함으로써, 오랜 시간 주목받지 못했던 방송·미디어노동 현장의 열악한 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방송 하면 화려한 이미지의 연예인만 떠올리던 시청자들이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됐어요. 비정규직 방송노동자들이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를 만드는 등 조직화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도 보람이고요. 한빛센터의 목표는 비정규직·프리랜서·일용직 등 모든 방송노동자가 근로계약서를 체결해 ‘노동자성’을 보장받는 겁니다.”

    - 힘든 점도 있을 텐데요.

    “가장 큰 문제는 재정입니다. 후원금으로 운영되는데, 후원할 만한 분들이 넉넉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라서요. 보상금과 기부금을 받은 후 청년유니온에 일부 기부하고, 나머지 금액은 모두 센터 설립에 쓰기로 가족회의에서 결정했습니다. 물론 곶감 빼먹듯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이번에 책을 쓰면 인세를 받아 조금 도움될까 했는데, 인세로 큰돈 모으는 게 쉽지 않다면서요?(웃음). 사무국장 1명만 상근이고, 3명은 공공상생연대기금 등에서 지원받아 고용하는데 1년 단위로 근무하다 떠나니까 업무의 연속성이 부족합니다. 이 기사 나간 뒤에 책도 많이 팔리고 후원자도 늘면 좋겠어요.”

    한빛센터는 21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제4회 6월민주상 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6월민주상은 2017년 6·10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해 제정된 상으로, 한국 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를 발굴해 시상해오고 있다.

    -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면 “남겨진 사람으로서,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나와 있어요. 어떤 일들을 시작하려 합니까.

    “여태까지는 제 슬픔에 겨워 못 일어났어요. 퇴직하기 전에는 학교 핑계도 댔고요. 지난해 8월 퇴직한 후 조금 헤매다가 올해 책이 나오면서 자기암시를 걸었어요. 그동안 저는 유가족이란 말을 안 썼습니다. 너무 슬프고 동정받는 것 같고, 피해자인 것 같아서요. 이제는 ‘유가족’이라는 정체성이 생겼습니다. 그러고보니 할 일도 많아졌고요. 일흔 살 될 때까지는 힘이 닿는 한 현장에 찾아가 연대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습니다. ‘말해 봤자 뭘 해’ 이런 생각은 더 이상 안 합니다. 무엇이든 제가 알릴 수 있는 만큼 알리고 싶습니다. 유가족이란 정체성을 갖는 건 동정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사회적 연대를 위해서입니다. 동료 시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더 좋은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싶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던 김혜영은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도고 집 텃밭에서 키운 채소가 담겨 있었다. 빛깔이 유난히 푸르렀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5220600025&code=940100#csidx96574bb64ff712b9bf7ca245a162b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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