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통합과 갈등 봉합,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가 필요로 하는 통합은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섞어찌개를 만들거나 비빔밥으로 적당히 흉내를 내는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국민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국민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무엇인지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 여망을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 있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가진 지도층이 형성되어야 의미있는 통합이 완성되는 것이죠.”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72)는 대통령 탄핵 이후 우리 사회에 필요한 통합에 대해 이같이 강조했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6년간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지낸 강 주교는 종교 지도자로서 사회적 약자를 보듬고 인권 가치를 수호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 1974년 사제가 된 뒤 1977년부터 21년간 서울대교구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을 보좌했던 강 주교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제주교구장을 맡고 있다. 12일 제주시 제주교구 주교관에서 강 주교를 만나 대통령 파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들었다.
- 촛불을 들고 일어선 국민들이 탄핵을 이끌어 낸 과정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국민들의 결집된 소망이 국회와 헌재를 움직였습니다. 8인의 헌법재판관 전원이 탄핵 인용으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한 것은 그만큼 온 국민이 마음을 쏟아부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대통령이 퇴진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장장 몇 년인가요.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56년입니다. 중간에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있긴 했지만 군사독재의 흐름과 거기에 바탕을 둔 정치적 사고와 가치관, 그 세력들이 지금껏 이어져 왔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그 흐름이 일단락지어지고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전환점이지요.”
- 그동안의 과정을 지켜보며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무엇입니까.
“대통령이 국가의 중대사를 개인적 친분 관계를 통해 사적으로 처리했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 제기도 못하고 있었느냐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너무나 터무니없는 비정상적 방법으로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동안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할 만한 보좌진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막지도 못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답답해요. 많은 국민들이 그동안 촛불집회 등을 통해서 ‘이게 나라냐’고 토로하고 외쳤는데 그 마음을 똑같이 느껴왔지요. 기막힌 현실이었습니다.”
- 탄핵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일부 비이성적인 행태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비이성적인 반응도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분들 중 상당수는 지난 5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박정희 체제에 대해 종교에 가까운 믿음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시절의 문화와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신앙처럼 가져온 체제와 세계가 무너지는 데 대한 충격이 저런 형태로 나타나는구나 싶어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역시 세월이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극단적 반응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잦아들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법조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보인 태도는 솔직히 지금도 잘 이해를 못하겠어요.”
- 일각에선 이런 문제가 노인 등 특정층에 대한 배제나 혐오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나옵니다.
“나이가 들면 사고가 경직되고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혁신이 어렵지요. 세계사를 살펴보면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20~30대에 일을 저질렀거든요. 나이가 들면 판단의 중용은 지켜질지 몰라도 혁신을 이루는 힘은 현저히 줄어듭니다. 보수화되는 것입니다. 지금 청년들 역시 앞으로 20, 30년 후면 그런 위치에 서게 될 테고요. 청년들은 그런 점에서 노년층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주면 좋겠습니다. 노년층 역시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행동을 일탈이라고, 대립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도가 혁신을 이루는 과정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 통합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두고도 논란이 많습니다.
“지난해 가을 이 사태가 벌어지면서부터 줄곧 걱정되고 신경이 쓰인 것은 이 정권이 무너진 이후의 모습입니다. 박근혜 정권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소위 정치꾼들의 정치공학적 타협과 작전, 각종 전술과 절충에 의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이지요. 국민들이 단결하고 힘을 모아 무너뜨린 불의한 정권 위에 다시금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정치체제가 들어선다면 국민의 수고는 무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4·19, 5·18, 6월항쟁 등은 다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의미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3차례 모두 어떠했나요. 일은 국민들이 다 해놓았는데도 나중에 엉뚱한 사람들이 숟가락만 들고 밥상을 차지한 식이 되고 말았지요. 저는 그게 제일 염려됩니다. 지금 통합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는데 마구잡이로 뒤섞는 식의 통합은 안됩니다. 가장 낮은 곳에 눈을 맞추는 가치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무조건적인 통합이라면 다시금 예전 상황의 반복일 뿐입니다.”
- 이제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습니다.
“앞으로 대선주자들은 저마다의 장밋빛 공약을 내놓고 비전들을 펼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혜를 모아야 하고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막연한 감성적 선택이 제일 위험합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사람인지, 그 가치를 좇으려는 의지가 있는지, 지난 삶에 그런 궤적이 있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합니다. 지금은 정보가 너무나 많이 넘쳐나고 그 중에는 가짜뉴스도 많아요. 때문에 국민들의 냉철한 판단력과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그 역할을 언론이 해줘야 하는데 한계도 있고 걱정이 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결국 시민들이 함께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흘러넘치는 정보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폭넓게 다양한 의견을 섭렵하고, 국민들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토론도 하고, 반대되는 의견도 들어보는 과정을 많이 가져야 할 겁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적으로 노력해야지요.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노년층은 아무래도 정보에 접근하는 방법도 부족하고 순발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노년 세대에게 이런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하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탄핵은 이뤄졌으나 세월호 유가족들의 상황은 변한 게 없습니다.
“헌재는 세월호 문제가 탄핵 사유로 부족하다고 했을지 몰라도 소수의견으로는 이 문제가 심각한 대통령직 수행의 결함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정권이 들어설지는 모르지만 하다가 말았던 세월호특조위는 재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하고 책임자를 밝혀내야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져야 유가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체 정치적 리더십의 질도 향상되리라고 봅니다. 수많은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의 최고 직무이자 사명입니다. 그것을 위중한 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엄청난 문제이죠. 이 사건을 통해 앞으로 국가 지도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지 대선주자들이 배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2014년 교황방한준비위원장을 맡았던 강 주교는 당시 세월호 유족들의 농성장 철거 움직임을 두고 “눈물 흘리는 사람을 내쫓고 성사를 거행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로 인해 교황과 세월호 유가족들이 만날 수 있었다.
- 한국 교회는 개혁의 대상으로 지적받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책무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종교는 이 세상만사 잡다한 일로부터 뚝 떨어져서 초연하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저는 종교의 역할은 이 세상이 바로 서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여러 존재들이 각 자리에 올바로 서서 잘 작동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이라면 무엇이 우선되는 가치인지 판단할 수 있는 영적인 식별력, 의지력, 행동력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상관없이 나 혼자 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은 개인적인 종교 심성에 불과합니다. 제가 믿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의미는 인간 한 사람이 가치와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면 이 세상에서 핍박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켜세우는 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이어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자 사명입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든 말든, 어떤 고통을 받든 나몰라라 하면서 세상과 떨어져 조용히 기도만 하겠다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은 직업으로 먹고사는 직업 종교인에 불과하지요.”
- 오늘은 어떤 강론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 대해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핍박을 받고 부활하는 사건에 대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의를 이루는 옳은 길을 위해 자신에게 닥칠 위험과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고 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 역시 시련에 굴하지 말고 올바른 것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습니다. 앞서 말했던 3차례의 역사적 경험을 되새겨 이번에는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된다고 말입니다. 신자들이라면 하느님이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노력을 쏟아붓자고 했습니다.”
- 제주 지역에서도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해 오셨습니다.
“이곳에 온 뒤에 가장 많은 마음을 써오고 있는 것은 4·3사건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누구나 알지만 아직도 다른 지역 국민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잘 모르고,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 큰 상처입니다. 그런 상처가 제주에서 있었다는 것을 우리 국민이 알아야 하고 객관적인 진실 규명이 더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동안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 이뤄졌고 보고서도 발표되었는데 이후 이 작업들은 위축되었고 거의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4·3사건은 한국 군대와 경찰, 서북청년단이 저질렀는데 그 사태를 일으킨 당시의 명령권자는 미군정이었습니다. 그 부분을 명확히 밝히고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재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2차례 미국에 가서 미국 학자들과 공동으로 학술교류와 포럼을 했고 국회의원들에게도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통해 미국 정부의 사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표인데 지난하고 긴 작업이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강정 문제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해 오셨습니다.
“사실 지난 10일 헌재의 탄핵 선고 발표 시간에 강정에서 회의를 하느라 생방송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반대했지만 결국 강정에는 해군기지가 완공되고 말았습니다. 평화는 절대 강력한 무력을 갖췄다고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강정기지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고 세상을 향해 호소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강정마을 한복판에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를 지었습니다. 그곳을 평화의 기지로 삼고 상징적인 평화의 터전이 되도록 뜻을 모아갈 계획입니다.”
강우일 주교는 소외된 이웃,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위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내온 종교계의 대표적 인사다. 일본 도쿄 조치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4년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 1986년 주교서품을 받은 뒤 서울대교구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보좌했고 총대리주교를 맡았다. 1995년에는 가톨릭대 초대 총장에 선임됐으며 2002년 제주교구장에 부임했다. 한국 천주교 대표인 주교회의 의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4대강 사업,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밀양 송전탑 건설 등을 비판하고 반대해 왔다. 특히 강 주교는 제주에 부임한 뒤 4·3사건의 진상 규명 작업도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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