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든 지성이 아빠, 문종택(55)씨. ⓒ 정대희
"세월호 사고는 참혹하기 그지없으나, 세월호 참사 당일 피청구인이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는지 여부는 탄핵심판절차의 판단대상이 되지 아니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처참한 얼굴을 떠올렸다. 지난 10일 헌법재판소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이 탄핵심판 선고문을 읽을 때였다. 바로 전날, 세월호를 인양해 조사 작업을 벌일 목포신항에서 그가 한 말도 스쳤다.
"이 녹슨 철망에 박근혜를 매달고 싶습니다."
맹골수도에서 세월호를 꺼내면 거치할 장소를 그가 먼저 밟았다. 목포신항이다. 여기서 인양작업이 시작되면, 차디찬 물속에 잠겼던 세월호 주변에 컨테이너 박스 40개가 들어온다. 유가족이 드나들 문은 목포신항만 건물에서 100여m 떨어진 옆문이다. 부둣가와 신항로 294번길 사이로 약1km 녹슨 철망문 위아래로 등군 가시철망이 지나갔다.
"선체 청소만 3개월이 걸린답니다. 그 뒤에 세월호 선체 조사 작업을 할 겁니다. 유가족들도 슬퍼하겠죠. 세월호의 진실을 박근혜가 직접 보아야 합니다. (철망을 손가락으로 굳게 부여잡으며) 여기 매달린 채."
지금부터 쓸 글은 아주 특별한 방송인과의 동행취재 기록이다. 3년 전 안산 단원고 2학년 1반이었던 문지성 학생의 아빠 문종택씨(55). 416TV 방송팀장인 그를 이날 오전 9시20분경 4호선 초지역에서 만났다. 그는 기자증이 아니라 지성이 명찰과 학생증을 목에 걸고 나왔다. 416TV 취재차량을 타고 16시간 동안 목포신항과 팽목항, 안산 세월호 분향소에 동행했다. 우리는 우선 목포신항으로 향했다.
[생중계] 그의 카메라는 운다
- ▲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든 지성이 아빠, 문종택(55)씨 ⓒ 정대희
지성이 아빠는 목포신항 사무소와 세월호 인양터가 보이는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트렁크에서 사다리를 꺼낸 그는 검은색 카니발 차 지붕 위로 올라갔다. 카메라가 달린 삼각대를 그 위에 펴고 노트북을 켰다. 20여 분간 차 지붕 위에서 작업을 하던 그는 카메라 위에 스마트폰을 장착한 뒤에 416TV 유튜브 채널과 페이스북으로 동시 생중계를 시작했다.
"생명을 찾아서 진실을 규명해야지요.(중략) 탄핵 촛불이 아니라 인양의 촛불, 생명의 촛불을 지켜주십시오. 목포신항에서 416TV 지성이 아빠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는 15분 만에 생중계를 마쳤다. 직전에 목포신항에서 취재한 정보와 목포신항 찾아오는 길을 설명했다. 삼각대 중간에 단 노란 리본이 세찬 바람에 펄럭였다. 지붕 위의 노트북도 위태롭게 들썩였다. 대본은 없었다. 그는 목이 메어 침묵했다가 다시 말을 잇곤 했다. 어떤 대목에서는 목에 힘줄이 섰다. 그게 칼날처럼 느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3년 동안 벼리고 벼렸다.
- 오늘 왜 이곳에 왔나?
"세월호가 인양되면 이곳에 거치한다. 유가족들이 어떻게 찾아올 수 있는지, 컨테이너 박스를 어디에 설치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고 왔다. 일종의 내비게이션 방송이다."
여느 방송과 너무 달랐다. 기존 언론이 생중계할 때에는 방송차, 중계차와 기자들로 북적거리지만 그는 혼자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와서 카메라를 돌렸다. 그의 말은 전문 앵커처럼 유창하지 않았다. 방송용 멘트라기보다는 한이 서린 독백 같았다. 어떤 때는 소름이 돋았다. 그가 아니라 딸 지성이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 카메라를 왜 들었나?
"2014년 국회에서 단식할 때 여당 의원들은 우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세금도둑, 시체장사'라고 말하면서 가슴에 대못만 박았다. 그런데 방송사 카메라만 들이대면 표정이 바뀌었다. 공손해졌다. 그때부터 우리도 카메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하무인인 저들을 겁먹게 할 도구였다. 또 '기레기'들은 세월호를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가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는 그와 유가족들의 무기였다. 그는 "상대방은 나의 육두문자보다 카메라를 더 의식했다"면서 "현장에서 생중계를 중단하고 경찰의 채증 카메라를 막으려고 삼각대를 휘저으면서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다용도 무기였다.
- 험한 취재도 많았을 것 같다.
"백남기 어르신이 쓰러졌을 때 나는 반대편 차선에서 그 모습을 찍었다. 집사람이 장롱면허인데, 똥줄이 타니까 운전대를 잡았다. 차벽 코앞에서 카메라를 돌리고 있는데, 깨진 대리석이 날아왔다. 선루프가 깨졌다. 그걸 맞았다면? 카메라는 경찰이 쏜 캅사이신으로 범벅이 됐다."
- 첫 방송은 언제 했나?
"2014년 8월8일 국회에서 했다. 카메라와 노트북 한 대, 건전지 여분도 없었다. 와이어리스는 1인 미디어인 미디어몽구가 줬다. 첫 방송 때 '우리는 방송이 아닙니다. 가족의 이야기이고 눈물입니다'라고 말했다. 대놓고 욕을 하다가 울컥해서 말문이 막히면 가족들이 국회에 세워놓은 노란 우산을 수십 번 비췄다. 유가족들은 그걸 보고 또 울었다."
그와 유가족들만 운 것은 아니었다.
"카메라가 자꾸 울어요. 맹골도 사고 현장에서 배를 타고 나오는데, 카메라 후드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를 따라 나도 울었어요. 동거차도에서 어민들을 만나 사고 당일의 증언을 담을 때도 카메라가 울었어요. 몇날 며칠이고 카메라와 함께 울었어요. 카메라가 유가족들에게 약이 되고 피로회복제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어떤 현장을 비춰도 엄마아빠들은 웁니다."
그와 카메라는 울면서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담고, 세월호 진실의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편집] 몇날 며칠이고 코피를 쏟다
- ▲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손에 든 지성이 아빠, 문종택(55)씨. ⓒ 정대희
그는 어깨 너머로 방송을 배웠다. 고등학교 때 보도부장이었던 그는 니콘 카메라 조작법을 배웠지만 캠코더를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416기억저장소 김종천 사무국장이 카메라를 주었고, 그에게서 기초적인 편집 기술을 배웠다. 뉴스타파와 미디어몽구 등 현장에서 만난 대안 언론사 기자들에게 물어보면서 한 가지씩 기술을 익혔다.
그렇게 만든 방송영상 목록은 500편이 넘는다. 바이러스로 날아간 14테라바이트(TB)를 빼고도 15테라바이트 정도 남아있단다.
"나는 지금 지성이의 몫을 살고 있어요. 제가 찍은 영상은 지성이의 남은 삶입니다."
현장에서 3~4시간 생중계한 것을 5분짜리 영상으로 편집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6시간. 초기에는 일주일에 팽목항을 3~4번 왕복하면서 취재했다. 매일 밤늦은 시간에 안산 분향소 옆에 있는 416TV 컨테이너 박스에 도착해서 영상편집을 하다가 밤을 새운 날도 많았다. 코에서 무언가 흘러내려서 손으로 씻었더니 시뻘건 피였단다. 몇날 며칠이고 코피를 쏟은 적도 있는데, 지금은 나아졌단다.
"남은 아이들 4명이 딱 한번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우리는 자식이 아니냐'고요. 하지만 카메라를 멈출 수 없었어요."
- 많은 사람들이 생중계를 시청하나?
"기자회견을 할 때는 200~300명 정도. 세월호 청문회 때에 가장 많이 봤는데 몇 만 명 정도였다. 개떡 같았던 청문회였다. 사실 시청자 수를 확인할 겨를도 없고 중요하지 않다. 행사 때 유가족으로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혼자 카메라 들고, 멘트 하고, 컴퓨터 확인하고... 때론 울다가 말문이 막히고. 그럴 때에는 시청자들이 대신 댓글로 말을 해준다. '지성이 아빠, 또 울어요.' '아스팔트에 떨어진 가족들의 눈물을 보십시오.'"
- 언제 가장 힘들었나?
"지금도 힘이 든다."
- 언제 가장 기뻤나?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다. 국회 앞에서 세월호 엄마아빠들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을 담았다. 카메라를 돌리면서 나도 눈물을 흘렸다. 뭔가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루도 안 갔다. 탄핵 이슈에 세월호가 묻히는 것 같았다."
[아, 지성아!] 0.7초 영상
- ▲ 진도 팽목항 ⓒ 정대희
- 지성이와의 마지막 순간은?
"난 확신한다. 맹골수도는 100% 학살현장이다. 진실은 이미 규명됐다. 저들이 인정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날 오전 9시4분에 지성이와 통화했다. 친구 핸드폰을 빌려서 전화했다. 3-4분정도 통화한 것 같다. 아이와 통화하면서 나는 2번이나 세월호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을 들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 사실 나도 한편으로는 안심했다(한동안 침묵)."
다음은 지성이 아빠가 전한 마지막 대화의 순간이다.
마지막 대화 |
"아빠, 배가 기우는 데 어떻게 해요?" "침착해라. 구명조끼를 입었니?" "예." "아빠와 또 전화를 할 수도 있으니 통화가 끝난 뒤 핸드폰은 과자봉지에라도 넣어둬라. 네 옆에 창문이 있니? 그걸 깨야한다." "창문 없어요." "비상구가 있니?" "아빠, 갈 수가 없어. 배가 기울어서 그쪽으로 갈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던지 당장 나와야 한다." 그게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
"환장하겠더라고요. 미치겠더라고요. 나중에 나와 통화한 친구의 핸드폰을 찾았어요. 거기에 지성이 영상이 0.7초 남아 있었어요. '아빠하고 통화하려고 하는데 핸드폰을 빌려주면 안 돼?' 45도쯤 기울어진 상태로 누워서 친구에게 말하는 장면입니다(한동안 침묵)."
지성이는 초기 생존자 명단에 있었다. 그는 아이를 데려오려고 이불과 새 옷을 사갔단다. 하지만 팽목항에서 지성이를 찾을 수 없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잘못된 발표였다. 2주 뒤인 4월 30일에 사고해역 인근에서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발견됐다.
하지만 그가 생중계하는 핸드폰 초기 액정화면엔 지성이가 살아있다. 장미꽃 향기를 맡으려고 허리를 숙인 모습이다. 그의 핸드폰은 매일 오후 4시16분에 운다. 그 알람소리는 '진실의 벨'이란다.
[나는 분노한다] "야, 오늘 우는 장면이 없네"
- ▲ 진도 팽목항에서 현장 생중계를 하고 있는 지성이 아빠, 문종택(55)씨. ⓒ 정대희
"특공대 중의 특공대를 투입시켜서 한명이라도 구해주세요."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수색상황 알 수 있게 스크린 설치해준다고 약속했는데, 스크린이 설치됐냐'고만 물었단다. 그는 "결국 자기 자랑질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라고 말했다.
- 박 전 대통령이 왜 지금까지 세월호 7시간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고 보나?
"인간이 아닌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당시에는 머리를 말아 올리든, 화장실을 가든... 자기의 행동 모두가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 헌재의 탄핵 판결이 내일(10일)이다. 어떻게 될 것 같나?
"탄핵된다. 세월호 참사만으로도 탄핵 사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촛불이 잦아들까 걱정이다."
- 탄핵된 박근혜씨를 만나면 방송인으로서 꼭 묻고 싶은 말은?
"내가 그날(세월호 참사 다음날) 당신에게 '한 명이라도 구해 달라'고 부탁한 말을 기억하나? 그래서 한 명이라도 구했나? 한 명이라도 구하라고 명령이라도 했는가? 예, 아니오라는 단답형으로 묻고 싶다. 여성의 사생활... 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
팽목항에서의 생중계를 마친 뒤 오후 7시경,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주유소에 멈췄다. 차량에 붙어 있는 '416TV 방송'이라는 스티커를 본 직원은 "박근혜는 혀 깨물고 죽어야지... 세월호 참사 때 한 일을 보면 인간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고맙다"고 머리를 숙였다.
다음날 새벽 1시경에 안산 세월호 분향소 옆의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갔다. 416TV 방송국이다. 지성이 아빠가 컴퓨터를 켜자 '띠릉~ 띠릉~' 경고음이 세 번 울리면서 컴퓨터 에 이런 경고문이 떴다.
'원치 않는 의심스러운 프로그램을 발견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현상이 잦아졌단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집요하게 그의 컴퓨터를 뒤지고 있다는 찜찜함. 그는 "전에도 이상한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데이터를 날렸는데, 내일 박근혜가 탄핵되면 컴퓨터를 켤 때마다 이런 기분 나쁜 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1인 미디어] '기레기 언론'과 맞짱
- ▲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든 지성이 아빠, 문종택씨. 그의 목에는 기자증이 아니라 딸의 학생증이 걸려있다. ⓒ 정대희
그와 헤어질 때 <오마이뉴스> 메인 면에 걸린 탄핵 시계는 '남은 시간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오전 11시 20분경, 헌재는 세월호를 포함시키지는 않았지만 박 대통령을 탄핵했다. 민간인 신분인 박씨는 청와대에서 쫓겨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지성이 아빠도 이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오늘도 차 지붕 위에서 울고 있는 카메라. 노란리본이 달린 그의 카메라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무기다.
"내가 카메라를 든 것은 '시체 장사'라고 떠벌이는 종편 때문이었어요. 지상파도 마찬가지지요. 특별조사위원회 전원회의를 할 때였습니다. 카메라 기자들이 자기들끼리 말하더라고요. '야, 오늘은 우는 장면이 없네' '싸우지도 않는데 그냥 가자'. 화가 치밀어서 소리쳤어요. '당신들 말 한마디로 수백 명의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제가 아는 언론권력은 대통령 위에 있습니다. 언론이 제대로만 보도한다면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어요. 언론권력은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깰 수 있습니다."
그는 지난 3년간 안산에서 팽목항까지 408km 거리를 100번 정도 왕복했다고 한다. 휴게소에 들러 밥을 먹을 때도 그는 한 손에는 밥공기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운전할 때 들어온 유가족들의 카톡을 확인하고 취재 일정과 노선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이다.
새벽 1시 30분경, 16시간의 동행취재를 마친 그는 <오마이뉴스> 취재진을 배웅한 뒤 안산 세월호 분향소의 컨테이너 박스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이정미 헌재 소장 권한대행이 박근혜를 탄핵한 그날 오전 11시경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생중계를 했다. 나중에 편집된 영상의 제일 뒷부분에는 그의 자작곡을 실었다.
'탄핵은 끝났지만 세월호 촛불을 끝까지 지켜 달라.'
1인 미디어인 그는 이렇게 '기레기 언론권력'과 맞짱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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