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카메라 노출계'로 주변을 본다
피토크롬 단백질로 주변의 빛 감지, 구불구불 유연하게 자라
빛을 가릴 상대 있으면 성장 멈추고, 두 나무가 '혼인목' 이루기도
» 방해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란 비술나무.
» 어릴 때 주변 계수나무에 치어 분재처럼 이리저리 굽어 자란 비술나무.
무슨 나무일까? 이 나무는 상처 난 곳에서 하얗게 수액이 흐르는 모습이 비가 술술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해서 ‘비술나무’라 부른다. 위와 아래 사진의 비술나무는 모두 같은 나무임에도 자라는 모습은 확연히 다른 나무처럼 보인다.
이유는 이렇다. 위 사진의 비술나무는 주변에 자신의 생장에 방해가 되는 나무가 없어 자기 마음대로 고유의 형질대로 자랄 수 있었다. 반면 아래 비술나무는 주변 계수나무에 갇혀 어릴 때 많은 방해를 받고 자랐다.
생존에 필요한 빛을 찾기 위해 가지를 이쪽저쪽으로 뻗어 헤매다가 결국 요가를 하듯 줄기와 가지가 비정상적으로 비틀어졌다. 마치 분재처럼 자라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래 사진의 비술나무는 자신의 주변에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혹시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사람들 몰래 줄기에서 손을 꺼내어 주변을 더듬어 보는 것은 아닐까?
그 비밀은 식물이 카메라에서 빛을 감지하는 노출계처럼 주변의 빛을 감지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바로 피토크롬(phytochrome)이다.
피토크롬은 식물이 지닌 단백질 색소의 하나로 빛의 유무, 일조시간, 빛의 특성에 따라 식물의 성장이나 발육 등 식물 전체의 생리작용을 조절한다. 피토크롬이 식물의 생장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예를 들어 살펴보자.
» 두 나무가 인접해 한 나무처럼 자란 구상나무 '혼인목'.
» 다른 각도에서 보면 두 나무임이 분명해 보인다.
위 사진 속 나무는 국립수목원 전시원에 식재되어 있는 구상나무이다. 멀리서 보면 위쪽 사진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이지만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보면 구상나무 두 그루가 합쳐져 있는 형태로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그루의 나무가 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두 나무가 결혼했다고 해서 혼인목이라 부른다.
혼인목은 피토크롬의 기능에 의해 서로가 마주보는 방향으로는 가지를 뻗지 않고 장애물이 없는 쪽으로만 가지를 뻗어 자란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힘을 합쳐 살아가듯 혼인목도 두 나무가 서로 상대방을 보호해 주며 살아간다.
이렇게 두 나무가 어우러져 부부처럼 함께 살아가다 인위적으로 한쪽 나무를 베거나 옮기게 되면 홀로 남은 나무는 홀아비나 과부처럼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 없게 된다. 숲은 이렇게 나무와 동․식물이 수많은 혼인목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숲 공동체 생활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식물의 눈인 피토크롬이다.
» 의지해 자라던 혼인목이 태풍에 쓰러진 뒤 균형을 잃은 향나무.
위 사진 속에 나무는 국립수목원 양치식물원에 식재된 향나무인데 지난해 태풍의 피해를 입어 혼인목의 형태를 잃게 되었다. 빨간색 원 부분에 다른 향나무가 식재되어 있었는데 태풍피해로 쓰러져 베어냈다.
지금 살아남은 향나무는 이전에는 혼인목 형태로 잘 자랐지만 지금은 파란 타원형 안에 보듯이 가지도 없고 휑하니 빈 공간으로 남게 되었고 무게 중심을 잃지 않게 지지대를 의지하고 있다.
소나무 같은 침엽수는 빛이 적은 곳으로는 가지를 뻗지 않고 빛이 많은 곳으로만 가지를 뻗지만 대부분의 활엽수는 무조건 가지를 뻗은 뒤 빛을 찾아 이리저리로 휘어지는 성질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회화나무, 느티나무, 풍게나무, 귀룽나무 등인데, 이들은 가지를 뻗어 자라다가 장해물을 만나면 이리저리 장해물을 피해서 휘어 자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무에 따라서 빛에 반응하는 정도는 모두 다른데 피토크롬이 제일 발달되어 있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배롱나무다.
» 빛을 찾아 이리저리 휘어지며 자란 배롱나무.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배롱나무는 빛을 찾아 새싹을 뻗다가 주변의 다른 가지나 다른 나무를 만나면 정아를 버리고 측아로 자라 주위의 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유연할 수 있는 비결은 피토크롬을 이용해 겨울눈의 정아와 측아 성장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 빛을 고르게 받아 사방에 헛꽃을 피운 백당나무.
» 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헛꽃을 피우지 않은 백당나무.
백당나무와 산수국은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헛꽃을 만든다. 식물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절반 이상을 쓰는 아주 어려운 생리작용이기 때문에 백당나무와 산수국은 다른 잎에 가려 곤충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에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헛꽃을 피우지 않는다.
» 주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아 사방으로 헛꽃이 핀 산수국.
» 나뭇잎에 가린 곳에는 헛꽃이 피지 않았다.
그곳에서 낭비되는 에너지를 아껴서 꼭 필요한 다른 곳으로 보내주려는 생존전략이다. 백당나무와 산수국 사진을 보면 나뭇잎이 가리지 않은 곳에선 헛꽃을 가득 만든 반면 꽃이 나뭇잎에 가려진 부분에는 헛꽃을 만들지 않았다.
» 마치 가지 끝에 눈이 있는 것처럼 다른 가지가 있는 곳을 피해 자란 구실잣밤나무.
위 사진은 제주 돈내코 계곡에서 담은 구실잣밤나무를 하늘 방향으로 촬영한 모습이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을 때 다른 가지와 닿는 곳을 따라 숲 틈이 생겼다. 구실잣밤나무가 자신의 곁에 다른 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더는 주변으로 가지를 성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물들도 생존 경쟁을 위해 많은 전략을 가지고 있다.
■ 참고문헌:
이경준. 1993 수목생리학
남효창. 2008 나무와 숲
강혜순. 2002 꽃의 제국
이나가키 히데히로. 2006 풀들의 전략
글·사진 양형호/ 국립수목원 산림자원보존과 현장전문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