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본을 순방 중인 재미동포 신은미 씨가 가나가와의 조선학교를 방문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
“여러분들이 통일조국의 미래이며 희망입니다.” “우리학교는 우리민족의 재산이며 보물입니다.”
가나가와의 조선학교를 방문한 신은미 선생은 이렇게 아이들을 소리높이 축복한다.
이곳을 방문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가슴설레며 찾은 조선학교는 그에겐 벌써 남의 집 아이들이 다니는 낯선 학교가 아니다.
조선학교는 일제시대 강제로 끌려오거나 고향땅에서 살길을 잃어 일본으로 건너와 망향의 슬픔을 안고 살게 된 동포들이 광복을 맞아 해방된 민족의 자랑을 안고 자녀들을 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하여 시작한 학교이다.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어,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어,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어”란 구호 밑에 먹지도 입지도 못한, 제집 하나 구하기도 힘든 가난하고 어려운 경황을 이겨내며 온갖 힘을 모아 우리동포들이 시작한 민족교육인 것이다.
사실 일본에 사는데 민족교육이 왠소리냐는 동포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조선학교를 졸업했다 한들 일본대학으로의 진학도, 일본기업으로의 취직도 가망이 있다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동포들은 해방된 조국으로의 귀국을 그리며, 광복의 기쁨과 민족의 존엄을 안고 살아 갈 일념으로 우리의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가나가와의 조선학교도 그런 전국에 있는 학교들 중의 하나이다.
재일동포들은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일본의 방방곡곡에서 우리말, 우리글,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민족문화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 학교들은 거의 다 동포들의 경제적 상황을 나타내는 듯 초창기에는 작은 오두막집을 구하거나 빌려쓰면서 교육을 실시해야만 했다.
조선학교는 동포들이 한푼두푼 모아가며 점차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지만 1948년 봄일본 경관대가 일본 전국의 학교에 단숨에 쳐들어와 교사들을 체포하고 아이들을 몰아내 학교를 폐쇄까지 시켜버렸다. 이에 저항하여 일본 방방곡곡에서 항의투쟁이 일어났는데 나어린 김태일이라는 소년이 무고하게도 경관놈의 총에 맞아 희생되기도 하였다.
| | |
▲ 학생들과의 기념촬영.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
재일동포 시인 허남기 선생은 이런 시를 남기셨다.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 학교다 교사는 아직 초라하고 교실은 단 하나 뿐이고 책상은 너희들이 마음 놓고 기대노라면 삑하고 금시라도 찌그러질 것 같은 소리를 내고
문창엔 유리 한 장 넣지를 못해서 긴 겨울엔 사방에서 살을 베는 찬바람이 그 틈으로 새여들어 너희들의 앵두같은 두 뺨을 푸르게 하고
그리고 비오는 날엔 비가 눈내리는 날엔 눈이 또 1948년 춘삼월엔 때아닌 모진 바람이 이 창을 들쳐 너희들의 책을 적시고 뺨을 때리고 심지어는 공부까지 못하게 하려들고 그리고 두루 살펴보면 백이 백가지 무엇하나 눈물 자아내지 않는 것이 없는 우리 학교로구나
허나 아이들아 너희들은 니혼노 각고오요리 이이데스(일본학교보다 좋아요)하고 서투른 조선말로 - 우리도 앞으로 일본학교보다 몇 배나 더 큰 집 지을 수 있잖느냐고 되려 이 눈물 많은 선생을 달래고 그리고 또 오늘도 가방메고 씩씩하게 이 학교를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아 이것이 우리학교다 비록 교사는 빈약하고 작고 큼직한 미끄럼타기 그네 하나 달지 못해서 너희들 놀 곳도 없는 구차한 학교지마는 아이들아 이것이 단 하나 조국 떠나 수만리 이역에서 나서자란 너희들에게 다시 조국을 배우게 하는 단 하나의 우리학교다 아아 우리 어린 동지들아.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우리 재일 동포들의 고국으로의 길은 아득한 희망으로만 되어 버렸고 재일동포들의 생활도 귀국 지향으로부터 영주 지향으로 시대를 따라 변해간다.
북 정부는 해외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재일동포들의 어려움을 알고 국가예산에 계상시켜 1957년부터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뿐이랴. 교육에 필요하는 수많은 교재와 자료들, 민족악기등 액수로 다 따질 수 없는 막대한 지원을 일본의 조선학교에 60년 가까운 동안 지속적으로 실시해왔다.
남쪽 정부의 무관심과 대조적인 북쪽 정부의 결단을 재일동포들이 받아안게된 그때로부터 민족교육은 남쪽에서 빨갱이 교육시키는 학교로 단정되고 만다. 그리고 “일본 가서 우리말 하는 젊은이 보면 빨갱이, 못하는 애들은 반쪽발이”란 모멸에 넘친 딱지도 덧붙여졌다.
뿐만이니라 남쪽 정부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러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조선학교를 철폐시키기 위한 ‘외국인학교법안’을 일본 국회에 여러 번 상정시켜 조선학교 말살까지 기도해 나선 것이었다.
모진 비바람을 이겨냈고 우리 민족의 미래이며 희망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동포들은 안간힘을 다하며 어언 70년 동안을 목숨걸고 싸우며 지켜왔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우리학교를 신은미 선생이 뜨거운 정을 안고 찾아 온 것이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학생이 꽃다발을 안고 신은미 선생 일행을 환영한다. “우리학교에 잘 오셨습니다.” 여학생이 전하는 꽃묶음을 안고 그녀가 만면의 웃음을 띄우며 꽃보다 더 환하게 웃는다.
교직원에게서 학교 연혁에 대하여 듣고 난 뒤, 어머니회(학교를 지원하기 위하여 무어진 어머니들의 모임) 대표가 이렇게 이야기를 잇는다.
“우리학교는 아이들을 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학교입니다. 아이들을 참된 조선사람으로키우기 위해서 집에서 가깝고 돈 안드는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떨어진 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배우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민족교육을 지켜야만 우리는 아이들을 조선사람으로 키울 수 있습니다.”
신은미 선생은 “바로 그런 마음이 일본이란 어려운 환경에서 재일동포 사회를 지켜 온 힘이된 것이지요. 여러분들 정말 훌륭합니다. 비록 저희는 함께 못 했지만 여러분들을 존경하며 감사드립니다”라고 전한다.
| | |
▲ 교실에서 학생들과의 만남 시간.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
교실에선 오후수업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들어서니 국어 수업을 하던 중이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나냐줄을 배우며 따라 읽는다. “나냐너녀노뇨누뉴느니”
그전에 배운 가갸줄과 합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읽어 주는 대로 따라쓰라 지시한다. “누가, 누구, 누나…” 선생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이 신은미 선생을 <인사>란 노래를 부르며 환영한다. 가수 신은미 선생이 이에 답하는 듯 또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니 아이들이 그녀의 곁으로 뛰어와서 동그랗게 원을 그리면서 같이 노래를 부른다. 맑은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아이들은 4세, 5세뿐만 아니라 6세도 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빠,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등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몇마디 우리말 외에는 거의 몰랐던 애들이다. 그들이 신은미라는 미국에서 온 아줌마랑 마음을 하나로 하여 즐겁게 우리말로 노래를 부른다. 차고 넘치는 정이 물결이 되어 우리 모두의 마음을 휩쓴다.
중고등학교 교사를 돌아보고 난 뒤, 중고등학생들과의 교류모임에 나선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한 후에 내형제 빛나는 두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내형제 그리운 얼굴들 그 아픈 추억도 아 짧았던 내 젊음도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학생들은 이 노래로 신 선생 내외를 환영한다. 한갓 희망이 되어 노래 가사가 우리 모두의 마음에 와닿는다.
학생들 앞에 나선 그녀는 그녀의 사랑과 감사의 정이 담겨진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전하면서 온세상 어디를 다녀도 이렇게 훌륭한 민족교육을 하는 것은 재일동포들 뿐이라면서 훌륭한 우리의학교도, 훌륭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는 없다는 것. 여기서 열심히 배워서 통일조국을 더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한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고 당부한다.
그녀가 북에서 찍은 사진들을 학생들에게 보이면서 전하는 북의 모습은 평범하고 순진한, 색칠도 꾸밈도 없는 민중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전하려 한 그녀는 고국에서 쫓겨나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떤 학생이 질문을 한다. “선생님께서 오신다고 인터넷에서 검색을 걸어봤는데 보니까 선생님에게 종북주의자란 딱지가 발라지시면서 어머님께서 서로 보지 않고 지내자고 하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님과의 사이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어린 학생이 신 선생의 마음의 상처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녀가 “그 뒤에 어머님께서 미국으로 오실 기회가 있으셨어요. 그래서 어머님께 사실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내 심정에 대해서, 왜 내가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말씀드렸지요. 이 다음엔 일본 가서 조선학교를 방문할 것이고 많은 동포들, 학생들을 만나겠다고도 말씀드렸어요” 이렇게 답하니 학생은 몹시 마음이 놓였다는 듯 자리에 앉는다.
불신과 오해는 서로 등치고 미워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재일동포들이 안은 불행의 근본은 앞길이 보이지 않은 이별이며 이산이다. 그 때문에 쌓여진 불신과 오해는 그림자가 되어 70년 이상의 역사로 쌓여져 동포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불화를 걱정하는 학생의 마음이 나도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바로 이렇게 누구를 걱정하고 누구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고 나누려하는 곳이 우리학교인 것이다.
학교에서의 교직원, 학생들과의 시간은 끝나가려 한다. 작별을 알리는 듯 비가 오기 시작한다.
| | |
▲ 가나가와현 동포들과 6.15공동선언 15주년 기념 통일토크 콘서트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
저녁에는 가나가와현 동포들을 위한 강연회가 준비되었다. 그 전날 도쿄에서 200명의 청중들로 치러진 6.15행사와 신은미 선생 강연회도 대절찬이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고 있다.
청중들 속에는 오후에 방문한 조선학교 교원, 중고등학생들, 학부모들도 보인다. 회장 정면에는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 기념 통일토크콘서트 - 재미동포 아줌마 가나가와에 오다’라 크게 적혀져 있다.
그녀는 먼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렇게 동포사회와 조선학교를 발전시키며 지켜온 동포들에 대한 감사의 정부터 전한다. 북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 사연으로부터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북의 인상이며 가서 보고들은 이야기, 진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말한마디 잘못하거나 되는 대로 말을 하면 수용소로 끌려가는 줄로만 알고 있던 그녀가 남편과 함께 평양에서 함경북도의 시골까지 다니면서, 가는 곳곳마마다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을 주고받으며 나눈 이야기며, 경치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모습들이 사진과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진다.
얘기하다 그녀는 갑자기 <성불사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성불사로 가서 이렇게 저도모르게 이 노래를 불렀어요” 노래부르면서 이 노래가 친일 작곡가 홍난파의 노래라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 “어머! 수용소로 가야 되나?” 했었는데 난데없이 스님이 나타나셔서 같이 부르자고 하셨다 한다. 그녀는 1절을 겨우 기억할 정도였는데 스님이 3절까지 또록또록 부르신 모습을 보고 여기서도 오래 안고있던 인상이 깨뜨려진다.
군인이 데이트하는 모습, 젊은이들이 서로 팔짱끼며, 손잡으며 거리를 다니는 모습도 그녀의 인상 속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던 것이다. “북에선 젊은 사람들이 데이트한다 생각도 못 했었죠. 애인들끼리 집안에서 만난다 생각했어요.”
어떤 남자가 아이를 업고 무거운 짐을 든 제 아내를 도와줄 생각도 없이 뒷짐지며 걸어가는 사진을 소개하면서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북은 봉건주의 퇴치하자는 나라잖아요”하면서 청중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 | |
▲ 신은미 씨는 평범한 한 여성의 눈으로 북한을 다녀온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사진 - 통일뉴스 배안 통신원] |
그녀의 이야기는 정치적이지도 더군다나 그녀가 신앙하는 종교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평범한 한 여성이 북으로 가서 제 눈으로 보며 느낀 바를 글에 담아 펴내며, 보고 만나는 사람들마다에 전해주는 그 이상도 그 이하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동포들은 그런 그녀에게서 왜곡되며 잘못 전해진 북쪽 조국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회장으로 모인 것이다.
고명한 학자나 정치가나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아줌마의 평범한 북행 이야기는 평범한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통일에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복하고 반가운 만남은 막을 내리려 한다. <우리의 소원>이 장내에 울려 펴진다.
요코하마의 칠흑의 밤에 한줄기 빛을 맞아 우리는 서로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꼭 맑은 새벽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아침해를 볼 것이라고. 우리는 꼭 하나가 될 것이라고.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