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2월 5일, 특전사 대원 47명과 공군 6명 등 53명의 군인이 사망했습니다. 53명의 군인이 사망하고도 3일이 지난 뒤에야 언론은 ‘대침투작전 훈련 중 악천후로 인한 추락 사고’라고 보도했습니다.
‘5일 오후 3시경 제주도에서 작전 중이던 군용기 1대가 추락, 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53명의 군장병이 모두 숨졌다고 국방부가 6일 저녁 발표했다. 이 군용기는 대침투작전훈련이었으며 사고원인은 악천후로 인한 추락으로 일단 보고 있다. 군당국은 6일 오후 4시경 한라산 정상북방근처에서 기체잔해를 발견, 탑승장병들은 모두 순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공군 C123수송기 추락사고로 순진 육군장병 47명과 공군소속 승무원 6명 등 53명의 사망자명단은 군 사정에 의해 발표하지 않고 유가족에게만 통보한 것으로 8일 알려졌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특전사 대원들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까지 가서 ‘대침투작전 훈련’을 하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왜 특전사 대원들은 꼭 제주까지 가야만 했을까요?
“전두환을 경호하기 위한 ‘봉황새 작전’이 대침투작전훈련으로”
1982년 2월 6일 전두환은 제주국제공항 확장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청와대는 전두환의 경호를 위해 특전사 요원 450명을 제주도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청와대의 명령에 따라 특전사 대원을 태운 세 대의 C123 수송기가 제주로 향했고, 이 중 한 대가 한라산에 추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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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 특전사령관은 1982년 2월 6일 오전 8시 45분 김두청 707대대장에게 훈련 명칭 변경 메시지를 보내, ‘봉황새 작전’을 대간첩 침투작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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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도 특전사령관은 사고 다음날 ‘동계특별훈련’으로 훈련 명칭을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전두환의 경호를 위한 ‘봉황새 작’이 ‘대침투 작전’으로 바뀐 것입니다.1
전두환은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1공수특전여단과 3공수,5공수특전여단을 동원해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공수부대를 투입해 유혈진압을 합니다.
특전사라는 막강한 군 전력을 자신의 사병처럼 사용했습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야 하는 특전사가 전두환을 지키려다가 고귀한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시신과 함께 지내야만 했던 유족들’
100일 위령제를 위해 특전사 대원과 공군 53명이 숨진 한라산 사고 현장을 찾은 유족들은 너무나 황당했습니다. 100일이 지났는데도 사고 현장에는 사고 잔해가 그대로 있었고, 53명 시신을 모두 수습했다는 군의 발표와 다르게 시신 더미가 무려 3포대나 나왔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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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5월 15일, C-123 공군수송기 추락 사고 현장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들이 어지러이 널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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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은 사고 현장에서 찾은 시신더미 세 포대를 들고 서울로 향하려고 했지만, 군인들의 방해로 제주의 호텔에 감금됐습니다. 1주일 동안 시신이 썩어가는 냄새를 맡으며 버텼던 유족들에게 남은 것은 남편과 자식들이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분노뿐이었습니다.2
사고 현장을 갔다 온 유족들이 유해 등을 끝까지 찾아 정리해달라고 요구하자, 부대는 1982년 7월 3일까지 제주 현장에 내려가 최종정리 작업을 하고, 유해 발견 시 화장해 국립묘지에 봉안된 유해와 합동으로 충혼비에 안장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 당국은 1년이 넘도록 사고 현장에 시신과 잔해를 방치했고, 여전히 대통령 경호 때문이 아닌 ‘동계훈련’ 도중에 사망했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입 다물라,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사고 원인’
봉황새 작전으로 순직한 특전사 대원과 공군 유족들은 아직도 왜 사고가 났는지 모릅니다. 그저 기상악화라고만 하지만 구체적인 사고원인은 조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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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5일 발생한 공군 수송기 C123기 사고기에 탑승했던 장병들의 생전 훈련 장면과 국립묘지에 안장된 고 김인현 중사의 어머니 모습.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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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현장 수습이나 시신 발굴 등에 참여했던 관계자와 유족들은 철저히 전두환 정권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군인들이 전두환의 경호를 위한 작전에 동원됐다가 사망했다는 얘기를 하지 못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서재철 전 제주신문 사진 기자가 촬영했던 사고 현장의 필름은 군부로 넘겨졌고, 함께 취재했던 경향신문 기자들도 사건에 대해 보도하지 못했습니다. 서재철 기자가 숨겨놓은 1롤의 필름은 전두환 정권이 물러난 1989년에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3
1989년 유족들은 서울지검에 전두환 전 대통령, 이희근 공군 참모총장, 주영복 국방장관, 박희도 특전사령관을 살인혐의 등의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서울지검은 혐의가 없다며 기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4
전두환은 봉황새 작전으로 숨진 ‘C123 공군 수송기 추락’ 사고 보고를 받은 직후 “이번 사건은 조종사의 착각으로 빚어진 사고다. 인명은 재천인데 어떻게 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군 복무 도중 숨진 군인 유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보상이 아닌, 정확한 진실 규명과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유가족들은 늘 절망감에 몸서리 칩니다.
어릴 적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갔던 동작동 국립묘지는 현충일이면 엄청난 사람이 찾아오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찾아오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를 기억하는 유족들의 나이가 많아져 하나둘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더 늦기 전에 이 땅의 군인으로 살다가 숨진 이들에 대한 진실 규명과 진정한 사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충일인 오늘만이라도 그들의 억울한 삶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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