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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5일 토요일

국민이 주인이다' 초대형 깃발 들고 어김없이 나타난 남자

 [사수만보] 기접놀이꾼 여현수

25.04.05 13:24최종 업데이트 25.04.05 13:24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편집자말]

여현수가 용기를 들고 기접놀이를 하고 있다. 그는 윤석열의 내란 이래 광장을 지키고 있다.민병래

윤석열이 4일 11시 22분에 파면되었다. 윤석열의 불법 쿠테타가 단죄된 것이다. 돌아보면, 윤석열의 내란을 진압하면서 응원봉과 함께 돋보였던 게 깃발이다. 여의도와 광화문을 넘어 온누리에 저마다의 깃발이 오르고 그 물결이 펼쳐질 때 가슴은 뜨거워지고 함성은 우레가 되었다. 깃발의 축제! 힘이 솟구치고 진군은 거침없었다. 깃발의 대동제! 기개는 펄떡거리고 승리하리라는 믿음이 넘쳐났다. 응원봉이 밝힌 모든 불빛이 사랑스럽듯 깃발 하나하나가 참으로 소중했다.

광장에 우뚝 솟은 장군기는 특히 값졌다. 대장기가 앞장서면 행진은 용기백배하고 대장기가 뒤를 받치면 마음이 든든했다. 12월 3일 이래 장군기를 치켜올린 이는 바로 여현수였다.

그는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여의도와 광화문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현수가 든 용기의 깃대 높이는 대략 6.5m,. 대나무로 만드는데 그가 담양에서 직접 골랐다. 이때 굵기가 중요하다. 손아귀에 들어갈 정도면 휘어질 수 있기에 손가락 한마디만큼이 삐져나오는 놈을 택한다. 깃대 끝에는 가슴 높이의 꿩작목이 올라가 있다. 꿩의 깃털로 만들고 하늘과 땅을 잇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깃발은 예로부터 광목으로 제작했는데 여현수는 날림새를 좋게 하기 위해 가벼운 천을 택했다. 가로는 5m, 세로는 3m에 이르고 테두리를 에돌아 지네발이라고도 하는 빨간 깃수염을 달았다. 여현수가 직접 재봉질을 해 만들었다. 깃대와 깃발의 무게를 감당하려면 허리에 차는 기받이와 깃대 끄트머리에 동여매는 깃끈도 필요하다.

여현수가 든 용기에는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문구가 뚜렷하다. 글귀를 쓰신 분은 정읍에서 '우리누리선비문화관'을 운영하는 서예가 김두경 선생, 여현수와는 스승과 제자 쯤 되는 사이다. 여현수가 용기의 흰바탕을 무엇으로 채울까 여쭈니 김두경은 '농기'가 농민의 염원을 담듯 광장의 염원을 담자며 "국민이 주인이다"를 제안했다. 김두경은 글씨의 형태도 오랫동안 고민하고 연습도 여러차례 한 다음 작은 붓으로 조심스레 덧칠해 완성했다. 여현수는 용기가 꼴을 갖추자 기뻤다. 이 깃발이 광장의 기운을 북돋우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대장기가 올라왔구나

올해 마흔넷인 여현수가 사는 곳은 전북 고창, 토요일이면 그는 아침 일찍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향한다. 그가 차를 세우는 곳은 시청역 인근, 주말이면 단속을 하지 않는 어느 후미진 골목이다. 서울까지 오가려면 기름값에 통행료 등 돈이 제법 들어간다. 뿐인가. 서울에 도착해 서두른다고 촌에서 하는 습관으로 불법 유턴하다가 과태료를 몇 번 맞았고 차 지붕에 8미터나 되는 장대를 달고 가니 교통경찰에게 여러 번 걸렸다. 또 광화문 뒷길에 어설프게 차를 세워두었다가 주차딱지까지 집으로 날아오게 했다. 비용도 아껴야 하고 아내의 불호령도 무서운 참에 무료 주차장을 찾아낸 셈이니 반가울밖에. 문제는 시청부터 광화문까지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대는 둘러매면 되지만 지나는 길에 극우의 집회와 부딪힐 땐 봉변을 당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여현수는 광화문을 마주하는 의정부지 역사유적터에 도착하면 용기를 내려 기를 펼친 다음 이리저리 몸을 푼다. 기를 잡은 지 벌써 10여 년 단련이 되었으나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의 사전집회부터 행진 후 늦은 밤에 마무리까지 함께하려면 몸과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여현수가 준비를 마치고 용기를 들면 사방에서 탄성이 터진다. 드디어 대장기가 올라왔구나. 광장에 그득 찬 작은 깃발이 마치 어미새를 만난 듯 들썩인다. 12월 3일부터 벌써 4개월째에 이르니 낯익은 얼굴이 많다. 달려와 악수하고 물을 챙겨주고 요깃거리를 준다. 여현수는 고맙게 받아드나 닭이 모이쪼듯 입만 축인다. 왜냐하면 광장에 들어서면 깃발을 지닌 채 화장실을 오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도 안 마시고 끼니도 거른다. 일정이 끝난 후에도 저녁을 먹지 않는다. 갈 길이 먼데다 배가 두둑하면 자칫 졸음운전을 할까 겁이 나서다.

여현수는 집회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아오르면 깃끈을 부여잡고 서서히 깃발춤을 춘다. 파도를 타듯 기를 내리깔아 바닥을 쓸고 다시 세워 머리 높은 곳에서 너울너울 깃발의 물길을 연다. 깃발이 일으키는 물마루는 넘실대고 꿩장목은 금방이라도 차고 오르려 한다. 하늘로 날아 천지신령님에게 "국민이 주인이다"라는 민초의 염원을 아뢰고 북두칠성님에게는 평화와 민주를 간구할 양이다.

여현수는 행진이 시작되면 깃대를 어깨에 받쳐 어깨놀이, 이마에 올려 이마놀이, 손아귀 위로 곧추세워 고네받기를 한다. 물론 걸음새도 함께 따라간다. 휘모리 장단으로 묵직하게 한발한발 내딛다가 '아모르파티'나 '소원을 말해봐'가 울려퍼지면 굿거리장단의 빠른 발놀림으로 바꾼다. 징에 북에 장구가 어우러지면 그는 무릎을 높이 들어 앞으로 뒤로 오간다. 또 무릎을 낮추고 단전에 힘을 모아 깃발이 하늘로 뻗어나가게끔 동심원을 그린다. 용기는 깃발의 군무까지 받아안아 열길 공중에서 "윤석열을 파면하라"는 구호를 천둥소리로 만들고 "내란세력 타도하자"라는 외침을 이 땅 어디에든 퍼지라고 쾌속 구름에 실어보낸다. 용기만이, 여현수의 용기만이 할 수 있는 큰일일 테다.

▲깃발을 떠 받치는 여현수그는 윤석열의 내란이래 광장을 지키고 있다.민병래

연희꾼이 되다

여현수가 기접놀이에 빠져든 건, 2004년 전주풍남제에서 우연히 하루 동안 기수를 한 덕분이었다. 그의 단단한 몸놀림을 본 선배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하자고 청했다. 그 뒤로 여현수는 기접놀이보존회에 들어가 기량을 갈고 닦았다.

사실 여현수는 진즉부터 민속놀이에 관심이 많았다. 2000년에 군산의 호원대학 건축과에 들어간 그는 학교 풍물패 '뿌리'에 들어간다. 게서 꽹과리를 익히고 탈춤도 배웠다. 문제는 여현수가 2학년이 되고서였다. 선배들은 하나둘 동아리를 떠났고 신입생은 들어오는데 가르칠 기량은 못되었다. 그는 궁리 끝에 전주에 있는 강령탈춤전승회를 찾는다. 거기서 선생님들 심부름도 하고 먹고 자면서 기예를 익혔다. 그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은 자취를 감췄으나 묘하게도 지역에서 많은 투쟁이 있었다. 2003년에는 죽어가는 새만금을 지키자고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광화문까지 305km의 도보행진도 있었다. 그는 이런 싸움판을 쫓아다니며 자신이 지닌 탈춤이나 풍물의 기량으로 문화운동을 하겠다는 뜻을 세운다. 그렇게 20대를 싸움의 현장에서 연대의 현장에서 보냈다.

당연히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직장을 구하기도 바쁜 나이에 장구채를 흔들고 탈바가지만 뒤집어 쓴 여현수를 아버지 당신은 걱정했다. 여현수는 인천에 있는 대헌공고 건축과를 나왔다. 대학의 전공선택도 연장선상이었고 군대도 야전공병을 택해 제6공병여단에서 근무했다. 부전공으로 미싱기도 익혔다. 공고실습생일 때는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프레스를 배웠다. 30~40대 아저씨들 틈에서 야근과 특근을 하며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아버지 당신은 그런 여현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고생하더라도 자기 길을 잘 헤쳐가리라 믿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탈춤에 빠진 아들에게 실망이 쌓여갔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가 찾아왔을 때 당신이 하는 작은 가구 공장도 격랑에 휩쓸렸다. 이때 여현수는 전주 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에게 달려와 밤 늦게까지 물건을 만들고 새벽에는 배달을 다니고 수금과 영업까지 도왔다. 아버지는 여현수를 다시 보게 된다. 허툴게 살지 않았고 앞으로 자기 앞가림을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집안의 인정을 받고 나서 여현수는 팔을 걷어붙이고 연희꾼으로 나선다. 그가 특히 사랑한 악기는 장구, 선배들에게 기본을 철저히 익혔다. 아마 이 지구상에서 걷고 뛰고 춤추며 악기공연을 하는 무리는 풍물패밖에 없을 터. 장구는 채를 들어 가운데를 제대로 쳐야 맑고 경쾌한 소리가 나온다. 그래서 중심을 때리는 연습을 쉼없이 했다. 격렬하게 움직이며 하는 풍물놀이에서 타법이 흐트러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노력 덕분에 그의 기량은 쑥쑥 늘었지만 장구의 세계에는 수많은 고수가 있었다. 민속놀이꾼으로 밥 벌어 먹는게 쉽지 않은데 어중간한 장구 실력으로는 더더욱 고민이 많던 차, 풍남제를 계기로 기접놀이를 접하고 기접놀이보존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고수가 되려 했다. 전라북도가 전주세계소리축제와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기접놀이를 대표민속으로 소개하니 전망도 밝아보였다.

하지만 여현수는 보존회에서 나오게 된다. 그는 2014년 세월호의 아픔을 접하면서 유족을 위로할 방법을 고민한다. 여현수는 지역 그림패의 도움을 받아 용기에 노란물감으로 세월호 배를 그려 집회 현장을 찾았다. 그의 방문에 유족은 큰 위로를 받았다. 박근혜를 탄핵하는 촛불 혁명 때도, 조국이 정치 검찰의 탄압을 받을 때도 여현수는 용기를 들어올렸다. 그런 자신이 혹여 보존회에 부담이 될까 슬그머니 나왔다. 덕분에 지금은 홀가분하게 광장에 나온다.

아내가 고마울 따름

고마운 건 아내의 성원이다. 아내는 공연판에서 만났다. 네 살 연상인 그는 디자이너로 살아가면서 농악을 익힌 사람, 같은 무대에 몇 번인가 서면서 공연 중에 몇 번 세차게 눈길이 부딪혔다. 먼저 말문을 연 건 여현수. 2016년에 결혼에 골인했으니 이제 어엿한 10년 차 부부다.

연희꾼이 전문 예술인이나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형편, 한번 공연 나가면 10만 원 이상을 받을 때도 있고 재능기부만 하고 와야할 때도 있다. 코로나로 3년 안팎 공연이 어려울 때는 손가락을 빨며 버텼다. 공연료만으로 생계가 어려우니 어느 때부턴가 여현수는 공연 물품을 직접 제작한다. 탈바가지며 만장이며 그의 손을 거진 소품이 하나둘이 아니다. 수입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었다. 여현수가 그동안 집회현장으로 가지고 나간 용기도 30~40종이 넘는다. 문구도 다양하다. 이 모두 직접 재봉질을 해 만들었다. 그렇게 알뜰히 살아왔으나 2024년 12월 3일부터, 세월호부터 치면 10여 년 동안 부지런히 서울을 들락거렸으니 이래저래 쪼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아내가 하는 잔소리는 "운전하면서 졸지 마라, 딱지 끊지 말라" 두 가지뿐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광장의 어느 화가가 여현수에게 그려준 그림,화가는 이 그림을 엽서 크기로 인쇄해 여현수에게 선물하고 시민에게 나눠줬다.트위터 아이디는 @jeong__sd

용기와 함께 일어선 깃발의 대군

여현수의 용기는 언제까지 광화문을 지킬까? 모를 일이다. 윤석열이 파면됐지만 내란 세력, 반민주 세력을 쓸어내고 새 나라를 세우는 과정은 얼마나 길고 힘들 것인가? 어쩌면 반민특위가 쓰러진 날부터 아니 을사오적이 세상에 얼굴을 쳐 든 그날부터, 아니다 '척왜'와 '척양', '보국안민'의 농민기가 우금치를 넘지 못한 날부터 쌓인 역적과 모리배를 걷어내야 하니 그 여정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현수의 용기와 함께 일어선 깃발의 대군이 있지 않은가, 여현수의 깃발이 보급을 위해 잠시 다리 쉼을 한다면 수많은 깃발이 교대를 자청할 터이다. 설령 여현수의 장군기가 부러지더라도 또 다른 깃발이 딛고 일어설 터이다. 윤석열이 파면됐지만 길게 보면 스쳐 지나가야 할 고갯마루일 뿐이다. 우금치에서 제주에서 북만주에서 쓰러졌던 해방의 깃발을 다시 들어 이 강토를 뒤덮고 어깨춤을 추며 해일을 일으켜야 한다. 그 길에 국회 앞의 분노가, 한남동의 은박 소녀가, 전봉준투쟁단이, 남태령의 함성이 함께할 터인데 무에 걱정할 일인가? 1년이든 백 년이든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여현수 #깃발

프리미엄 민병래의 사수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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