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시발… 자주 민주 통일의 초석”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1조 1항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주권자가 국민이고,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를 밝히고 있는 헌법 조항의 정신적 근거가 바로 ‘4·19혁명’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열린 4대 대통령선거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불법 선거를 자행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중고생과 대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민중의 투쟁은 4월 19일을 즈음해 들불처럼 퍼져 나갔고, 결국 자유당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고, 민주적 질서를 바로 세운 4·19의 정신은 이후 80년 광주민중항쟁, 87년 유월항쟁과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한 촛불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흐르고 있다.
스무살 청년 시절 마주했던
3·15 마산 투쟁
“개표장 불을 끄고,
대로에 바리케이트를 쌓으며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그러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고,
발포도 일어났다.”
3·15 마산 투쟁
“개표장 불을 끄고,
대로에 바리케이트를 쌓으며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그러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고,
발포도 일어났다.”
4·19혁명 과정에선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등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 경무대(청와대) 앞에서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행진을 하고 있었다. 이때 경찰의 발포가 이어졌고, 현장에 있던 한 중학생이 총에 맞았다. 주변에 있던 대학생들이 총에 맞은 중학생을 급하게 부축해 병원으로 옮겼다. 이 장면은 외신 기자의 카메라에 담겨 해외에 보도되는 등 4·19를 상징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이 역사적인 현장엔 당시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이던 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경남대 명예교수)도 함께 있었다.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조영건 회장을 만나 4·19혁명의 의미에 대해 들었다. 스무살 청년이었던 조 회장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날 이후 부마항쟁과 민주화운동의 한가운데를 거쳐 박근혜 퇴진 촛불투쟁과 최근의 양심수 석방 투쟁에 이르기까지 꿋꿋하게 한길을 걷고 있는 그는 “4·19혁명은 자주 민주 통일의 초석”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와 마산의 김주열 열사를 거쳐 경무대 총격 현장까지 4·19 혁명을 둘러싼 역사적 현실은 조 회장에게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 4·19 혁명의 배경이 된 3·15 부정선거 당시 그는 대학 3학년 4월 개강을 앞두고 마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을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각각 선출했고,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을, 부통령 후보로 장면을 각각 선출해 맞붙었다.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면서 부통령 선거에 관심이었다.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 당선을 위해 세 사람 또는 다섯 사람씩 짝지어 기표하고 자유당 당원에게 검사 받는 공개투표, 투표소 주변에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민주당 지지자에게 위협을 주는 완장부대, 있지도 않은 사람을 유권자로 둔갑시켜 자유당에 투표하게 하는 유령유권자 조작, 총 유권자의 40%에 달하는 자유당 표를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 등 갖가지 부정이 벌어졌다. 당시 마산에선 이런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개표장이 있던 마산시청 주변 등에서 벌어졌다.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전국화된 부정선거 반대 시위
“마산 시내 모든 관공서와 파출소,
어용언론이던 서울신문사,
자유당사 등이 불탔다.”
전국화된 부정선거 반대 시위
“마산 시내 모든 관공서와 파출소,
어용언론이던 서울신문사,
자유당사 등이 불탔다.”
“부정선거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컸다. 학교 선생 집집마다 방문해 이승만 투표를 강요하던 시절이니 청년들이 어떠했겠나. 개표장이 있던 마산시청 인근에 우리 집이 있었다. 개표장에 시민들이 밀집했고, 나도 결합했다. 개표장 불을 끄고, 대로에 바리케이트를 쌓으며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그러다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했고, 발포도 일어났다. 십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상했다. 당시 외신들은 한국의 동남의 항구도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났다고 크게 보도했지만. 국내 언론은 ‘공산당의 사주’라고 왜곡 보도를 했다. 당시 정권은 도립병원에 안치된 시체에 ‘삐라’를 넣기도 했다.”
조 회장은 이후 개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지만, 마산에선 역사를 바꾼 사건이 이어진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마산 시민의 항쟁 당시 한 중학생이 실종됐다. 남원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4월 11일 마산 부두에서 아들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처참한 모습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그가 바로 김주열 열사다. 조 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은 분노했고, 마산에선 제2차 항쟁이 일어났다. 마산 시내 모든 관공서와 파출소, 어용언론이던 서울신문사, 자유당사 등이 불탔다. 이날의 봉기를 기점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전국의 이승만 하야 투쟁이 번져갔다.”
“옆에 있던 중학생이 총에 맞았다.
중학생을 부축해 환자후송에 나선 것이고,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게 됐다.”
중학생을 부축해 환자후송에 나선 것이고,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게 됐다.”
시위의 불길은 4월 19일 본격적으로 타올랐다. 조 회장은 외신에 사진으로 보도된 그날 경무대 앞 사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19일 아침 당시 서울대 교정이 있던 동숭동(대학로)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모여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으로 행진했다. 11시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대학생과 시민이 운집해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1시경 열혈 시민들이 광화문을 거쳐 경무대로 진출했다. 나도 마산 출신 친구들과 함께 경무대로 향했다. 군대 갔다 온 청년들이 중심이 돼 차를 탈취해 청와대로 진격하는 등 시위가 거세지자 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많은 사람이 총탄에 쓰러졌다. 그 현장에서 옆에 있던 중학생이 총에 맞았다. 중학생을 부축해 환자후송에 나선 것이고, 그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게 됐다.”
그날 거리에서 민중의 분노는 요동쳤다. 조 회장에 따르면 지금 KT 자리에 있던 반공회관과 사실상 정부의 기관지나 마찬가지였던 프레스센터 자리에 있던 서울신문사가 시위대에게 공격하는 등 반공통치에 대한 저항이 퍼져갔다. “그날 가까스로 하숙집에 돌아왔는데, 함께 시위에 나섰던 마산 출신의 친한 친구는 거의 반신불수가 돼 26일에서야 나타났다. 시위 도중 잡혀 마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26일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풀려난 것이다.”
“4·19 혁명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시발이었다.
식민지 피압박에서 벗어나 이룬
민족민주 대혁명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민주공화국의 시발이었다.
식민지 피압박에서 벗어나 이룬
민족민주 대혁명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이승만이 물러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우리는 흔히 4·19 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을 이뤄낸 주체는 대학생 등 민중이었지만, 이후 집권했던 민주당 세력은 친일세력 출신이 다수였던 기득권 세력으로 혁명 주체 세력과 괴리가 컸다. 더구나 민주당 내부도 신구파로 갈려 싸우면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을 받아안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다. 4·19 혁명 이후 1년이 조금 넘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벌인 쿠데타에 의해 이런 바람은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주, 민주, 통일 그리고 국민주권의 공화국 등 지금까지 도도히 이어지는 민중적 흐름을 형성했다.
“자유당 중앙부터 지방조직에 이르기까지 다 해체됐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관료가 다 척결됐다. 이승만의 어용기관이던 대한노총 와해되고, 민주적 노동자 조직의 싹이 텄다. 전국의 민중, 농민조직이 개편됐다. 4·19 혁명을 단순히 시민혁명 차원서 보는 시각이 많지만, 4·19 혁명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시발이었다. 식민지 피압박에서 벗어나 이룬 민족민주 대혁명이고, 민족주의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해방 이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자주 국가와 민주사회를 만드는 전환기 혁명이었고, 민중을 동원해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혁명이었다. 4·19 혁명은 학생혁명, 농민 노동자 혁명, 민중혁명의 3단계 혁명으로 전개됐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새로운 통일운동의 부활”
만나자 판문점에서…
새로운 통일운동의 부활”
민족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학생들의 투쟁도 이어졌다. 1960년 11월 서울대학교 민족 통일연맹을 시작으로 각 통일 운동단체가 만들어졌다. 이어서 전국 17개 대학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가 열리고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며남북 학생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이때 나온 유명한 구호가 바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다. 조 대표는 “새로운 통일운동의 부활”이라고 당시를 돌아봤다.
하지만, 이런 학생들의 열망과 민주공화국을 향한 수많은 꿈은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좌절되고 말았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지 못한 4·19 혁명의 미완의 과제는 이후 조 회장의 삶에 있어 지표가 됐다. 미완의 혁명을 마무리 짓기 위해 그는 87년 유월항쟁 이후 ‘사월 혁명 연구소’, 지금의 사월 혁명회를 만들어 4·19 정신 계승을 위해 뛰고 있고, 민주노동당을 시작으로 진보정당 운동에 몸담으며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왔다. 지금도 그는 청와대 앞에서 이석기 전 의원을 비롯한 양심수 석방을 외치며 싸우고 있다.
“국민 화합을 넘어
남북 화합과 평화의 입장에서
이석기 전 의원을 석방해야 한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결단해야 한다.”
남북 화합과 평화의 입장에서
이석기 전 의원을 석방해야 한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결단해야 한다.”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을 맡아서, 양심수 석방을 위해 청와대 광장에서 노상의 생활을 이어왔다. 60년이 넘어서도 광화문과 효자동, 청와대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나의 운명이 아이러니컬하다. 문재인 정권에겐 역사적 사명이 있다. 촛불혁명을 위임받은 정권이다. 자주 민주 통일 의 성업을 완성할 책임이 있다.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아쉽다. 역사가 정의로운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민중의 힘, 노동자, 농민, 민중, 진보 자주세력의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서 계속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조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양심수 석방과 관련해 애정어린 충고를 했다. 조 회장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이석기 전 의원 구속도 만기가 끝난다. 박노자 교수는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고 해서 감옥에 가두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했다. 교황도, 카터 전 대통령도 석방을 청원했다. 국민 화합을 넘어 남북 화합과 평화의 입장에서 이석기 전 의원을 석방해야 한다. 좌고우면하지 말고 결단해야 한다. 촛불 혁명을 계승하는 대통령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이다.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벗어나길 진정으로 충언한다.”
“4·19 혁명이 박정희 정권의 저항으로
미완에 그쳤지만, 역사의 진행은
헌법에 지금도 4·19 혁명 정신이 반영해 계승됐다.
자주 민주 통일 민주정신으로
민주 공화제의 초석이 되는 변혁으로서
생명이 영원하다.”
미완에 그쳤지만, 역사의 진행은
헌법에 지금도 4·19 혁명 정신이 반영해 계승됐다.
자주 민주 통일 민주정신으로
민주 공화제의 초석이 되는 변혁으로서
생명이 영원하다.”
4·19 혁명 60주년 우리 사회엔 알게 모르게 이승만과 박정희를 추종하는 흐름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4월 혁명 정신을 위해 싸워온 그에겐 우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 때문에 그는 더욱 4·19 혁명의 가치와 정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박정희 군사정권도 4·19를 부정하진 못했다. 처음엔 4·19와 5·16 모두를 혁명이라고 부르다 나중엔 4·19는 의거로 5·16만 혁명으로 불렀다. 그런데 지금 극우세력들이 광화문광장을 이승만 광장으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4.19 당시 무너뜨린 이승만 동상도 복원하자고 한다. 이승만을 다시 국부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박정희도 이런 반동적 행위까진 하지 못했는데, 박근혜 시절을 전후해 이런 흐름이 일어났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자신이 쓴 책에서 4·19 혁명을 ‘혼란’으로, 5·16 군사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수구 기득권 적폐 세력이 노골적으로 4·19 혁명을 부정하고 있다.”
도도하게 이어져 온 4·19 혁명의 정신은 60년이 지난 오늘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4·19 혁명이 박정희 정권의 저항으로 미완에 그쳤지만, 역사의 진행은 헌법에 지금도 4·19 혁명 정신을 반영해 계승됐다. 자주 민주 통일 민주정신으로 민주 공화제의 초석이 되는 변혁으로서 생명이 영원하다. 특히 4·19 혁명 60주년을 맞아선 촛불혁명의 계승과 적폐 청산 등 수많은 과제가 있다. 특히 판문점 회담과 평양공동선언 등 문재인 정권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 행보의 초석은 4·19 혁명이 깔았다. 4·19 혁명의 계승하고 완수하는 것은 자주, 민주, 통일, 국민주권, 진정한 민주주의, 통일정부, 새로운 민족번영 공동체, 동아시아와 세계 평화를 견인하는 등대와 같은 것이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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