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중심에 성소수자있다
» 사진 픽사베이 제공
사월과 오월을 넘어 유월도 산중은 초록의 향연입니다. 산에 오래 살다보면 절로 알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산색이 아름다운 이유가 단지 자연의 빛깔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답은 화이부동(和而不同)에 있습니다. 숲은 서로 섞이고 함께 하면서도(和) 자기만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不同), 개성과 조화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조화의 원칙과 묘미는 고유한 자기만의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합니다. 숲은 저마다의 자태와 빛깔을 가진 온갖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엄하고 아름다운 ‘숲’은 그 실체가 없습니다. 숲이 실체가 없다는 것은, 숲은 많은 나무들이 없이는 결코 숲이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그렇습니다. 땅과 주춧돌, 기둥과 서까래와 지붕없이 ‘집’이라는 존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 무엇이 있으므로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연과 만물의 이치가 이러할 것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푸른 나무들도 자세히 보면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 푸른 빛도 표정과 온기가 저마다 다릅니다. 형형색색! 저마다 다른 것들이 건강하게 함께 모여 살아야만 정녕 자연도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부처님 오신날도 어느덧 한달이 지났습니다. “차별없는 세상, 우리가 주인공”. 올해 불교 조계종의 봉축 표어입니다. 봉축 표어는 사회의 염원을 담아 제정합니다. 이러한 염원을 담아 조계사에서 열린 법요식에는 세월호 희생자와 미수습자 가족,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장기해고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대거 초청하여 앞자리에 모셨습니다. 이들을 모신 뜻과 상징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눈여겨 보면, 성소수자들을 법요식에 초대한 발상과 용기가 제게는 무엇보다도 큰 감동이었습니다. 차별 없이 일체 중생을 보듬고 손잡는 일이 종교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그러나 지난 역사와 지금의 현실을 보면 많은 불자와 국민이 지켜보는 법요식에 성소수자들은 초대한 일은, 오랜 전통과 뿌리 깊은 보수적 관념이 지배적인 종교문화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불교계가 부처님 오신날에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장기 해고자들을 귀하게 모신 것은 그것이 부처님의 뜻에 일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픈 그곳이 몸의 중심이고 세상의 중심이듯이, 부처의 마음은 외면 받고 편견 받는 사람들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의 탄생 선언이 새삼 그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저마다 다른 이름 다른 모습을 가진 모든 존재가 무엇과 바꿀 수 없이 귀하고 귀하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들이 차별 받고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고 있지 못한 현실을 부처는 아픈 가슴으로 통찰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염원합니다. “이 세상 중생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으니 나는 마땅히 그들의 고통을 소멸하리라”.
부처는 1인칭의 고유명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부처는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통명사입니다.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이들이 바로 부처입니다. 보통명사의 부처들은 이 세상 모든 생명들이 절대적으로 존귀하고 삶의 주인공이라고 통찰합니다. 바로 부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공들이 사회적 편견과 법과 제도의 불합리와 불공정으로 인하여 이유 없이 혐오와 배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시민은 차별 속에서 당하는 모멸감을 소멸하고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일을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바로 보통 부처, 시민 부처의 ‘자비’입니다.
조계종은 몇 년전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을 일관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차별없는 세상, 상생과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부처의 뜻을 이어받는 시대적 원력입니다. 이천육백여년 전, 석가모니는 혁명가였습니다. 그 당시에 인류의 집단적 무지와 폭력이라고 할수 있는 계급차별과 양성차별을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부정하고 해체하였습니다. 부처는 사랑과 자비를 이렇게 구현했습니다.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민주정부가 개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대통령의 선언이 성소수자들에게 해당하고 적용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시대의 시민 부처와 시민 예수들의 애정과 관심이 그들의 가슴에 촛불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해 차별 해소와 평등을 말할 때 먼저 우리는 그들에 대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해야 하고, 사과하고, 겸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그 동안 그들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처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와대 비서동을 위민관(爲民館)에서 여민관(與民館)으로 개명한 의미가 새삼스럽다.
* 이글은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 6월호의 ‘여는 글’이며 휴심정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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