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했다. 우리의 주적이 누구냐고 따지듯 질문하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마치 불변의 진리를 설파하는 선지자처럼 훈계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난감한 표정으로 명확한 답은 피한 채 적당한 선을 타고 넘는 사람의 낯선 표정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대선 후보 토론 때 얘기다.
평화 통일의 로드맵을 말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륙과의 선로 연결을 통한 원활한 물적 교류를 언급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난 국정농단 세력들의 반통일 놀음에 광화문광장의 앉은뱅이가 된 개성공단 입주 사장님들의 억울함이나 언급됐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으로 그리운 금강산 언제쯤이면 갈까나 설레는 기대감으로 바라보던 TV였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주적론을 펼쳐대며 반공전선의 일등공신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속내를. 국가의 이념을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숭고한 가치라고 명명하고 평화라는 말조차 금기어로 만들었던 그네들의 행태는 고작 분단을 상업화 하고 온 나라를 분단 상권의 체인점으로 만들어 사장노릇이나 했던 장사치에 지나지 않았던가.
보수라는 근사한 말로 치장했던 그들의 외피가 국정농단이라는 실체로 폭로되어 국민들의 울분을 터트리던 시점이었음에도 또“색깔론”인가.
다시 억울했다. 내가 왜 그네들 같은 거짓 선지자로부터 그 따위 질문을 받고 당혹스러워 해야 하는가. 내가 모를 줄 아는가. 평화의 사람들 조봉암과 조용수를 사형시키고 인혁당 8인을 사형시키고 김대중과 김근태를 고문했으며 서정의 시인 박정만을 죽이고 순수의 소설가 한수산마저 추방시켜버린 과거를.
나는 그 역사를 아픔으로 안다. 그러나 그네들은 철없는 혁명가의 치기어린 청춘으로 매도했다. 비웃으며 피를 뽑았고 생명까지 앗아갔다. 좌익이었다가 빨갱이였다가 좌파였다가 종북 이었다가 거대한 분단 상권의 장삿속에 반대하는 이들을 옭죄는 이름도 다양했다.
그 덕에 분단은 당위가 되었고 대륙은 가난한 여행자의 쉴 곳 명단에도 오르지 못하는 금기의 땅이 되었다. 분단의 북쪽을 고립시킨다고 아우성 쳤으나 기실 고립된 섬은 분단의 남쪽 내가 사는 곳이었다.
세계는 하나인데 사랑하는 조국은 둘로 나뉘어져 시름시름 앓았던 한 시인이 소리쳤다. “반도는 사랑하기엔 너무 좁다”고. 북쪽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남쪽에서의 꿈은 꿈마다 숨이 막힌다고 고백하던 시인은 끝내 몸에 꿈 하나 숨기고 남쪽과 북쪽의 국경을 넘을 것이라고 선언 한다.
“국경을 넘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나를 구금하라 대륙의 피에 반도의 피를 섞으려는 것이 유죄라면 나도 혁명가처럼 서서 죽을 것이다”(정일근 시 ‘울란바토르 행 버스를 기다리며’ 중).
달포 전 러시아와 중국. 북한의 경계선이 있는 두만강 철교위에서 허망해 했던 적이 있었다. 년 간 40조원을 오직 적을 경계하기 위해 쓰고도 모자라 늘 안보라는 말 말고는 다른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나라의 시민인 내가 그리 부끄러울 수 없었다. 대륙에 흩뿌려진 꽃씨만큼의 지뢰밭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면 곧바로 반체제 인사가 되는 나의 땅은 섬.
그러나 초소 하나 없이 보초병사 한명 없이 총 한 자루 없이 낡은 철조망과 표지석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평화로웠던 경계가 있었고 그 표지석 위로 바람이 불다 방향을 틀어도 나비가 날고 잠자리 철새 떼 한 무리 돌고 돌아도 누구하나 총구 들이대지 않는 곳. 그렇게 평화였던 국경이 있었다.
무기를 더 쌓고 쌓아야 평화가 온다는 내 땅의 신념은 모두 거짓이었다. 너무 간단했다 서로 바라보고 얘기하고 웃고 손잡아야 평화였다. 친해지면 평화였다. 울분에 차올라 소주 한 병 나발 불다 “저기가 고향이여 핏댕이로 어미 등에 업혀 나와 70년도 넘게 가보지 못한 내 고향이여” 한숨 쉬는 노인을 떠올리면 저 두만강 철교위의 언덕위에 무릎 꿇고 통곡하고 싶었던 그날을 보내며 만취했고 노래를 불렀다.
나보다 더 취한 붉은 달빛이 떠오르는 새벽 바닷가에선 더 없이 서러운 노래를 불렀다. 나의 노래는 파도소리에 묻혔다가 달이 떠올랐던 곳에서 다시 거대한 태양으로 떠올랐다. 부활절 아침이었다. 3년 전 세월호를 싣고 간 바다가 있던 그날 이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A.J.MUSTER).” 이 말을 곱씹으며 버스 안에서 부활을 소망하는 기도를 드렸고 나는 다시 평화를 살기위해 반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제 한반도의 거대한 분단 상가는 철시(撤市)되어야 한다. 분단으로 인해 교류했던 모든 상품들은 백성들의 골육을 빼낸 것들이다. 분단 상권 내에서 살았던 거의 모든 존재는 ‘죽임’에 익숙해 졌다.
그러나 다시 억울해 하지는 말아야 한다. 스스로 평화로 살면 된다. 바이칼의 물결과 속삭임을 생각해 보라. 광활한 대지의 한 켠에서 더 넓은 대륙을 향해 소리치는 꿈을 꾸어 보라. 지평선 너머 지평선 그 위를 물들이는 황홀한 일몰을 상상해 보라. 자연에 의지하며 벗하며 대륙의 땅 풀 한포기도 쉬이 베지 못하는 본래 소박한 대륙인의 심성을 그리워만 해도 좋다. 모두가 ‘살림’의 길이다.
분단의 상권이 걷히면 평화 상권이 온다. 어떠한 경우에도 죽임이라는 말에 미학(美學)이란 말을 붙이지 않는다. 살림이란 말은 언제나 평화여서 그 울타리 안에서는 언제든 아름다워져도 좋다. 지금은 살림의 꿈을 꾸어야 하는 시대다.
이지상 (가수, 성공회대 외래교수)
고단한 사람들의 일상에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는 노래하는 사람 청년문예운동의 시기를 거쳐 노래마을의 음악감독.민족음악인 협회 연주분과장을 지냈고, 다수의 드라마.연극.독립영화 음악을 만들었으며 98년 1집 "사람이 사는마을"2000년2집"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2002년3집"위로하다.위로받다"2006년 4집 "기억과 상상"등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2010년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를 출간했다.
현재 시노래 운동"나팔꽃"의 동인으로 깊이있는 메시지를 통해 삶의 좌표를 만들어가는 음악을 지향하고있으며 성공회대학교에서 "노래로 보는 한국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사)희망來일 이사를 맡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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