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판검사에 죽어서도 판검사?
세상의 조건들 흩어지면 들국화처럼 스러져 가는데...
그저 개체는 유한할 뿐인데 욕심과 무지가 자리 잡아
» 헌법재판소. 사진공동취재단
김형태/ <공동선> 발행인·<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
가을비가 하루종일 추적추적 내립니다. 여름 끝 무렵부터 피어나기 시작해 가을 내내 마당을 노랗게 밝히던 금계국도 다 시들어 버리고, 하얀 구절초 꽃들도 서서히 그 흰 빛이 꺼져 갑니다. 그래서 매일 마당을 가꾸는 늙은 어머니는 삶의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시고, 엊그제 재롱둥이 외손주를 천리만리 먼 이역 땅으로 떠나보낸 처의 입가엔 주름이 더 깊어 졌습니다.
덧없는 삶입니다.
얼마 전 어느 상가에 조문을 갔더랬습니다. 마침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같이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마주앉은 이는 십몇 년만에 보았는데 옛날에 그랬듯이 반말로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 친구는 또박또박 존댓말로 답을 하는 거였습니다. 그렇다고 나도 존댓말로 바꾸는 게 좀 그래서 나는 계속 반말을 하고 그는 계속 존댓말을 하고, 반말, 존댓말, 반말, 존댓말.... 참 불편하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판사로 지내면서 법원의 고위직에 있다가 퇴직을 했기에 아마도 오랜만에 만난 나로부터 반말을 듣는 게 마뜩하지 않아서 존댓말 듣기를 기대하고 먼저 말을 올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엄청난 돈, 엄청난 권력이 잊게 만들어
별자리 군인, 대기업 회장, 판검사, 목사, 신부, 스님들...,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르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를 ‘날 때부터 판검사에 죽어서도 판검사’, ‘날 때부터 신부에다 죽어서도 신부’라고 여기지 않나 싶습니다. 이 몸, 이 능력, 이 자리라는 게 그저 잠시 여러 조건들이 모여 꾸려냈던 것일 뿐이고 이 조건들이 흩어지면 저 하얀 들국화 꽃처럼 스러져 갈 것이어늘....
‘날 때부터 성철 스님에 죽어서도 성철 스님’. 이런 생각의 밑바닥에는 개체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심 또는 무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돈, 이 엄청난 권력, 이 엄청난 사람들의 떠받듬이 결국은 자신도 하잘 것 없는 개체에 불과하다는 걸 잊게 만듭니다. 그래서 옛 이집트의 왕들처럼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저 개체는 유한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유한한 개체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아무리 자기 자신을 내버려도 결코 무한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고타마 스승께서 우리에게 탐(貪) 진(瞋) 치(痴)를 버리라 가르치셨지만 유한한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경지입니다. 탐하는 마음, 성냄, 어리석음을 버릴 능력이 없게 타고난 이가 대다수요, 청춘남녀의 서로를 향한 육체적 탐냄이 없으면 인류가 아예 사라져 버릴 거고, 농민을 물대포로 쏘아 죽게 만든 체제와 사람들을 향해 성내지 않는다면 이런 억울한 죽음은 끝없이 이어질 겁니다.
완전히 ‘나’를 버린 라마나 마하리시 같은 성자도 다른 개체의 생명인 밀이나 풀을 먹어야 사니 결코 무한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성철 스님이나 마더데레사 수녀나 마하리시 성자가 도를 닦아서, 사랑을 베풀어서, 이기심을 버려서, ‘해탈’하고 ‘구원’받았다면 그는 이미 개체인 성철이나 마더데레사가 전혀 아니므로 그 개체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개체는 유한할 뿐입니다. 그저 유한한 개체가 무한을 향해 애쓰다 갈 뿐입니다.
» 진도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자신의 잣대 멋대로 끌어다 하느님 이름으로
그리고 이 유한한 개체가 ‘무한’을 향해 하느님이니 불성(佛性)이니 도(道)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 무한은 유한의 하나, 개체가 되고 마니 이 무한을 향해 이름 붙여서도 안됩니다. 하느님이 있네, 없네 하고 싸우는 것 자체가 저마다 나름의 허깨비를 만들어 놓고 다투는 부질없는 짓입니다. 노자는 일찌감치 “도가도 불상도(道可道 不常道)”라, 도를 도라 이름 붙이면 참된 도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무한’을 유한한 자신들의 잣대로 멋대로 끌어다 대 유한으로 만들고 마니 미국 대통령 부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라크를 침략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이런 말씀도 남겼습니다. “천지불인 이만물 위추구 (天地不仁 以萬物 爲芻狗)”.
하늘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긴답니다. ‘풀강아지’는 중국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짚으로 만든 강아지 인형으로 제사가 끝나면 내다버린다니 하찮은 것을 뜻합니다.
하늘이 어질지 않다? 이 말은 부시 같은 기독교인들이 입만 열면 떠벌리는 ‘하느님 사랑’을 역설적으로 뒤집어 버리는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이니 하면서 무한을 끌어다가 유한의 욕심을 채우는 짓을 하지 말라. 유한한 우리의 잣대로 무한을 어질다고 표현하지 마라.
태어나기 전부터도 회장님, 죽어서도 회장님?
그저 개체는 유한할 뿐입니다.
개체는 무한을 유한의 잣대로 잴 수 없습니다.
그저 유한한 개체가 무한을 향해 애쓰다 갈 뿐입니다.
그런데 저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은 왜 차디찬 바다 속에서 죽어 갔을까요.
하늘은 저 아이들을 풀강아지로 여긴 걸까요.
※ <공동선> 2016. 11~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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