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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18일 목요일

'화염병 사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신동필론, 부르지 못한 노래16.08.18 21:51l최종 업데이트 16.08.18 21:51l글: 이광수(gangesh)편집: 박혜경(jdishkys)사진이 보여주는 모양새를 서로 나눠 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서로 헤아려 보고, 그 안에서 내 세계를 그려보고, 그로부터 지적 유희를 즐기고, 그것으로 소통하고 나누고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주류도 없고, 패거리도 없는 그런 평가가 있었으면 한다. 

재미있게 말하자면, 이 땅에 숨겨진 고수를 찾아서 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장르도 초월하고, 경계도 허물고, 패거리도 없고 갑과 을의 관계도 없는 대동의 사진 세계에서 한 세상 멋지게 놀 수 있는 이 땅의 고수를 찾는 놀이다. 2016 갤러리 브레송 기획전 사진인을 찾아서 ⓼ '신동필론'은 8월 22일부터 8월 30일까지 전시된다. - 기자 말

사진가 신동필은 80년대 중반부터 둑 터지듯 터져버린 그 민주화 운동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5·18 광주학살부터 시작된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는 '양키 고 홈'을 거쳐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에서 정점을 찍는다. 분단된 조국의 아픈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된 대동 세상을 이루어내기 위해 온몸을 던졌다. 당시 '운동권'은 모두가 다 민족 해방을 외쳤고, 그것이 역사요, 진실이요, 길이었다. 

그 치열한 시간을 역사의 증언자로 기록하고자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30년, 1985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뜨거운 역사의 현장에 대한 30년간의 기록이다. 시간은 흘렀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한열을 잃고 효순이·미선이를 잃더니 이제는 세월호에 이르러 304명을 잃었다. 그래서 중단할 수 없다.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민족 혹은 사람에 관한 노래, 그 노래를 이제 부르지 못한다. 다시 불러야 하는데...

1. '화염병 사진'을 찬양하노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세계관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그 시대는 영국 제국주의가 꽃을 피우는 시기였으니 그 안에서 남성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당연히 모험, 용기, 희생 등이 지고의 선이었고, 그래서 발견과 정복을 최고 가치 행위로 간주했다. 

소위 '예술적'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의 창의성을 처음 시도하는 즉 발견이나 발명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표현 방식의 창의성으로 이해하는 풍조가 아직도 팽배하다. 그러한 '새로움'의 추구에는 공동체의 선이나 인간 존엄 그리고 역사성에 관한 가치가 들어가 있지 않다. 이러한 근대적 개념의 작품 평가가 권력의 토대가 된다. 삶과 유리된 가치를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하다는 말인가? 예술이란 외부인은 간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은 낭만주의의 사술(詐術)일 뿐이다. 아직도 여전히 사진계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지만, 한낱 예술 권력의 시각일 뿐이다. 

예술은 인간의 존엄, 진리, 정의 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것이 예술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이 정치에 복무하는 것을 문제시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정치적 예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정치에 타락하여 독재에 부역하는 정치 예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전자를 나쁘다고 평가하면서 기계적 중립으로 후자까지 마찬가지로 평가하는 것은 한낱 '예술을 위한 예술'로 예술 지상주의에 복종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 사진계의 권력이 이 안에 있다. 그들은 바른 정치적/역사적 태도를 지닌 사진을 '화염병 사진'이라 폄하한다. 예술의 이름으로 하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편 가름은 거대 권력의 통제 담론일 뿐이다. 

신동필의 사진에는 특별하다고 할 만한 새로운 기법은 없다. 소위 예술의 존재 이유라고들 하는 창의성이란 없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감동을 준다. 새로운 형식이나 창작 기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모두가 힘들게 지내온 그 시대의 모습에서 오는 감동이다. 대상이 그 자체로서 극적인데 다른 극적 요소를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30년 전 '우리'가 처절하게 싸워서 쟁취했지만, 지금은 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켜줌으로써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 그의 사진이 주는 세밀한 묘사를 통해 그의 사진을 보는 우리는 당시 그 아스팔트 위로 돌아가 그때 그 처절했던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노동해방'의 깃발 아래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노맹의 사진을 보면 소름이 끼치면서 눈물이 난다. 북으로 돌아간 그 '선생님들'은 지금 어떻게, 잘 살고 계실까? 분단과 세월이 만들어내는 파토스의 이중주 앞에서는 그저 지내 온 시간이 먹먹하기만 하다. 

신동필의 사진은 감상자가 주체적으로 감성을 계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예술적이다. 다만, 내가 말하는 예술과 그들 권력이 말하는 예술이 다를 뿐, 그의 사진이 무미건조한 자료, 다큐멘트일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큐멘터리 1985~2005. 신동필 사진집>은 그 어두웠던 터널을 함께 뚫고 왔던 우리 모두로 하여금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우리 시민 공동체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그리고 그 위에서 전율하도록 하는 작품이다. 작품이란 심장을 열어젖히는 것이지,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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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열 장례식(1987)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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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시위(2002)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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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 (2015)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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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1991)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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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성당 앞 (1991)
ⓒ 신동필

2. 민족의 이름을 부르노라

사진가 신동필은 1990년대 후반부터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그 많은 민족사의 문제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다. 50년 만의 정권 교체에 의해 독재의 40년 사슬이 끊어지면서 맨 먼저 떠오른 문제는 분단과 민족의 아픔이었다.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신동필은 이 모든 문제에 온 몸을 던졌다. 거리의 투사이자, 시대의 양심 지킴이면서 역사의 목격자이자 증인으로서 사진 기록을 남겼다. 

"당신 때문에 빨갱이로 낙인찍혀 인생을 망쳤어!"... 2000년 9월 2일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 뒷덜미에 남은 가족 누군가가 던진 비수보다 더 아린 한 마디. 그 응어리진 비극의 현장을 기록한 <우리 다시 꼬옥 만나요>. 감옥에서 출소한 후 북한으로 송환되기까지의 몇 개월의 시간 동안 장기수 63명의 삶을, 그들과 같이 살면서 기록한 정통 다큐멘터리 사진집으로, 국내 유일이다. 예술이기 이전에 기록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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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전향장기수(2000)
ⓒ 신동필

민족의 문제는 결국 핏줄의 문제다. 신동필은 독재와 산업화와 민족의 문제가 실타래처럼 엉킨 시궁창 같은 한국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아동 해외 입양의 문제에도 앵글을 들이 댄다. 1997년부터 2005년 봄까지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떠나가는 입양아, 돌아와 그들 앞에 선 그 입양아들을 기록하였다. 피사체가 사람인 것은 여느 사진과 다를 바 없으나 말도 못하는 어린 핏덩어리들을 피사체로 대해야 하는 사진가라는 직업에 괴로워 한 적이 많았다는 말을 듣는다. 피사체와 교감을 해야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딱 적격이다. 

사진가는 이런 말을 한다. "어떤 양육모가 자신이 키우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가지게 된 과정을 의사에게 설명하면서 아기를 품에 꼭 껴안고 바닥에 쭈그려 우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그 사진은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기록하며 함께 아파했던 모습들은 사진이나 필름이 아닌 가슴 속에 영원히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가족>은, 그래서, 붓다가 말 한 바 고해(苦海)다. 태어나자 떠나고 부모 아닌 부모 손에서 자라지만 다시 돌아오는, 그 핏줄이라는 게 도대체 뭣이라고, 생모의 소식에 눈물을 흘리며 양아버지 품에 안기는 사진을 보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슬픔이 배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사진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도, 그 사람을 바라보는 옆 사람들도, 그 사람들을 카메라로 찍는 사진가도, 그 사진을 바라보는 독자도 모두 눈물이니, 눈물로 기록한 사진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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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방송공사 별관(2001)
ⓒ 신동필

신동필의 첫 작품은 1999년에 연 <교토 40번지>다. 대학 졸업 후 그의 말대로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일본으로 갔다. 그리고 교토 40번지를 만나게 된다. 운명적인 만남이라지만 사실 그의 가슴에 묻힌 민족에 대한 정념이 당긴 필연이었으리라. 사진가는 교토 40번지에서 강제 징용 1세대들을 만나 그들의 처절한 역사를 담는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는 어느덧 '우리는 하나다'가 되고, 그 우리는 일본에 대한 우리로 확장된다. 

그 연장선에서 신동필은 원폭 피해자, 민족 학교와 관계를 맺는다. 권철이 야스쿠니에 꽂히고, 양승우가 신주쿠에 꽂힐 때 신동필은 민족에 꽂힌 것이다. 신동필은, 누구나 그랬을 듯, 교토 40번지를 암울함과 '희망 없음'으로 재현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처박고, 철조망에 갇혀 있으며, 그냥 멍 때리고 있거나 하염없이 저 쪽만 쳐다본다. 아픈 세월의 흔적은 주름진 얼굴, 깊게 패인 손, 퉁퉁 부은 발에 담겨져 있고, 담배와 약봉지가 그들의 아픔을 대변해 준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끝내진 않는다. 신동필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온 대부분의 그 투사들이 그랬듯, 대동 세상에서 하나 되는 민족을 찾는다. 마을 사람들이 명절에 모여 잔치를 하고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는 장면을 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보라, 비록 힘없고 멸시당하며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우리' 아닌가, 결코 잊지 말아야 되는 우리 핏줄 아닌가, 라는 메시지다. '우리는 한 핏줄'은 2004년 작업인 <재일 민족학교>가 그 바통을 이어 받는다. <교토 40번지>에 비해 밝고 희망적이다. 일본어 책과 국어 책을 동시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들이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워는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디아스포라임을 보여준다. 표정은 항상 밝고, 당당하며,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신동필의 핏줄에 관한 노래로 부르는 기록은 '위안부 할머니'와 '원폭 피해자'로 이어지면서 인물 사진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그 한(恨)의 세월, 필설로는 말할 수 없는 그 세월을 사진 같은 단면적인 매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택한 것이 인물 사진이다. 인물 사진을 통해 사진가는 은근히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 한과 세월을 독자가 읽어내야 한다. 역사가 기록하는 자의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덧 읽는 사람의 것이 되기도 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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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40번지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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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40번지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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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40번지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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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40번지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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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 40번지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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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민족학교(2004)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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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폭피해자(2002)
ⓒ 신동필

3. 이제 사람을 노래하리라

사진가 신동필이 지난 30년 동안 했던 작업 가운데 한 민족, 한 핏줄의 범주에서 약간 벗어난 <광부 이춘하>라는 작업은 바로 이런 지원을 받아 완성을 한 작업이다. 탄광 노동자 이춘하씨를 중심으로 1997년부터 2005년 까지 한 작업인데, 1차 마무리를 한 후 2004년도에 강원 다큐멘터리 사업에서 기록 보존 작가로 선정 지원을 받아 추가 보충 촬영을 하여 완성하였다. 

이춘하라는 이름의 노동자 한 사람을 통해 탄광, 탄광 일, 그들이 사는 곳, 그들이 사는 이모저모를 일상사 차원에서 기록했다. 초점은 먹고사는 문제에 맞춰져 있다. 도시락 먹는 사진이 몇 장 등장한 것은 사진가가 동어반복을 몰라서가 아니었으리라.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밥'을 말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사진가가 이 작업을 할 때, 한국 사회는 노동의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소위 IMF 시기로 빠져 들어갈 때였다. 노동이란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목숨의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한 구호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밥의 문제였다. 그래서 사진가가 그린 탄광 노동자의 삶은 처절하다.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그 시대를 노동자로 살아온 이 땅 아버지들의 존재 방식이다.

<광부 이춘하>의 끝 부분에 그려진 몇 장의 사진에 눈길이 멈춘다. 누군지 모르지만, 어떤 이가 죽었다. 그러더니 본인이 병상에 눕는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다시 시커먼 갱도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이다. 살고자 하는,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절규를 보여주는 이야기 방식이다.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사진 하나하나가 개체적으로 특별한 미감을 발산시키지는 않는다. 한 장 한 장이 각각 완성된 미장센을 갖추거나, 뛰어난 물성을 갖추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 이미지 하나하나에서 아름다움을 얻어내는 것보다 하나로 구성된 전체를 통해 감동을 느껴야 한다. 전체가 하나로써 감동을 줄 때 돌이켜 다시 읽으면 하나하나의 사진이 다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록색 지하 세계에 서 있는 초췌한 탄광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개체로서 볼 때는 어눌하다 할 수 있겠지만, 이 사진이 주는 느낌은 매우 강력하다.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연상되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의 위기를 말하고자 하는 사진가의 의도 때문이다. 이런 확장된 느낌에서 그 사진은 뛰어난 물성을 갖추는 법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갖는 힘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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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부 이춘하>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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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부 이춘하>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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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부 이춘하>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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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부 이춘하>
ⓒ 신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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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부 이춘하>
ⓒ 신동필

강원 다큐멘터리 사업에서 지원을 받아 '핏줄로서의 민족'에서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ans)'으로 주제를 확장시킨 신동필은 이후 사진가로서의 존재 방식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사람을 찍어야 하는 다큐 사진가가 사람이 싫어지는데, 어떻게 작업을 한다는 말인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종류의 부정부패, 연줄, 인맥, 짜웅, 갑질, 나눠 먹기, 뻔뻔함, 치졸함... 이 모든 것들이 조합으로 만들어대는 무례와 무염치의 군상이 사진계를 쥐락펴락 하는 판에서 다큐 사진을 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까? 나도 그들처럼 도구로서의 사진을 버리고, 예술로서의 사진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2004년 즈음의 일이다. 

다큐 사진가로서의 존재론적 고민에다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문제가 겹치면서 사진가 신동필은 이내 카메라를 던지고 사진판을 떠나버린다. 그러다 2013년 홀연히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로 간다. 그리고 돌아오니, 10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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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티강 (2014)
ⓒ 신동필

네팔에서 신동필은 '우리'라는 범주 밖에 있는 노동자를 만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으로 유명한 포카라의 세티강변에서 모래, 자갈 등 골재를 파고, 개발 현장으로 나르는 노동자들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노동자. 가난한 노동의 현장에서 그들과 함께 한 1년 가까운 시간 속에서 신동필은 다시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그 '사람'의 힘 속에서 카메라를 다시 든다. 

사람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서일까? 그동안 나이가 들어서일까? 사진으로 말하는 방식이 더 유연해졌다. 강제하지 않고, 계몽하려 하지 않는다. 멀리서 바라보는 태도는 사진을 찍기 위한 프레이밍(framing)의 한 일환일 수도 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뷰잉(viewing)의 일환일 수도 있다. 가까이서, 세상에 더욱 밀착하여 사는 것이 치열하게 세상을 사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발짝 떨어져서, 멀리서 바라보듯 세상을 사는 것도 또 다른 세상살이일 수도 있다. 그러면 장자(莊子)와 붓다가 어떻게 마르크스와 통하는지를 몸소 깨달을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신동필의 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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