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휴전이후 남쪽에서 처음으로 '데프콘(DEFCON) 3'이 발동됐다. 일본 오키나와 주일미군기지에서 F-4 팬텀기가 한반도로 날아오고 미국 본토에 있던 F-111전폭기 5개 편대 20대가 한국에 배치됐다. 일본 해역에 있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대한해협을 향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인민군 전체 부대와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 등 정규군과 비정규군 전체에 전투태세돌입 명령을 하달했다.
1976년 8월 한반도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유는 단 하나. 한 그루 '미루나무' 때문이었다.
90년대 한 여가수가 경쾌한 목소리로 "포플러나무 아래 나만의 추억에 젖네"라고 부르던 미루나무(포플러나무). 한반도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엽수는 떠난 애인을 그리게 하는 한가로운 그저 그런 나무가 아니었다. 미루나무사건, 일명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40년을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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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8월 18일. 유엔군 측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자 북한군이 달려들는 장면. 결국 주한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 중위가 사망했다.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미루나무', 미군 2명을 죽게 하다
1953년 10월 19일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 회의에서 채택된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 본부구역의 안전 및 본부구역 수축에 관한 합의'(판문점 합의)에 따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이 설정됐다. 1976년 8월 17일까지만 해도 JSA는 군사분계선이 표시되지 않았고, 유엔군과 북한군 경비 병력과 민간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유엔군은 JSA내 군사분계선(MDL) 북쪽에 경비초소를 만들지 않았지만, 북한군은 남쪽에도 경비초소를 만들고 초소 옆에 도로 차단기도 설치했다. 물론, 양측이 자유로이 왕래했더라도 긴장은 여전했다. 1976년 7월까지 양측간 주먹다짐 등 충돌은 25차례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유엔군은 자신의 초소들을 서로 잘 보이도록 설치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려고 했다. 이 중 민감한 지역은 3초소. '돌아오지 않는 다리'(판문교) 바로 앞. JSA 서쪽 끝에 5초소를 만들고 항상 3초소를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미루나무'. 빨리 자라면서도 잎이 무성한 이 나무가 경비대원들의 시야를 가렸다. 이에 1976년 8월 3일 유엔군 경비대 작업반은 시야확보를 위해 미루나무 절단을 권고했다.
8월 6일. 유엔군 경비병 4명, 노무자 4명이 미루나무에 접근해 절단을 시도했다. 이에 북한군 경비병들이 제지해 작업은 중단됐다. 유엔사 측은 대신 미루나무 가지치기라는 차선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8월 18일 오전 10시 30분. 유엔군 경비단 장교 3명, 사병 7명, 노무자 3명이 다시 미루나무에 접근했다. 작업 책임자는 미군 보니파스 대위였다. 작업을 시작하자 북한군 경비단 장교 2명과 사병 8명이 다가왔지만, 가지치기라는 설명을 듣고 물러섰다. 북한군은 가지치기에 훈수까지 뒀다.
오전 10시 50분경. 북한군 경비단 박철 중위가 현장에 나왔다. 작업을 중지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무자들이 일을 중단하자 보니파스 대위는 작업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11시경. 북한 경비병 30명이 미루나무 근처로 몰려왔다. 박철 중위가 보니파스 대위에게 작업중단을 거듭 요구했다. 하지만 작업은 계속됐다. 그러자 박철은 시계를 풀어 손수건에 감싸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북한군 경비병들도 소매를 걷어부쳤다. 그는 "죽여"라고 외치며 보니파스를 발차기로 가격했다. 경비병들도 일제히 달려들었다. 작업에 사용된 도끼를 빼앗아 휘두르다 결국 보니파스 대위와 바렛 중위가 사망했다.
'미루나무', 한반도 전쟁위기를 불러오다
대통령 선거국면이던 미국시각 8월 17일 밤. 포드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지명을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 참석차 캔자스시티에 있었다. 경쟁상대인 레이건 후보에게서 베트남 패망 등과 함께 공산주의자에게 유약하다는 비난을 받던 포드 대통령은 워싱턴에 있던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단호한 조치를 지시했다. 성명이 발표됐다. "모든 책임은 북한에 있다."
8월 18일 오후 3시. 키신저 주재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열렸다. 훗날 부시 정부 국방장관을 지낸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대신해 클레멘츠 국방차관, 할러웨이 합참의장, 하이랜드 대통령 안보담당 부보좌관이 참석했다.
CIA는 북한의 계획된 도발사건이라고 분석했고, 참석자들은 모두 동의했다.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이 제시한 미루나무 절단 계획과 데프콘 등급 상향 조정이 결정됐다. 키신저는 워싱턴에 있던 중국 연락사무소장에게 북한이 자제하지 않으면 중대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8월 19일.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북한에 제안했다. 북한은 양측 경비장교회담을 제안해, 결국 이날 오후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담이 동시에 열렸다. 미국은 유엔군사령관 명의로 김일성 총사령관에게 사과와 보상, 관련자 처벌을 담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같은 날 유엔군사령부는 데프콘 등급을 4에서 3으로 올려 발동했다. 데프콘 3은 전투직전의 상황을 의미한다. 주일미군기지에서 F-4팬텀기가 한반도로 날아오고, 미 본토 F-111전폭기 5개편대 20대가 8월 20일 새벽 한반도에 배치됐다. 이날 오후 일본 해역에 있던 미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대한해협으로 향했다.
동시에 북한 김일성 총사령관은 인민군 전체부대와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근위대 전체 대원에게 전투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휴전 20여년 만에 다시 한반도는 전쟁위기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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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8월 21일 유엔군이 '미루나무제거작전'(폴 번얀작전)을 펼치고 있다. [사진출처-e영상역사관] |
'미루나무', 위기 속에 잘려 나가다
8월 19일.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미루나무제거작전'(일명 '폴 번얀(Paul Bunyan)작전')이 본국에서 승인됐다는 이야기와 함께 작전방향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미국 군인만 다치게 할 수 없다. 나무절단작전을 위해 태권도를 잘하는 한국 공수특전사 장병을 지원하겠다"고 박 대통령이 제안했다.
8월 20일.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박 대통령은 서종철 국방장관이 대독한 제3사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날 스틸웰 사령관을 다시만난 박 대통령의 태도는 '몽둥이'와 달랐다. "현재 나무자르기 계획에만 한정되어야 할 것이고, 북한이 상황을 상승시킬 때에만 진전된 조취를 취해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전달했다.
미군과 한국군을 대하는 박 대통령의 태도는 달랐다. 같은 날 '폴 번얀작전'의 한국군 임무를 맡은 박희도 제1공수 여단장에게 노재현 합참의장과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의 격려금을 전달하며 "도발해 오는 적을 철저히 응징하라"고 지시했다.
실제 박희도 여단장은 작전지휘는 미군이 갖고 있었기에 공식적인 지휘계통에서 벗어나 있었다. 제1공수 특전여단 병사 64명에게 박 여단장은 무장을 명령했다. 당초 미군 계획에는 한국군은 '몽둥이'만 들도록 되어 있지만 자동소총을 은닉하고 수류탄과 권총을 휴대했다. "위험하면 선제공격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8월 21일 오전 7시. 예고없이 유엔군 경비대 병력과 한국군 공수부대, 미군 공병단이 JSA에 진입했다. 5분 뒤 유엔군은 전화와 핸드 마이크로 미루나무 제거를 통보했다. 유엔군 병사들이 나무를 자르고 북한군 초소 앞 차단기를 제거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유사시 대비 병력이 배치됐다. 하늘에는 미군 F-4D와 F-111전폭기, 한국군 F-5전폭기가 선회했다.
미루나무만 자르던 미군과 달리, 한국군은 JSA내 북한군 초소를 부수고, '돌아오지않는 다리' 건너편 북한군에게 방탄조끼 밑에 숨겨온 무기를 보여주며 자극했다. 40분만에 미루나무는 잘려나갔고, 병력은 곧바로 JSA를 빠져나갔다.
'미루나무', 현재의 JSA를 만들다
같은 날 오전 11시.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간 비공개회의를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수락했다. 여기서 한주경 북측 수석대표는 사고에 유감을 표명하며 "우리측은 절대로 먼저 도발하지 않을 것이나, 도발이 발생하면 자위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김일성의 성명서가 낭독됐다.
8월 22일. 미 국무부는 김일성의 성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4시간 만에 '긍정적'이라고 입장을 번복했다. 미국 내 온건파의 설득이 먹혔다는 평가다.
8월 25일. 미국의 요구로 군사정전위원회 380차 회의가 열렸다. 양측은 협상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기로 가닥을 잡아갔다. 유엔군은 가해자 처벌과 재발방지를, 북한은 재발방지를 위한 JSA 양분, 양측 경비대의 상대방 지역 출입금지 등을 제안했다.
8월 28일. JSA 분할안은 '판문점 합의' 개정에 해당되므로,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 실무논의로 중지가 모아졌다.
8월 31일부터 9월 6일까지. 총 6차례의 비서장회의가 열렸고, '판문점 합의' 개정안이 합의됐다. JSA 내 군사분계선 표식 설치, 양측 군인의 월선 금지, 군사분계선 남쪽 북한군 초소 철거 등 현재 JSA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미루나무가 가져온 한반도 전쟁위기는 20일만에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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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루나무가 잘려나간 자리 표식. [자료사진-통일뉴스] |
'제2의 미루나무', 여전히 뿌리 내리고 있다
40년전 발생한 '미루나무사건'이 북한의 계획된 도발인지 우연인지 여부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이 미군철수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했고,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을 맞아 미국 내 주한미군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국 정부도 이 사건은 북한의 계획된 도발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북한이 치밀한 각본 아래 사건을 저질렀다고 보기 힘들다는 평가도 있다. 1975년 11월 유엔총회에서 처음으로 유엔군사령부 즉시 해체와 외국군 철수를 촉구를 담아 북한을 지지하는 국가의 결의안이 통과됐고, 사건이 발생한 기간에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비동맹정상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북한은 유엔총회 결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인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함부로 도발을 감행할 수 없었다는 것.
실제, 북한 한주경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는 김일성의 유감을 전달하며 "실질적으로 보니파스와 바레트의 살해가 실수였으며, 충돌은 우발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도 훗날 일본 마고토 오다와 만나 "사건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며, 우리 군인들은 도발의 함정에 빠져들었다"고 계획된 도발이 아니었음을 시사했다.
"사건이 분쟁을 일으킬 목적으로 북한 지도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어 추진되었는지 아니면 북한 지도부의 행동 패턴을 고려해 볼 때, 즉흥적이고 낮은 차원에서 자행된 과잉대응인지 판단할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전자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이 지연작전을 쓸 수도 있었지만, 오늘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수용하였다는 것과 빨리 모임을 갖기를 원한다는 것은 후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도 사건 발생 후 미 합참에 이같이 우발적이라는 의견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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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의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 표식. [사진출처-위키피디아] |
'미루나무사건'이 계획된 도발인가 우발적 사건인가 여부와 별도로, 미루나무 한 그루가 한반도 전쟁위기를 불러왔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는 여전하다.
북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는 지난 4월 판문점 일대 남측 군인들이 북측을 향해 불순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5월, 7월, 8월 등 연이어 대변인 담화, 공개장 등을 발표했다. "이 지구상에 유혈과 동란, 분쟁과 접전이 벌어지는 곳이 적지 않다고 해도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와 같이 일촉즉발의 핵전쟁위험이 항시적으로 조성되여있는 곳은 없다. 군사분계선을 제2의 6.25전쟁도발의 발화점으로 만들어보려고 피눈이 되여 날뛰고있는 호전광들의 무모한 책동부터 단호히 제압해야 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미루나무사건 발생 당시는 미국의 대선 기간이었다. 40년이 흐른 지금도 미국은 대선국면이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미 국무부가 대북 군사대응카드를 꺼낼 때 온건파가 설득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미국 내부 기류도 심상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8월 지뢰폭발사건으로 남북간 긴장이 고조에 이를 때, 남북은 극적인 '8.25합의'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지난 1월 4차 북핵실험으로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면서 '8.25합의'는 파기됐다. 정부의 대북강경발언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오는 22일부터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합군사연습이 실시된다. 정례적인 훈련으로 충돌없이 지나가느냐, 긴장상황이 재현되느냐. 40년전 잘려나간 '미루나무'는 여전히 판문점 한 가운데 '제2의 미루나무'로 뿌리내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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