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6년 8월 15일 월요일

정기열교수 대담,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정기열교수 대담, 탈북자 가족처벌 주장은 극악한 모함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8/16 [02:00]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집단탈북과 집단납치 논란이 일고 있는 북 류경식당 종업원 여성들 사진     ©

중국 북 식당 동포처녀들 집단탈북 의혹 사건이 총선 직전 터진지 5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박근혜 정부는 여전히 12명이나 되는 북 동포 처녀들을 꽁꽁 가두어놓고 목소리마저 들려주지 않고 있어 온 민족의 걱정이 더욱 커지고 있다.

주류언론에서도 이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데 반북극우언론들만 민변에 보내온 위임장은 가짜 부모가 쓴 것이라는 둥, 처녀들의 부모들이 집단구금되어 정신교육을 받고 있다는 둥, 식당 안전책임자가 처형되었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마구 퍼트리고 있다.

한반도 사드배치 결정, 3대전략폭격기 괌 증강배치 등 미국의 대북 군사적 압박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리자 북도 사소한 미국의 움직임에도 핵선제타격으로 대답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중국은 아직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남측에 경제보복조치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 전쟁이건 경제대란이건 무슨 사단이 곧 날 것 같다는 국민들의 우려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 전쟁위기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유일한 길은 남북화해와 협력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북 여성종업원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동포애적, 인도적 견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본지의 진단이다. 그렇게만 되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하여 민변에 북녘 부모들의 위임장을 전달해준 정기열 칭화대 교수와 긴급하게 서면대담을 진행하였다. 다음은 그 대담 전문이다.

▲ 정기열 교수     ©자주시보


1.정기열 교수님에 대한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남녘에서 흔히 말하는 “71학번”입니다. 동국대 불교철학과에서 1년 수학한 뒤 73년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으로 적을 옮겨 다시 대학을 시작한 뒤 군복무까지 마치고 1980년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그곳에서 쭉 살며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5년 모교 초청으로 서울에 돌아가 2학기를 가르친 뒤 우연한 기회에 2006년 봄에 중국사회과학원에 초빙되어 3년을 그곳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9년부터는 칭화대학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로 일하게 되어 오늘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편 2000년대 말부터는 일본대학들(게이오, 릿쿄, 교토, 리츠메이칸, 도시샤대학 등)에 초빙되어 자주 일본을 오가다 2011년부터는 동경 조선대학교에도 초빙되어 오늘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5년 3월에 뜻밖에 김일성종합대학 사회과학대학(사회과학부, 철학부, 국제관계학부 포함)에 초빙교수로 위촉되어 오늘은 북녘땅에서도 우리민족의 후대를 가르치게 되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011년부터는 매학기 중국, 일본, 북녘조국을 오가며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학자이기 전에 평생 ‘통일운동가’입니다. 지난 시기 30년 넘게 그랬듯 앞으로도 해외동포로서 끊긴 조국의 허리를 다시 잇기 위한 자주평화통일운동에 남은 생애도 모두 바쳐 일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2. 정교수님께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3. 탈북종업원 부모들이 민변변호사들에게 위임장을 작성해 보내주셨는데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게 된 경위는 어떠한가요?

 2, 3번 질문에 함께 답하겠습니다.
지금 기억에 아마도 5월 17일 오전일 것입니다. 다음 날 18일 종합대학 강의를 모두 마치고 19일 오전 출국 예정이었습니다. 당시 오래 아는 미국동포가 평양을 방문하였기에 저도 잠시 그분이 머물던 평양호텔로 숙소을 옮겨 그곳에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2010년 9월 칭화대학 주선으로 국제영문인터넷매체 <The 4th Media>(제4언론)를 창간하게 되면서부터 오늘까지 편집인 및 책임주필로 언론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2012년부터는 언론인 신분이 인정되어 북녘 어디서든 인터넷 사용을 허락 받아 체류 중에도 계속 언론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오전 호텔에서 언론작업 중 <자주시보>를 읽다 우연히 “12명 북녘종업원” 관련 기사를 접했습니다. 만약 “북녘가족들의 위임장을 구할 수 있다면 <국정원>에 의해 ‘감금상태’에 있는 12명 여성종업원 모두를 밖으로 데려 내올 수 있다”는 <민변>의 긴급호소문이 담긴 기사를 읽자마자 당시 저를 안내하던 최 선생에게 “내일(18일)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만약 허락되면 그분들에게 딸들을 구하기 위해 민변을 포함한 서울 여러 통일운동, 인권단체들의 구원대책 활동을 알려드리고 가족들로부터 받은 위임장을 19일 북경에 나가는 즉시 민변에 전달하겠다”는 뜻을 당국에 긴급히 문의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18일 아침 안내선생을 통해 북녘당국이 “적극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날 오후 3시 평양호텔 2층 면담실에서 12명 종업원 모두의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면담실에는 북녘당국에 부탁한 3명의 촬영기사들과 사진사 외에 아무도 동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발표된 당시 찍은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듯 먼저 천금보다 귀중한 딸자식들과 졸지에 생이별을 하고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근심에 가득찬 가족들을 진심으로 위로, 격려하고 현재 서울에서 진행되는 구원활동을 말씀 드린 뒤 부모님들이 면담실 현장에서 직접 작성한 위임장 원본을 모두 넘겨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12명 부모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한 사실이 논란이 되지 않도록 북녘 당국에 면담 과정과 위임장 작성 등 전 과정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담아줄 것을 사전에 부탁했고 지원을 약속 받아 다음 날 19일 아침 약속대로 평양순안공항에서 모든 영상 및 사진자료들을 정확히 전달 받았습니다.

가. 정교수님은 북한에 가시는 것이 자유로운지와 북한 주민을 만나시는게 자유로운지 여부 및 그 이유는 무언인지요?
네, 자유롭습니다. 통일문제를 붙들고 30년 가까이 수도 없이 북녘을 찾았고 방문할 때마다 북녘동포들을 자유롭게 만나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1987년에 취득한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참고가 될까 싶어 한두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기막힌 ‘아이러니’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이 도대체 뭐길래 미국동포는 그것 하나 갖고 있다고 마음대로 북녘을 오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분단 시기 70년 내내 남녘동포들에게 북녘땅은 그 누구도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동포들은 시민권 하나 갖고 있다고 북녘을 마음대로 오갈 수 있다는 분단현실이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서 그렇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분단현실이 정녕 기가 막힐 따름입니다.
남녘은 1945년 9월 8일 첫 시작부터 “미국오작품”(Made in USA)으로 70년 내내 “워싱턴의 ‘완벽한 지배’(Full Spectrum Dominance)를 받는 땅”이라는 세상의 오래된 지적이 틀리지 않다 생각합니다. 지역 농촌이라는 경북 성주군민들마저도 최근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사드사태가 온 세상 특히 가까운 이웃나라들(중국, 러시아)에게조차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실 곧 “남녘땅은 70년 내내 결국 미국식민지였구나!”라는 손가락질을 이젠 피하기 어렵게 된 것 같기 때문입니다.

미국시민권 관련 보탬이 될까 싶어 참고 삼아 좀 더 말씀드립니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지 7년 뒤 미국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때가 1987년입니다. ‘조국통일운동 차원에서 시민권 얻을 자격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청하자’고 결의한 대로 당시 <재미한청련> 회원들은 다수가 목적의식적으로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통일운동 차원에서 금단의 땅이었던 북녘을 마음 먹은대로 방문하기 시작하게 됐던 배경입니다. 그때 농담으로 ‘로마시민권’이라 부르던 미국시민권 덕에 저희들은 박정희전두환군사독재정권 시절 재일동포들이 숱하게 경험한 끔찍스런 ‘조작간첩사건’ 같은 탄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1989년 7월 임수경 당시 전대협대표가 참가한 국제평화대행진(분단선돌파사건) 사업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 차례 남북해외가 주축이 된 크고 작은 국제행사들을 조직하고 그 일들에 직간접으로 관계되었지만 아직 ‘조작간첩사건’에 엮이어 남녘땅 어딘가에 묶여있지 않은 채 오늘도 북녘조국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늘 길게 말씀드리는 바로 그 미국시민권 덕입니다. 앞에서 미국시민권 덕에 북녘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70년의 분단현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외세가 우리민족에 강제한 분단선돌파”를 목적으로 남북해외통일운동역량과 국제연대운동을 접목시켜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라는 구호를 내걸고 분단 이후 처음 시도한 평화행진 사업을 북녘에 제안키 위해 평양을 처음 찾았던 1989년 3월 22일부터 오늘까지 북녘을 방문한 총 횟수는 벌써 이미 몇 해 전 100차례가 넘었다고 합니다. 횟수가 50차례 넘었던 어느 때부턴가 저는 횟수 세는 작업을 아예 포기했는데 작년 2015년 북녘 <해외동포사업국>에 계신 어느 분이 알려주어 그런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권을 가진 덕에 남녘에서 감옥에 가는 대신 그러나 저는 모두 3차례 서울에서 ‘강제퇴거’ 되거나 ‘입국금지자’가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얼마 전 신은미 선생이 서울에서 겪은 것과 같은 경험이었죠. 그 과정 오늘까지 저는 모두 3차례 도합 16년 남녘조국에는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강제퇴거’ ‘강제추방’ 첫 경험은 1988년 8월이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에서 열린 <남북학생회담출정식>에 13명 국제반전평화인사들을 조직해 참가한 것이 문제가 되어 종로경찰서 외사과에서 안기부 ‘덕수궁 지하안가’로 넘겨져 “3일 내리 잠 안재우는” 일종의 ‘고문’이었던 ‘밤샘취조’ 뒤 당시 밖에서 모두 걱정했던 ‘조작간첩사건’ 대신 여권에 “5년 강제퇴거”란 낙인만 찍힌 채 ‘강제추방’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뒤 두번 더 비슷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전쟁 시기 미국군대에 의해 희생된 수백 만 민간인학살만행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전 민족적 차원에서 조직된 <남북해외전민특위>가 2000년 5월 결성되었을 때 당시 저는 사무총장에 피선되면서 전민특위 첫 사업으로 다음 해 2001년 미국에서 국제민간법정을 설치할 것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2001년 6월 남과 북(비자발급이 거부되어 영상으로)에서 참가한 전쟁 시기 민간인학살만행 생존자들, 피해자 가족들 6-70명, 그분들을 지원하는 남녘과 해외의 수백 명 통일운동가들 그리고 케네디/존슨 행정부 시절 법무장관 역임 뒤 평생을 마치 죄를 씻듯 국제반전평화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램지 클라크 변호사(당시 재판에서 수석검사 역을 맡아 자신의 조국을 ‘전범국가’로 기소) 등 모두 26개 나라들에서 참가한 세계양심들과 함께 전민특위는 뉴욕, 워싱턴에서 전쟁 뒤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코리아국제전범재판’을 설치하게 되었습니다.
전범재판 직후인 7월 초 저는 전민특위 사업 차 남녘에 들어가기 위해 서울에 갔으나 공항에서 뜻밖에 ‘입국금지자’가 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강제추방’된 뒤 이후 5년을 또 다시 남녘땅에 못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10년 뒤 저는 그와 똑같은 경험을 또 다시 또 하게 됩니다. 2010년 3월 26일 발생한 “천안함침몰사건’ 약 한달 뒤부터 <통일뉴스>에 사건 관련한 글을 연재하던 중 2010년 5월 “천안함 관련 글을 계속 쓰면 …”이란 단서가 붙은 일종의 통보성 위협을 북경 주재 국정원 참사로부터 전달 받은 뒤 그때로부터 또 다시 6년 남녘에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국여부도 확인할 겸 가족결혼식 참가를 위해 2013년 서울입국을 다시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김포공항에서 ‘입국금지자라 들어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또 다시 ‘강제추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통일운동 관련 개인사의 일부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태어나 자란 남녘땅에선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이 “죄”가 되어 1984년부터 감시조사대상, 수배, 미행, 도청, 강제퇴거, 강제추방, 입국금지를 거듭하며 산지가 근 30년이 되는 반면 1989년 처음 방문했던 북녘에선 거꾸로 통일운동한 것이 “최고최상의 공로”가 되어 방문 때마다 진심으로 맞아주는 동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만나는 모든 북녘동포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과 믿음, 존경을 끝없이 받아 안으면 산지가 근 30년이 됩니다.
어디를 원망하자는 것이 아니라 통일문제 관련 남과 북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다른 비극적 분단현실을 새삼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북을 “자유롭게 오가며” 북녘동포들과 “자유롭게 만나” 대화도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길게 개인사까지 더해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분단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탈북종업원 부모들에게 위임장을 받는 과정에서 부모들과 어떻게 연락을 하게 되었는지요?
앞의 1, 2 질문에 대한 답에서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다. 탈북종업원 부모들은 어디에서 만나 위임장을 받으셨는지요?
역시 위 1, 2에서 충분히 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라. 위임장을 받기까지 몇 차례나 만나셨는지요?
12명 여성종업원들의 모든 부모들과 당시 탈출에 성공한 동료종업원 7명을 5월 3일 평양 국제기자회견장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을 직접 만난 것은 가족들 위임장을 민변에 보내기 위해 스스로 이 일에 뛰어 들었던 5월 18일 평양호텔 면담실에서였습니다.

마. 현재도 탈북종업원 부모들이나 가족들과 연락을 주고받으실 수 있는지요?
오늘 자주시보 서면질문에 답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저는 종합대학 강의 차 1주일 전부터 북녘에 와 있습니다. 이번 체류 기간에도 8월 22일 떠나기 전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이미 이곳 당국에 문의하고 답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만나 뵙고 가게 되면 이후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바. 허강일(지배인)의 부모나 가족도 만나셨나요? 허강일은 신혼으로 부인이 있다고 알려져있는데 어떠한지요?
아닙니다. 허강일의 부모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의 부모와 가족은 아마 평생 얼굴을 들고 살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떻게 얼굴을 살고 살 수 있겠습니까? 허는 아마 죽어서도 자신이 지은 죄를 씻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를 그가 알기는 하는지 정녕 의심스럽습니다. 12명 나어린 딸들을 가족과 생이별시킨 천추에 용서못할 범죄를 그는 아마 평생 가도 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12명 ‘집단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종업원 얼굴사진은 그들을 하루 빨리 구해내기 위해서인지 북녘당국이 먼저 나서 온 세상에 알리고 소개하는데 반해 허의 사진은 단 한번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이유, 무슨 배경에서 그리 된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가 비록 평생 씻지 못할 죄를 짓고 자기의 조국은 물론 제 아내마저 버리고 도망간 천하 몹쓸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이유가 혹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인권을 지켜주고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의문입니다. 

▲ 법원이 요구한 대로 보완수정한 민변 위임장에 서명하고 날인을 하는 북 여 종업원 서경아 양의 부모, 지장을 찍는 부모의 표정을 보니 왜 이렇게 눈물이 솟는지, 세상에 저런 표정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분노와 걱정에 사무친 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주어야 사람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죽었는지 살았는지라도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4. 위임장을 작성한 것은 부모들이 자발적인 의사에서 한 것인가요? 
물론입니다. 물어보나마나입니다. 남녘에서 흔히 듣는 이런 류의 질문은 그 자체가 사람의 도리가 뭔지도 모르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의 질문이지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제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가족들을 만났던 현장인 평양호텔 면담실에서 부모님들이 위임장을 직접 작성하여 저를 통해 민변에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들이 국가조직에 의해 집단납치된 것이 불보듯 명확한 상황에서 가만히 주저 앉아 있겠습니까? 주로 미국(일본, 한국)에 의해 70년 극단적으로 ‘악마화’된 북녘사회를 세상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그곳은 “사람사는 곳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 뒤에 숨은 분단시대의 지극히 병적이고 비극적이며 슬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5월 17일 우연히 접한 <자주시보> 기사가 제겐 참으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한편 국정원에 의해 집단납치된 것이 확실해보이는 12명 딸들이 북녘동포 어느 그 누구만의 딸자식이 아니라 제 자신의 딸자식과도 같다는 생각 또한 앞섰습니다. 동시에 제게 이번 사건은 많은 매체들이 이미 지적했듯 “권력위기에 처한 청와대가 총선결과를 염두에 두고 성급히 벌린 또 하나의 실패한 북풍사건”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이 남녘 친미사대세력의 70년 계속되는 또 다른 하나의 대형분단범죄사건이었기에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남녘동포들의 투쟁에 그 어떤 주저함 없이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각오로 뛰어 들었습니다.

가. 북한당국에서 부모들을 협박하여 위임장을 작성하게 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어떠한지요?
이 질문 또한 앞의 질문과 마찬가지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문제는 70년 분단시대 내내 끝없이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1945년 8월 해방된 우리민족에게 분단이 강제된 뒤 70년 내내 이번 사드배치 결정에서처럼 철두철미 미국지배를 받는 남녘땅에서 쓰는 북에 대한 보도 가운데 과연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길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기획탈북사건’으로 흔히 불리는 이번 사건 같은 경우 국정원이 행동주체인 조건에서 물어보시는 대단히 악의적인 그런 류의 조작된 추측성 보도, 억측, 의혹들에 대해 길게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나. 위임장을 작성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하셨나요?
네, 위임장 작성과정을 모두 다 동영상으로 담아 이미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동영상 및 사진 원본은 모두 서울 민변에 인편과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또 <자주시보>에도 다는 아니지만 관련 동영상과 사진들을 기사보도에 참고가 되시라고 역시 보내드렸습니다.

다. 위임장을 작성한 부모들이 실제 부모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부모들이 맞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하셨는지요?
이런 류의 의혹 역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지난 8년 “이명박근혜시대”라고 불리는 최악의 남북관계시대 서울주류언론매체들이 북에 대해 쓰고 말하고 보도하는 거의 모든 자료들은 남녘과 세상이 북녘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100% 거꾸로 잘못 이해하도록 하여 기존의 70년 ‘북한악마화’를 더욱 심화시키는데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북녘을 수시로 자유롭게 방문하는 수많은 해외동포들과 세상사람들은 서울권력과 남녘의 주류언론매체들이 하루가 멀다고 악마화하는 북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병적으로 악의적이고 거짓과 중상, 모략, 조작, 날조로 가득한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남녘동포들이 북녘사회의 진실에 접할 수 없도록 해서 남과 북의 형제가 끝없이 서로 갈등하다 불신에 빠진 채 서로 대결하도록 남북을 끝없이 갈라놓고 있는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70년 분단지배정책을 하루 속히 극복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가 만난 가족들이 실제 부모들이 아니다”는 류의 악의적인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선 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합니다. 

5. 탈북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속아서 탈북한 것인지데 대해 알고 계시거나 이를 판단하게 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요?
만약 12명 북녘종업원들의 소위 “탈북” 사건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때로부터 옹근 4개월이 훌쩍 넘도록 청와대, 국정원, 통일부가 주장하듯 그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아직 단 한명도 세상에 내놓고 공개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울 <민변>이 추진한 서울지방법원의 공개증언대에 국정원 주장이 사실이라면 왜 그들을 법정에 내보내 그들 말처럼 “자발적으로 서울에 온” 사실을 세상에 밝히지 못하는가입니다. “빨갱이”라 불리는 <민변> 변호사들은 둘째치고 유엔최고인권대표소 성원들이 국정원을 방문해 북녘여성들과의 접견을 요구해도 그들에게조차 접견을 허용치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까지 드러난 사건 관련 전후사정과 모든 정황은 청와대, 국정원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소위 ‘집단탈북’이라는 정부 주장과 달리 북녘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백주대낮에 국정원 즉 국가조직에 의해 “집단으로 납치되어” 서울에 “강제로 끌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웅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이 국가조직에 의한 일종의 국가테러행위사건으로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폭로될 경우 서울권력 자체가 공중분해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히 중대한 국가테러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저는 북녘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12명 북녘종업원들의 소위 “집단탈북” 사건은 당시 모든 상황, 조건, 앞뒤 사정이 그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한 것이 아니라 집단으로 납치됐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 탈북종업원들이 중국에서 일을 할 당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있는지와 있다면 그 내용은 어떠하며 북의 부모들이 그것을 공개할 수 있는지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사진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5월 3일 기자회견 때도 그리고 ‘로동신문’과 ‘우리민족끼리’ 등 북녘매체들에서 계속 소개하고 있기에 그 질문에는 좀 더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습니다. 네, 있습니다. 민변의 법정투쟁과 자주시보 같은 언론들에 혹시라도 그런 자료들이 도움이 된다면 부모님들을 설득해 구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번에 뵙게 되면 적극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민족끼리에는 주지하듯 그런 편지, 사진들이 틈틈이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약 민변으로부터 요구가 있을 경우 제 판단에 12명 딸들이 가족, ‘동무’(친구)들과 주고 받은 편지와 사진들을 소개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 윗 사진은 통일화보에 실린 사진을 통일뉴스에서 소개한 북의 유명 최삼숙 가수의 사진이고 아래는 납치된 딸 리은경 양의 접견과 석방에 관한 모든 일을 민변에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작성하는 모습, 이 사진은 민변에서 인신구제신청을 할 때 법원에 제출되었다. 위 아래 얼굴이 같다.     ©자주시보

나. 탈북종업원들 및 그 가족들의 북한 내에서 생활수준이나 지위는 어떠한가요?
5월 3일 기자회견장에서 본 그리고 5월 18일 직접 만나본 12명 종업원들의 가족(부모)들은 거의 모두 평범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소위 ‘높은 당간부의 자식들’이니 뭐니 하는 서울의 무책임한 보도처럼 그런 부모는 없었습니다. 100차례 넘게 북녘을 방문하고 있는 제 눈에 서울언론이 악의적으로 보도하는 그런 ‘높은 당간부’처럼 보인 부모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가 본 것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 중엔 이미 서울에 보도된 것처럼 북녘만 아니라 남녘에도 잘 알려진 남녘의 ‘국민가수’와도 같은 ‘인민배우’ 최삼숙 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본 그는 어느 다른 어머니들과 똑 같은 평범한 어머니였습니다. 세상에 알려지기론 그의 남편은 촬영기사라고 합니다. 사회주의국가인 북녘은 세상 대부분 나라들과 대단히 다른 사회입니다. 제 눈에 그분들 모두의 생활수준은 최소한 외관상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북녘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들처럼 개인 재산규모에 따라 그들이 사는 집과 타고 다니는 차들 입는 옷들이 천지차이로 다른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북녘사회는 70년 가까이 매년 1년 12달 365일 미국으로부터 여전히 “핵침략전쟁위협”과 온갖 형태의 경제봉쇄, 금융제재를 받으며 사는 나라입니다. “세계유일초강국” 미국도 모자라 세계경제대국 일본, 분단된 남녘땅의 친미사대권력 나아가 워싱턴이 지배하는 유엔조직 포함 세상 거의 모든 것을 상대로 70년 여전히 가열찬 반제자주사회주의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북녘이 세상 거의 대부분 나라들과 참으로 많이 다른 이유일 것입니다.

6. 탈북종업원들이 한국에 입국한 이후 가족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낸 사실이 있는지요.
제가 알기론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 제3자를 통하거나 외국을 통하는 등 간접적으로 연락을 받은 것은 있는지요? 
답: 알아보지 않았지만 제 판단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이곳에 물어보겠습니다.

나. 북녘가족들이 한국정부에 직접 연락을 취하거나 혹은 북녘이 남녘정부에 연락한 사실은 있는지요?
답: 전자는 없고 후자는 있되 직접 하지 않고 언론을 통해 한 것 같습니다.

7. 탈북종업원들이 인신구제청구 재판에 출석해서 자발적으로 왔다고 진술하면 북한 가족들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 사실인지요?
세상에 그리도 뻔뻔하고 기상천외한 거짓이 또 다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들이 직접 서울에 나가 딸들을 만나겠다는 제안은 북녘에서 맨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녘에는 국정원이 만들어내는 그런 류의 대단히 유치하고 저질스런 거짓과 허위정보, 조작정보들을 믿고 사는 마치 암흑세상에 사는 것과 같은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 현재 탈북종업원 가족들의 신변의 안전상태는 어떠한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분들은 본래 당신들이 하던 직장생활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고 생활에서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졸지에 딸자식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면서 살아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만약 자신들에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달라진 것이라고 합니다. 기쁨과 웃음이 사라진 채 피눈물 흘리며 사는 오늘의 부모들 처지를 빼곤 오늘 생사를 알 수 없는 12명의 종업원 가족들에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고 듣고 직접 대화 속에서 확인한 사안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질문 자체가 미국지배 세상이 북에 대해 70년 반복하고 있는 끝없는 ‘악마화선전전’이 빚어내고 있는 분단현실의 한 비극적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북한당국이 가족들을 묘향산 교육시설에 집단 구금한 뒤 사상교육을 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었는지요?
‘집단구금’이란 말 자체가 참 재밌습니다. ‘집단납치’라는 말은 청와대 지시로 국정원이 저지른 이번 사건을 설명하는데 틀리지 않을 것 같은데 “부모들이 북녘당국에 의해 집단구금”되었다는 말 자체는 대단히 틀린 잘못된 설정 같습니다. 그런 류의 악의적인 낭설은 십중팔구 이번 사건으로 궁지에 빠진 국정원 주도의 날조된 악의적 허위정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그런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 확신합니다. 그런 발상 자체가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북녘사회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라고 생각합니다. 북녘사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나면 직접 물어보긴 하겠지만 아마도 가족들 반응은 십중팔구 모두 “헛소리 하고 있다, 꿈에서 깨라”고 야단치실 것 같습니다. 남쪽세상이 주장하는 그런 류의 근거없는 유치한 주장들 가운데 오늘 물어보신 가족들이 이번 사건이 문제가 되어 “집단으로 사상교육 받고 있다”는 주장은 더욱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역시 금시초문입니다. 지나가던 소도 하도 기가 막혀 웃겠습니다.
북녘동포들은 70년 누구나 매주 “토요학습”을 합니다. “집단학습”이라고 이해해서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북녘에선 누구나 매주 학습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만약 북녘동포들의 ‘매주집단학습’을 서울이 ‘사상교육’이라고 해석해서 그리 주장했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도 이번 사건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되어 받는 일종의 ‘문책성 특별사상교육’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북녘동포들은 자신들이 속한 매 조직에서 누구나 크고 작은 집단학습을 평생하며 삽니다.

다. 만약 탈북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탈북하여 한국에 입국한 것이라면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탈북자 가족들은 가족 중 누가 탈북했다고 해서 그들의 삶과 생활에 그 어떤 변화도 없이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 가족과 조국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 때문에 가족의 한 성원으로 도망간 그들이 세상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수치스러워 얼굴 들고 살기가 어려울 수 있는 심정의 변화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녘정부와 일부 탈북자들이 남녘에 도망가서 주장하는 탈북자 가족들이 겪는다는 만화 같은 숱한 소설이야기들은 제가 알기론 사실과 한참 거리가 먼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12명 종업원들 가족 모두는 오늘 그대로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거짓과 조작을 기본으로 하는 국정원조직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 끝없이 조작해서 세상에 퍼트리는 즉 “탈북자 가족들이 잡혀가서 숙청되고 감옥에 간다” 류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남쪽 표현처럼 정녕 “썰”에 속하는 악의적인 허위정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12명 종업원 가족들 모두는 오늘도 그대로 다 자신들의 본래 생활을 계속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라. 탈북종업원 사건과 관련 책임자(안전교사 등) 6명이 5월 5일 평양 강건종합군관학교에서 공개처형되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 사실인지요?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3류의 싸구려 만화 수준의 저질스런 질문입니다. 70년 계속되는 ‘북한악마화’에 언제나처럼 동원되는 판에 박힌 전형적인 노래 가사 같은 질문입니다. 세상은 특히 남녘동포들은 북녘사회를 정녕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평생을 속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아 살지 않기 위해 끝없이 만나 대화해야 하는데 미국이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지요. 결국 투쟁 외에 진정한 자유와 독립, 주권을 되찾을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8. 탈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지배인 허강일의 신상에 대해 알고 계신게 있는지요?

가. 허강일이나 그 아버지가 빚이 매우 많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떠한지요?
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실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그런 일종의 돌연변이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회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여하를 불문코 그는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에게 공과 시간을 들여 무엇을 알고 파악해야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허와 중국에서 함께 일하다 탈출에 성공한 7명 여성종업원들에 의하면 그는 “중국에 나간 뒤 줄곧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그는 특히 “도박과 방탕한 생활로 중국업주에게 빚까지 지게 되면서 결국엔 국정원 유혹과 매수에 넘어가 오늘과 같은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허와 몇년을 함께 일한 여성종업원들의 증언을 소개해드리는 것으로 답에 대신하겠습니다.

나. 허강일의 가족관계에 대해 알고 계신지요?
모릅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허 같이 완벽하게 망가진 인간을 더 이상 자세히 알 가치가 구태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 북한으로 돌아 간 다른 종업원들은 허강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요?
5월 3일 국제기자회견장에서 4월 국정원납치사건 당시 탈출에 성공한 7명 종업원들은 일관되게 허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가)에서 말한 것처럼 허랑방탕한 생활하다 결국에는 실패한 인간이 되고만 경우 같습니다. 남녘에서 태어나 자라 오늘 60대 중반이 되기까지 첫 30년 가까이는 남녘에서 그 뒤 25년은 미국에서 그리고 지난 10년은 주로 중국, 일본에서, 특히 1989년 30대 중반 나이에 첫 방북한 때로부터 오늘까지 근 30년 100여 차례 넘게 북을 방문하면서 언젠가부터 쓰기 시작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남녘과 미국 같은 세상은 사람이 망가지기가 대단히 쉬운 반면, 북녘은 망가지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다. 한편 북녘은 사람의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남녘과 미국 같은 세상은 그리 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다.” 이번 사건과 허강일을 생각하며 다시 되새겼던 생각입니다. 허처럼 완벽하게 망가진 자가 북녘에도 있구나 싶어서였습니다.

▲ 북에서 유괴되어 집단납치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중국 주재 북 류경식당 여 종업원 12명의 여성들     ©자주시보

9. 정교수님께서 가족의 위임장을 2차례나 받아 주시는 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계신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앞에서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가. 이 사건이 남한과 북한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남북관계가 역대 최악으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분단현실의 비극적 실체가 온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남녘이 오늘 어느 정도의 극한 위기로까지 내몰리고 있는지를 역시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만 추종하는 세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마치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경쟁이라도 하듯 완벽하게 망가진 추악한 사대매국세력의 모습을 세상천지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국정원이 주도한 “기획탈북” 사건으로 불리는 곧 국가권력기구에 의한 집단납치(테러) 행위에 다름없는 이번 사건과 2014년 세월호사건, 특히 가장 최근 발생한 2016년 7월 사드사태처럼 오늘 망가질대로 망가진 친미사대매국세력의 극단적 행태는 역설이지만 한편 세상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사대망국시대’로 불리는 이명박근혜시대 8년은 역설이지만 “오래 잠자고 있던 일부 우매한” 민중까지 불러 일으켜 세우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12월 대선 전 <통일뉴스>에 기고한 여러 편 글에서 이명박근혜시대는 “재앙시대”가 될 것이라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극심한 상상키 어려운 지난 몇년의 재앙시대가 오늘 역설적으로 나라와 역사에 거꾸로 공헌하고 있는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4년 청와대가 보여준 극단적 형태의 “무능, 무식, 무지, 무통” 곧 “4무시대” 쯤으로 불러야 옳을 듯 싶은 이명박근혜암흑시대 8년은 분단시대 내내 역대 친미사대보수세력을 거의 기계적으로 줄곧 지지했던 경북 성주 같은 지역의 농촌 사람들조차 깨어 일어나도록 도울 정도로 주지하듯 오늘 완벽하게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완벽한 망가짐이 세상과 민중을 일깨우고 있는 역설적 현실에 웃을 수도 없도 그렇다고 웃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은 70년 남녘의 역대 분단권력 중 가장 완벽하게 망가진 역대 최악의 친미친일사대권력이 오늘 속수무책으로 어떻게 무너져내리고 있는지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12명 북녘종업원 기획탈북사건은 오늘 역대 최악의 사대분단권력이 무너져내리고 있음을 온 세상에 웅변으로 보여준 하나의 대표적인 역설적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향후에도 이 사건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실 생각이신지요?
물론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12명 북녘의 딸은 어느 누구 남의 자식만이 아니라 내 자식, 아니 우리 모두의 자식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가 진정한 인류애적 관심과 사랑,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듯 이번 일은 그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여 스스로 그들을 구해내는 일에 뛰어든 사건입니다. 이들을 하루 속히 구해내는 일은 평생 하고 있는 조국통일운동과 근본에서 같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