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고 싶다면 ‘피해자’가 돼 보면 된다. 대부분 사건에서 ‘피해자’가 되는 순간 당사자는 바로 알게 된다. 대한민국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확인 받는 순간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입’이 없어진다. 입도 목소리도 없이 재갈이 물린 채로, 피해자가 직접 피해사실과 사건 경위를 밝혀내고 증명하고 심지어 주변을 ‘설득’해야 한다. 이 높고 험한 철벽 앞에 좌절하지 않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실은 불가능해 보인다. 눈물과 신음소리만으로 뭘 어찌해볼 수 있겠는가.
반면 많은 경우 가해자는, 할 일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혐의’가 돌아오려면 웬만해서는 아주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정황은 잊히고 증거는 점차 사라지기도 한다. 가해자가 ‘조직’일 경우 책임자가 누구인지조차 웬만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럿일수록 밝혀지지 않고, 강자일수록 숨겨진다. 때로는 ‘피해자’가 너무 극성스럽게 억울함을 호소한다면서, 여론이 악화되다 못해 주변이 가해자를 편들어 주기도 한다. 두둔하고 동조까지 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시끄럽다고.
피해자는 뼛속까지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피해자는 굉장히 빨리 ‘국민’에서 제외된다. ‘국민’에서 제외되는 방식은 이미 오랜 인습과 관례는 물론이고 분단 체제 이용은 필수이며 아주 광범위하고도 다채롭다.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입이 없다. 들어줄 타인들의 귀도 없다. ‘피해자’는 제일 먼저 사건 현장으로부터 배제된다. 목소리를 빼앗긴 데 이어, 눈도 가려진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그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때부터 발이 묶인다. 이후로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소식조차 제한적인 것만 제공된다. 피해자가 외치는 ‘진실’은, 풍문으로도 떠돌지 않고 묻힌다.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온다. 손도 묶인다. 피켓 하나도 들기 힘들어진다. 만약 들게 된다면, 그 하나의 피켓을 묻어버릴 산더미 같은 대응 공세에 압사될 각오를 해야 한다. 피해자는 머지않아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 이 사회는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으로 사건 자체를 묻어버리고 싶어 한다.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수장된 희생자 중 단원고 학생들은 미수습자 9명 포함 262명이다. 현재 추정으로는 304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희생자 대부분이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유가족’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유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참사의 사고 경위는 무슨 이유인지 처음부터 오리무중이었고, 공식 직함을 가진 ‘관계당국’의 모든 ‘관계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시간만 끌었다.
그렇다. 그 아이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점차 ‘피해자’가 되어갔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지나친 언론 공세에, 만에 하나라도 반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유가족은 뭔가 ‘대우 받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는 그저 피해자가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당국의 매뉴얼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쪽에 가까웠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더 잃을 것은 없다’며 맞섰던 “세상 물정 모르던” 부모들은, 그 슬픔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지독한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2014년 4월16일 이후부터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 어떤 비극보다 참혹했던 이 참사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피해자들보다 가혹하게 이 새끼 잃은 부모들을 몰아세웠다. 영화 <나쁜 나라>는 그 탄압처럼 무자비했던 1년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았다. 세월호 시민 참사기록위원회 작업의 일환으로 정일건, 이수정 감독이 공동 연출을, 김진열 감독이 책임 연출을 맡았다. 영화를 보기 전의 예상과는 달리, 압도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막힘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탄식조차 그냥 삼켜야 했다. 이것은 지난 1년 9개월이 넘도록 우리가 매일 보아온 상황.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은 없지 않은가. 그저 1년 9개월을 두 시간으로 압축했을 뿐이다.
하나의 일관성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관계자’로 오신 높으신 분들의 모두 한결같고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모두 짠 듯이 표정도 안색도 없었다. 누구도 말다운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임에도 전혀 언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분절되고 엉켜버린 말들조차, 그나마도 그날의 ‘대표’만 입을 뗄 뿐이었다. 나머지는 입조차 열지 않았다. 실은 ‘공직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 분위기였다. 침묵의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기다림에 지치고 지친 유가족들의 푸념과 항의가 터지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잘못’에만 지적이 오갔다. 그게 다였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 드물게 얻어낸 ‘성과’에 가까웠다.
세상에 이런 불행한 참사도 또 없겠지만, 이런 잔인한 탄압도 또 없을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만나려야 만날 수도 없고, 어마어마한 경찰병력만이 유가족들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전시 상황이 따로 없었다. 슬픔이라니. 그 또한 너무나 고와서,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았다. 매일 밤 부모들이 지쳐 쓰러지듯 몸을 뉘어야 했던 찬 바닥과 폭우 속의 노숙, 그것은 세월호 유가족이 되어보기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진짜 고통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토록 불행한 나라. ‘나쁜 나라’이기 전에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나라 같은 저기는 어디인가. 피해자에 대한 비인도적인 ‘매뉴얼’을 바로잡는 것조차, 피해자들이 그 입도 손도 발도 묶인 몸으로 맨바닥을 기어가며 해내야 하는 일인 것인가.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생명 자체가 존중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나와 내 가족만은 무사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가. 그 믿음과 희망을 지키는 방법은, 생명이 존중 받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싸우는 도리뿐이라고 유가족들은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기 위해 연대하지 않는 이상, 안전 사회는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말이다.
영화 <나쁜 나라>를 보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 곁에서 잠시나마 그 여름과 가을 겨울을 함께 해봤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될 것이다. 나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음이, 그나마 지금 우리에게는 위안이고 구원이라 믿고 싶다. 저 심연에 갇힌 세월호로부터 반드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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