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영쇠 선생의 영정 © 전주 수요촛불 채주병@sanha9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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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정많은 마음씨, 투절한 애국심, 강직한 새사회 건설 의지로 평생 민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안탑깝게 영면에 든 고 유영쇠 선생의 생전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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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0여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유영쇠 선생이 1월29일(금) 새벽 6시 12분 영면에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은 원광대병원101호에 마련되어 있으며 발인은 내일 31일 일요일입니다.
30일 토요일 6시에 원광대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진행합니다.
유영쇠 선생이 얼마나 인정이 많고 투철한 진보적 미래 개척 의지를 지녔는지, 통일을 얼마나 절절히 염원하였으며 그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는 약력과 이재봉 교수의 '내가 본 유영쇠 선생'을 아래 소개합니다.
이재봉 교수의 글에 담긴 유영쇠 선생님의 투철한 애국심, 남녘의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예정되어 있던 북녘 송환도 미룬 유영쇠 선생의 불굴의 통일의지가 가슴을 울립니다.
유영쇠 선생님 약력
1928년 • 10월 30일 2남 4녀 가운데 막내로 출생 1937년 • 가정형편 곤란으로 학교 진학 못하고 지역 야학에서 공부 1942년 • 금산 광산 등 임금노동자 생활 1945년 • 성인교육강습소 수학 1945~1947년 • 야학당 개설 및 운영, 동네 대소사 주관하면서 동네사람들의 신망 받음. 1947년 • 이리중 입학 1948년 • 형편곤란으로 김제중앙중 편입. 김제 누님 댁에서 숙식. 1949년 • 김제농고 1년 입학 1950년 • 김제농고 재학중 의용군 1기 자원 입대, 귀향 후 복학. 동료 7명과 같이 정읍 산외면으로 입산, 소대 교양사업 책임자 활동 1950년~51년3월 • 유격대 지원, 정찰대 활동 1951년 9월 • 금구 오봉리 박씨 의사 안내 후 복귀 중 1차 선 단절과 이후 선 복귀 1952년 3월 • 상목굴 자폭(군당위원장 박봉수 등 사망), 2차 선 단절 1952년 4월 • 2차 선 단절. (군사작전위주의 지대 개편. 유격대는 소부대 분산활동) 1952년 7월 • 2차 선 복귀 후, 현지지도책 임명 1954년 4월 • 김제군당 위원장 “온동수” 동지와 함께 황산에서 체포 1954년 4월 이후 • 온동수 군당 위원장 총살형, 유영쇠 선생 무기징역형 수감 1954~1983년 • 고법에서 무기형 최종확정, 감옥생활, 감옥투쟁. 1983년 2월 • 장기수 복역 중 출옥 1983~2013년 • 출옥이후 노숙인 시설인 익산 자선원 거주 및 업무 지원. 양심수후원회, 통일광장, 범민련남측본부, 전주평통사 등 단체활동 참여 평화통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현장투쟁에 지속 참여 2003년 • 이라크 파병 반대 국회앞 집회 참여 2004년 • 국가보안법 폐지 1000인 국회 앞 단식 농성 참여 2005년 • 쌀협상 비준안 반대 여의도 농민대회 참여 2006년 •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0년 • 제주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1년 • 한미 FTA 비준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3년 • 전립선암으로 원광대 병원에 입원하시는 길에 4.19 희생자 추도식 참여 2014~2016년 • 지병으로 익산 원광효도마을 실버의 집(요양원) 거주 2016년 • 1월29일 새벽 6시12분 지병으로 향년 89세 사망
내가 본 유영쇠 선생
이재봉 (원광대 사회과학대학장, 남이랑북이랑 대표)
2001년인가 2002년이었다.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법대 학생이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장기수 어르신을 알게 됐는데 그 분께서 내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어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듣고 있던 북한 관련 수업에 관해 소개했더니 호기심을 표하시더란다. 매 학기 두 강좌를 개설하는데도 수강 신청 기간 첫날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 있던 강좌인데다 일반인 청강생들도 더러 있을 때라, 누구든지 기꺼이 환영하겠다고 답했다.
그 다음 주 수업에 비쩍 마른 70대 노인이 맨 앞에 앉아 내 말 한 마디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해가며 청강했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직접 물었다. 계속 들어도 되냐고. 한 달 쯤 지나 종강하게 되자, 학기 중간 이후부터 수강했으니 다음 학기 첫 수업부터 출석하고 싶다고 했다.
새 학기 개강부터 종강까지 16주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지각, 조퇴, 결석하지 않고 맨 앞자리를 지켰다. 서울에서 모임이 열려 동지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다음날 수업이 있으면 심야 버스나 기차를 타고 꼭 익산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아침 9시 시작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유영쇠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연을 들어보니 1950년대 초 고향인 김제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4년 붙잡혀 1983년까지 29년간 감옥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출옥 후 갈 데가 없어 부랑인 수용시설인 이리자선원에 몸을 맡기고 있다니 기막히게 기구한 신세였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었다. 내가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무슨 모임을 가져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내가 이끌던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라 택시는커녕 버스도 맘껏 타지 못한 채 고물 자전거에 올라 여기저기 강연이나 모임에 참석하며 회비도 꼬박꼬박 냈던 것이다. 가진 게 적어 많이 내지 못한다고 안타깝고 미안해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날 꽤 신뢰하게 된 모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05년 무렵 장기수들을 북녘으로 송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은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쪽에 남아 있어야 할지 북쪽으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향인 남쪽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북쪽에도 피붙이는 없다고 했다.
“선생님, 여기서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오셨는데, 북녘으로 가시면 우선 몸이 편하시겠죠. 당국에서 집도 마련해주고 원하면 결혼도 주선해준다니까요. 그러나 맘은 편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기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많이 보시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젊었을 때 목숨 내걸고 싸우며 추구했고, 감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전향을 거부하며 추구해 오신 사회주의의 이상을 북녘 체제에서 찾지 못한다면 좌절감이나 배반감까지 맛보시지 않겠어요?”
“교수님, 나는 내 육신이나 마음이 편하고 편하지 않고는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어야 통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계십시오. 북녘 인민들이야 모두 통일을 바라지 않겠어요? 원치 않는다고 해도 지도자가 통일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따를 테고요. 그러나 여기 남쪽에서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잖아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통일을 원하도록 이끄셔야죠. 거기서는 통일운동 하실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선생이 더욱 존경스러워졌다. 남쪽을 택할지 북쪽을 택할지 갈림길에서, 난 맨 먼저 몸과 맘의 안락함을 떠올렸지만, 70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온 노 혁명가는 육신의 고통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평화와 통일에 몸 바칠 생각만 하고 있지 않은가.
2013년 설날 아침 아내와 모처럼 선생의 거처 이리자선원을 찾았다. 거의 매월 수천 명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내 글에 가끔 전화나 이메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터였지만, 거동이 불편한 듯했다. 몸내가 역겨울 정도로 풍겼어도 80 중반의 노인이라 그러려니 했다.
2014년 3월 말 아침 선생이 전화를 해왔는데 받으니 말이 없었다. 두어 번 반복됐다. 오후엔 내가 몇 차례 전화했지만 선생이 받지 않았다. 다음날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00요양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4월 초 아내와 찾아간 요양병원에서 먼저 간호사를 만나 선생의 병세를 물어보니, 2013년 9월 입원했는데 치매와 전립선암 등 무려 14가지 병을 지니고 있단다. 병상에 누워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생과 말과 글을 섞어 겨우 대화를 나눴다. 나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해 유골을 평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유언이었다. 생전엔 남쪽에서 통일을 위해 헌신하라고 권했던 터라, 사후엔 북녘에서 사회주의 이상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보태는 게 좋을 듯해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선생을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얘기지만, 당신의 생질이 있는데 그의 외할머니인 선생의 어머니 옆에 묻혀야 한다고 반대한단다. 유골을 둘로 나눠 어머니와 동지들 옆에 절반씩 묻히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병원 체제를 개선해 달라고 했다. 환자를 먼저 배려하는 게 아니라 병원 운영의 편의를 앞세운다면서. 선생의 안전을 위해 가끔 몸을 병상에 묶는 간호사들을 탓하는 것 같아 병원을 바꿔 주겠다고 하자, 자신의 몸이 좀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도 운영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혼자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며, 정신적으로는 오락가락하는 중증 환자지만, 역시 혁명가다운 발상이었다.
4월 중순, 지금까지 선생을 보살펴온 평화운동가들과 협의해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어우러져 있는 원광효도마을로 옮겼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틈틈이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십 수 년 전 <북한 사회의 이해>를 수강하며 선생을 소개했던 법대 졸업생이 경상도에서 달려오니 선생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바로 어제였다. 의 (義)로 맺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행복한 모습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기를 염원한다.-2014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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