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수소탄 실험을 '8.25 합의' 위반이라며 정부가 지난 8일 대북 확성기방송을 재개했다. '8.25 합의' 중 '비정상적인 사태'에는 북한 핵실험이 포함된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에 따르면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대북 확성기방송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어 자칫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11일 오전 정례브리핑에서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 조건과 관련해 "최종 목표는 북한이 비핵화하고 핵무기 개발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북핵 문제 해결은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부가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의사가 없음을 피력한 셈이지만 향후 출구전략을 구사할 여지를 스스로 없앤 문제발언으로 보인다.
김 대변인은 "북한의 핵실험은 '비정상적인 사태'인 것으로 '8.25 합의'를 위반한 중대한 사안"이라며 "북한이 '8.25 합의'를 위반하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벌일 경우에는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말하면 비정상적인 사태를 위반했으니까, 위반한 것을 고치려면 그전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 아니냐"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정부 차원에서 다시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8.25 합의' 당시 '비정상적인 사태'에 대한 남북 간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북한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이 '비정상적인 사태'에 해당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이 북한 핵실험 중단과 등치할 수 있는 사안이냐는 문제도 제기된다.
지난해 8월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타결된 '8.25 합의'는 세 번째 항에서 '남측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으로 방송 중단을 명시했다. 당시 상황에 비춰, 여기서 언급된 '비정상적인 사태'는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내 도발을 의미한다.
'8.25 합의'는 지난해 8월 발생한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지뢰폭발사건으로 촉발, 남측이 대북 확성기방송을 재개하고, 북측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통일부는 '남북 고위당국자 접촉 결과 해설자료'에서 "대북 확성기방송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당한 대응이고, 북한이 이번과 같은 도발을 하는 '비정상 사태'가 발생하면, 확성기방송을 재개할 수 있게 함으로써 북한의 대남 도발을 실효적으로 억제함"이라고 밝혀, '비정상적인 사태'는 DMZ 내 도발로 해석하고 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도 합의 이후 국회 외통위에 출석, "이번 도발 사태와 같은 비정상적 사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합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즉, '비정상적인 사태'를 좁은 의미로 규정해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고 남북 관계개선을 꾀한 것이다.
북한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8.25 합의' 직후 관영 <조선중앙TV>에서 "일방적으로 벌어지는 사태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일방적인 행동으로 상대측을 자극하는 행동을 벌여 정세만 긴장시키고 있어서는 안 된다"며 합의 준수를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하자 '비정상적인 사태'에 대한 규정을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게끔 넓은 의미로 풀어헤쳤다. 정부는 8일 정오 대북확성기 방송 재개를 선언하면서 "비정상적 사태를 규정한 8.25 남북 합의에 대한 중대한 위반"이라고 밝혔다.
한민구 국방장관도 지난 7일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에 참석해 "비정상적인 사태는 적대의지와 행위가 입증된 북한의 도발로 인적, 물적 피해를 입거나, 예견되는 상황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즉, 북한의 수소탄 실험은 '적대의지가 입증된 도발로 인적, 물적 피해가 예견되는 상황'이라고 판단, 대북 확성기방송을 재개하기로 한 것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합의 당시 '비정상적인 사태'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지만, 국민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면서도 "핵 실험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민족에 대한 중대한 도발 아닌가.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대규모 군사훈련이나 SLBM 발사 등은 "비정상적 사태 규정의 선을 왔다 갔다 한다"면서 "장기적으로 볼 때 위협이 될 수있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준 것이 아니므로 상황이 다르다"고 해석을 달리했다.
이와 관련해,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무엇이냐에 대해 남북이 구체적으로 합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논쟁거리가 된다"며 "핵실험을 비정상적인 사태로 규정한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북한이 '비정상적인 사태'를 한.미 군사훈련으로 규정해 군사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말했다.
정부가 국제사안인 북핵 문제를 '비정상적인 사태'로 규정해 '8.25 합의' 위반이라고 선언함에 따라, 스스로 출구전략을 세우지 못한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을 위해 북한이 핵실험 중단을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핵 실험 중단을 선언할 리 만무할뿐더러, 오히려 이번 수소탄 실험을 두고 미국의 '전략적 인내에 대한 답'이라고 주장하며 평화협정 체결 카드를 거듭 들고나오고 있다.
게다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자위적 조치이자 합법적 권리"라고 수소탄 실험 정당성을 강조하고, 김기남 당 비서는 "전쟁접경에로 몰아가고 있다"며 대북 확성기방송 재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결국 북핵 문제와 대북 확성기방송을 연계시킨 정부의 판단은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을 이유로 취한 대북 제재조치인 '5.24조치'가 아직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남북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로 남아 있는 것과 유사한 형국이다.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 해법에 대해,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국방부 혼자서 판단할 일이 아니고 정부 차원에서 판단할 일"이라고 말했고, 통일부 당국자도 "정부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논의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대북 확성기방송이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어떤 전략적 대응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대화와 협상이냐, 남한도 핵무기를 갖느냐의 기로인데 둘 다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양무진 교수도 "북핵 문제는 국제적 사안이다. 정부가 이에 대해 대처할 방법은 없고 국민에게 보여줘야 하니 대북 확성기방송 재개 카드를 꺼낸 것 아니겠냐"며 "그렇다고 대북 확성기방송을 중단하기 위해서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정부 스스로 출구전략이 없다"고 꼬집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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