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더불어민주당 입당한 세월호 참사 유가족 법률대리인 박주민 변호사
문형구 기자 mmt@mediatoday.co.kr 2016년 01월 29일 금요일
예상과 달리 2014년에 이어 2015년에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세월호였다. 여러 빅데이터 분석에서, 그리고 뉴스 키워드에서 세월호는 ‘메르스’와 ‘교과서 국정화’ 등을 제치며 부동의 1위를 지켰다. 지금도 출근길이면 옷깃이며 가방끈 등에 노란 추모리본을 단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어떤 유별난 상황도 천재지변도 아니었고, 구조를 ‘안 해서’ 벌어진 참사라는 것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잠재적 희생자라는 공감대도 원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오래 간직되는 분노의 이유는 또 있다.
참사 발생 2년이 되어가지만 아직 ‘세월호’는 그 자리에 멈춰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이 세월호 승무원의 급변침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침몰원인조차 미궁에 빠졌다. 미궁에 빠진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선내에 있던 승객을 왜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했는지, 해경은 왜 선원들만 급히 태우고는 70미터 이상 세월호에서 멀어졌는지, 오히려 밝혀진 게 뭔지를 헤아리는 게 빠를 정도다. 그래서 국민들은 잊지 못 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지금 시점에서가 아니라 2014년에도 그랬다. 세월호 참사의 발생 시점인 2014년 4월16일, 그로부터 다섯달이 지난 그해 9월 정기국회 즈음엔 이미 야당에서도 세월호는 잊혀지고 있었다. 이는 필요하다면 여러 가지 ‘팩트’로써 증명될 수 있다. 여러 면에서 국회의원 한 명은, 유가족들의 서러운 싸움이 만들어낸 특조위 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야당 국회들의 실상을 말하자면, 유가족에게 절실한 자료요청 하나도 예산 챙기기, 지역구 관리 등 다른 업무에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이런 자료요청이란 보좌진 한명이 10분만 투자하면 되는 게 대부분이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이 그랬다는 얘기다. 한 손에 셀 정도를 제외하면 세월호는 의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이 들어가면 야당 분위기가 좀 달라질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국회의원 권한을 세월호 진상규명에 쏟을 한 사람을 얻는 건 맞다. 박 변호사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세월호 전문가다. 세월호 가족협의회 장훈 진상규명분과장(단원고 2학년8반 고 장준형 학생의 부친)은 “박주민 변호사만큼 세월호 참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솔직히 몇 명 안된다. 이번 입당도 그 연결선상에서 움직인 거라 본다. 우리 유가족들이 이루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드는 용기로 결정한 것 같다”며 “그 용기에 유가족들을 대신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진상규명, 인양문제 그리고 가족들을 전부 아우르는 사람’이기에 유가족들은 박 변호사의 입당에, 어쩌면 박 변호사 본인 보다 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 박주민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
28일 오후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 이공 사무실에서 박주민 변호사를 만났다. 다음은 박 변호사와의 인터뷰 전문.
-변호사가 된 계기가 있는가?
“대학 다닐 때 신도림동 철거촌을 우연히 도와주게 됐었다. 구청장을 설득하면 영구 임대주택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가 있어서 구청에 간 일이 있었다. 구청장이 만나주겠다 했지만 몇시간을 기다리고도 못 만났다. 눈이 펑펑 왔는데, 그 날 처음으로 변호사가 돼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변호사가 되면 구청장을 만나게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입당 발표가 나고서 ‘세월호 변호사’라고 이슈가 됐다. 이 호칭이 어떤가?
“저한테는 영광스럽고 또 과분한 표현이다. 세월호라고 말하는, 많은 분들이 6.25 이후 충격이 가장 큰 사건으로 기억하실 사건에 외부인으로선 가장 근접해 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니, 저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국회의원이 된다면 세월호 국회의원이 되는 셈인가?
“당연히 저의 과제다. 어렵겠지만. 또, 된다면 다른 하고 싶었던 일들도 할 것이다. 강정, 밀양도 있고. 일정 규모 이상 국책사업을 할 경우 거주민들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듣는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 또 국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각종 조약, 협정들을 규제하는 절차법을 만드는 것,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악법적 요소들을 고치는 것 등등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세월호 때는 많은 국민들이 다 도움이 되고자 하셨잖나. 저도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될 지 몰라 처음엔 청운동 동사무소(청와대 입구) 앞에 제가 직접 집회신고를 하고 촛불집회를 했다. 페이스북에 오시라고 사람들을 모아서 발언도 듣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다. 그러다 가족분들 곁에 먼저 가있던 변호사 중 한 변호사가 나는 팽목항을 담당할 테니 너는 안산을 담당해라 해서 가족분들 옆에 있게 됐다. 처음엔 듣도보도 못한 친구가 도와준다고 하니 믿음을 안주셨다. 회의실 청소하고 자장면 배달오면 먼저 자리를 만드는 그런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회의 때 서기도 하고 안건도 정리하고 자문도, 상담도 해드리게 되었고, 국회에서 농성하고 협상할 때 역시 가족들 도와드리고 그랬다.”
-5월16일에 박근혜 대통령과 유가족들 면담이 있었는데, 그 때도 같이 작업했나?
“정부에서 갑자기 연락을 해와서, 그럼 무슨 얘기를 해야하나 밤새 회의를 했다. 가족들은 변호사 동석을 요구했는데, 그쪽에선 변호사는 절대 안된다고 연락이 왔다. 가족들은 처음 당하는 일이고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거라 도움이 필요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가는 일이다. 가족분들만 들어가셨다.”
-유가족 분들과 농성도 함께 했나?
“그 때 7월인가부터 11월까지 4개월간 국회에 있었고 청운동, 광화문에 결합했다.”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을텐데?
“처음에 많이 울었던 때가 KBS 항의방문을 올라오셨을 때다. 몇몇 분들은 아이들 영정 사진을 들고 오셨다. 가족들이 진을 치고 있자, 몇명 들어오라고 하더라. 그런데 밖에서 했던 말과 달리 안에 들어가니 바로 이사를 만나게 해준 게 아니라 국장인가가 왔다. 그래서 가족들이 ‘앉자’ 해서 또 앉으셨다. 둘러앉았는데 앞에 들고 계신 영정사진에 얼굴이 있잖나. 서로 얘기하시는 거에요. ‘똑닮았네’ ‘하나도 안닮았네’ 원래 잘 안 그러는데 그날은, 나도 눈물을 많이 흘렸다.”
-법률 상담 말고 유가족들이 다른 얘기도 하나?
“그런 얘기 많이 하신다. ‘이를 싹 예쁘게 교정해줬는데, 그래서 가버린 것 같다, 해주지 말 걸’. ‘사춘기라 말을 안들어서 미웠는데. 너무 후회스럽다’. ‘내 딸은 나랑 완전 친구다, 친구 같지 않냐’ 이런 자랑도 많이 하시고. 사진도 정말 많이 보여주셨고. 가족분들은 누군가에게 얘기는 하고 싶은데 사실 친척들에게도 얘기를 하기는 어려워 하신다. 친척들이 위로하려고 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그래서 모임에도 안 가신다. 저한테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하신다. 아이들 성격, 옷차림, 좋아하는 것, 동아리 활동, 성적이라든가. ‘담배 피운다고 할 때 꾸짓지 말고 차라리 담배라도 좀 피게 해 줄 걸. 담배 피우게 해줬으면 배 옥상에서 담배 피우다 살아나왔을 텐데’. 이런 말도.”
-이제 참사 2년을 앞두고 있다. 진상규명 활동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사실 진상규명은 특조위가 가동되면서 원활하게 됐어야 하는데, 여러가지 방해가 있어서 시작 정도 해본 뒤에 문을 닫게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를 타개해야 하는데.. 권한조정, 예산확보, 기한연장 이런 것들이 시급히 되야 한다. 2월부터 법개정이나 예산확보 움직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개인 생각이다.”
▲ 박주민 변호사. 사진=이치열 기자 |
-진상규명 과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침몰원인 부분도 계속해서 의문이 남아 있다. 인양된 선체에 대한 정밀 조사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인양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당부분 공백으로 남아 있다. 선체조사 할 특조위의 권한이나 예산확보도 안 돼 있다. 구조실패에 대해서는 청문회가 있었지만, 지난 청문회는 상한을 해경청장으로 둔 청문회였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제하에서 대통령이 여러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는 상황이므로, 시스템상 반드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타워의 역할,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진행해야 하는거다. 제도적 미비라거나, 선박 안전 관리, 해피아라 불린 문제 등 여러가지가 있다.”
-입당과 관련해 유가족들과 논의가 있었나?
“그렇다. 원래 더민주당에서 발표를 예정한 날짜는 지난주 금요일이었다. 금요일날은 못하겠다고 했다. 가족들과 더 논의해야 한다고. 그래서 금요일에 (유가족들이)임시로 임원회의를 잡으셨고, 총회 때 총회 무대에 올라가서 말씀드리고 질문도 받고 했다.”
-무대에 올라가서 뭐라고 얘기를 했나?
“요지는 그거였다. 제의가 왔는데, 필요한 것 같다. 단 지금 상황이 좋진 않다. 지금 간다고 뭔가 보장받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국회의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고 된다면 하고 싶다. 그러니 마음을 내보려 한다고 말씀드렸다.”
-더민주당과 성향이 맞겠나?
“비대위원들을 보면 다 좋은 분이긴 한데, 시민사회나 진보를 대변해 줄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중도정당, 추상적이고 애매한 그런 당으로 가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도 있다. 그래서 저도 우려된다.”
-유가족들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자주 뵙고 연락하고 하니 이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상이 규명되어서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 거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얘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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