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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1일 일요일

미대사관·박<정권> 코리아연대1인시위탄압 9일째 ... <미대사관 요청 있었다> 확인


  • 미대사관·박<정권> 코리아연대1인시위탄압 9일째 ... <미대사관 요청 있었다> 확인


    31일, 254일째 미대사관앞과 맞은편 광화문광장, 서울구치소앞에서 코리아연대(자주통일민주주의코리아연대) <박근혜퇴진, 미군떠나라>동시다발1인시위가 진행됐다. 코리아연대의 합법적인 1인시위에 대한 탄압이 9일째 이어졌다. 특히 이날은 미대사관앞 뿐만 아니라 맞은편 광화문광장 1인시위까지 막음으로써 전날에 비해 탄압강도가 배가됐다.

    특히 코리아연대의 합법적1인시위를 경찰이 불법·폭력적으로 탄압하는 이유가 <미대사관요구>때문이라고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코리아연대 김병동공동대표가 1인시위를 탄압하는 경찰에게 그 이유를 묻자 <미대사관앞 1인시위를 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대사관측의 요청이 있다>며 <1인시위가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에 김대표는 답변을 재차 확인하고 <미대사관의 요구에 복종해야 하나? 미국의 의사라면 시민의 요구는 묵살해도 되는 건가?>라고 하면서 <미국에서 몰래 탄저균시험을 한 사실이 밝혀진 것만 16차례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1인시위를 하고 있다>·<국민의 생명이 소중한가? 미대사관의 요구가 소중한가?>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어 <지난 3년간 매일 여기에서 1인시위를 했다. 주권이 있는 국민이 자기의사를 밝히겠다는데 미대사관이 1인시위를 막을 수 있는 근거가 없다>며 미대사관과 경찰의 불법행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허나 경찰은 이번에도 폭력적으로 김대표를 미대사관건너편으로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1인시위구호판까지 파손됐다. 또 주변에서 촬영하던 시민을 폭력적으로 제지해 순식간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과정에서 김대표를 비롯한 주변시민들이 경찰에게 관등성명을 요구했으나 일체 묵살하며 불법·폭력행위를 저질러 시민들의 비난을 샀다.

    경찰은 미대사관앞1인시위 뿐만 아니라 미대사관맞은편 광장1인시위도 불법적으로 막았다. 광장으로 건너가려는 코리아연대회원을 횡단보도앞에서 막고 양팔을 잡고 억류함으로써 합법적인 1인시위를 탄압했다. 이 과정에서도 관등성명은 대지 않았다. 이에 코리아연대회원은 <미대사관앞 1인시위를 경찰이 막는 권한이 무엇인가?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국가가 맞는가?>라고 엄중 항의했다.

    <미대사관의 요구> 때문에 합법적인 1인시위를 9일째 탄압받고 있는 코리아연대는 <합법적인 1인시위를 탄압하는 종로서의 불법·폭력행태의 이유가 미대사관의 요구 때문이라는 사실은 남코리아가 주권이 상실된 나라임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준다>며 <미관상의 이유로 1인시위를 막아달라고 했다는데 진짜 미관을 어지럽히는 것이 코리아연대의 1인시위때문인지, 불법·폭력경찰 때문인지 똑똑히 돌아보라>고 일갈했다.

    한편, 미워싱턴DC 백악관앞 인도에서는 25명까지 신고없이 집회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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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영기자

2016년 1월 30일 토요일

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아들 빈소에서 "건배", 군 지휘관 잊을 수 없다

16.01.30 17:39l최종 업데이트 16.01.30 17:3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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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진 장병들을 단체조문 하러 가는 군인들.(기사내용과 관련 없음)
ⓒ 권우성

이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된 계기는 2011년 12월, 육군 모 부대 소속 김아무개 일병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였습니다. 당시 군 헌병대는 김 일병의 유족에게 "평소 고인이 앓고 있던 우울증이 악화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자살'이라고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김 일병의 아버지는 반발했습니다. 군 수사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며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버지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매우 충격적인 글과 만나게 됩니다. 글을 쓴 이는 숨진 아들과 함께 근무했던 전역병. 한 때 세상에 큰 화제가 되었던 그의 양심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살인을 방관했고, 나 또한 살인자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역병은 김 일병이 사망하게 된 전후 과정에서 벌어진 부대내 비밀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김 일병의 죽어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왜곡과 은폐, 조작. 김 일병의 죽음에 부대측의 잘못이 없었다는 군 헌병대 수사와 전혀 배치되는 폭로였습니다.

이러한 전역병의 도움으로 김 일병의 아버지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사건의 경위를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권익위는 진실을 밝혀냅니다. 알고 보니 김 일병은 입대한 후 선임병에게 폭언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 행위를 당했으며 또 자살하기 전, 이미 여러 차례 자살도 기도했으나 부대측이 이에 따른 적절한 조치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권익위는 더 놀라운 비밀을 알게됩니다. 부도덕한 군의 치부가 드러난 그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빼돌린 조의금으로 헌병대 격려금도 줘

김 일병의 아버지가 권익위에 진정한 내용은 크게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들의 사망 원인 규명'과 또 하나는 '수상한 돈과 관련한 의혹'이었습니다. 내막은 이렇습니다. 김 일병의 아버지는 아들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찾고자 부대를 상대로 정보 공개 청구를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서를 입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문서 중 김 일병의 아버지는 매우 뜻밖의 문장을 읽게 됩니다. 장례 과정에서 단 1원도 부대에서 받은 사실이 없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부대가 '조의금을 전달했다'며 쓴 보고서였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줬다는 이 조의금의 실체가 무엇인지 밝혀달라고 진정서를 낸 것입니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권익위에 따르면 김 일병의 장례가 진행되던 이틀째 밤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김 일병의 장례를 지원한다며 김 일병이 속한 부대의 이아무개 상사가 빈소에 있었는데 이때 이 상사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 상사가 유족의 돈인 조의금 부의함을 멋대로 연 후 그 안에 든 300만 원을 꺼내 가져간 것입니다.

한편 이 상사는 이 날 이후에도 몇 번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조의금을 더 꺼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 후 추후 보고서에서는 이 돈을 "유족에게 전달했다"며 쓴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돈은 유족에게 전달된 적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권익위가 확인한 이 돈의 사용처였습니다. 이 상사는 이 돈 중 일부를 김 일병의 사건을 수사중인 헌병대와 기무반장에게 '격려금' 명목으로 줬습니다. 이 상사는 왜 김 일병의 사망 경위를 조사하던 헌병대에게 돈을 줬을까요? 더구나 죽은 김 일병의 조의금으로 왜 수사중인 자에게 돈을 준 단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사는 이후 부대 대대장에게도 30만 원을, 그리고 대대와 여단 주임원사에게 80만 원을 격려금으로 줬다고 합니다. 죽은 사병의 조의금을 빼돌려 군 간부끼리 '격려금'이라며 나눠 쓴 황당한 사건, 이른바 '조의금 횡령 사건'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으로 삼겹살 파티? 정말 끔찍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국민들은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군이 썩어도 이정도로 썩었나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관진 국방부장관 역시 대노했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즉각 수사에 나서도록 군 검찰에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사에 나선 군 검찰은 이후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표합니다.

김 일병이 사망한 그해, 김 일병이 사망한 해당 부대에서 연말을 맞이하여 삼겹살 파티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날 여단장을 비롯하여 부대의 주요 간부가 전원 참석했는데, 이날 구입한 삼겹살과 술 등을 빼돌려진 김 일병의 조의금 중 일부로 샀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 부대 간부가 다 같이 나눠쓰고 먹어버린 기가 막힌 사건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군 검찰은 이들 부대 간부 중 3명을 횡령 혐의 등으로 기소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피해 사례가 과연 김 일병만의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저는 군 사망사고 피해 유족을 상대로 확인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유족에게 군이 장례 중 제대로 예우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저는 아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몰랐고, 유족도 몰랐던 또 다른 군의 '추악한 민낯'. 오랜 기간동안 관행적으로 벌어진 '군 영현비' 집행과 관련한 비리였습니다.

경위는 이렇습니다.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장례 비용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현비'로 불리는 이 돈은 한국 전쟁중인 1951년 9월 28일 첫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군 복무중인 군인이 사망할 경우 국방부는 계급과 상관없이 유가족 접대비와 화장비, 장의비 등의 명목으로 영현비를 지급해 왔는데 2011년 12월까지는 이 금액이 총 2,674,000원 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액수만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민원이 거듭되자 국방부는 2012년부터 300만 원 늘린 5,674,00원을 영현비로 지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바꾼 규정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영현비 중 1,674,000원은 '유족 여비'로 반드시 유족 통장에 지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00만 원은 유족의 장례를 지원하라는 지침이었습니다.

빼돌린 돈은 김 일병의 '조의금' 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국방부의 지침과 달리 영현비가 바르게 집행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유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1,674,000원의 '유족 여비'도 군 부대가 주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조의금 뿐만 아니라 '유족 여비마저' 빼돌린 것입니다.

만약 영현비가 정상 집행되려면 이렇게 되어야 했습니다. 먼저 부대측이 유족에게 영현비에 대해 설명한 후 '유족 여비'를 받을 통장 계좌를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게 될 영현비 400만 원을 장례 기간중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유족과 협의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장례 비용이 초과되지 않도록 계획적 지출을 도와야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족들의 경험은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자식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다들 넋이 빠진 상태로 영안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대측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이후 술과 고기, 음료와 떡 등 음식물을 빈소로 가져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족들은 처음, 부대가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전우가 죽었다고 부대가 장례는 치러주는구나"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돈이 국방부가 주는 장례비였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지막 발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장례 비용을 전부 부대가 내는 줄 알고 뭘 사 오든 참견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부대 행정 보급관이 종지 한 장을 가져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장례 중 지출 비용이라며 유족에게 "지급받은 영현비보다 초과한 비용"이라며 그 돈을 유족에게 달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요구받은 초과 비용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 보니, 최소 수 십 만 원에서 많게는 최대 800만 원을 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기억은 발인날 경험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장례 후 당연히 음식과 음료, 술, 과일이 남게 됩니다. 그런데 부대측은 유족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전부 자기들이 가져 갔다고 합니다. 남은 술과 음료는 반품도 가능할 텐데 왜 부대측이 그것을 일방적으로 가져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초과 비용은 유족에게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더구나 아들이 군에서 자살했다는데, 부고를 널리 알리는 유족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대부분 가까운 친인척 20~30여 명 정도가 조문객의 전부인데 어떻게 국방부가 지급한 영현비 5,674,000원을 전부 다 장례 비용으로 썼다는 것일까요?

군인 장례비로 지급하는 '영현비'는 눈먼 돈?

도대체 그 많은 음식과 술, 음료, 떡은 누가 다 먹었을까요. 바로 장례기간 중 조문한 부대의 간부 등 군인들이었습니다. 유족들은 '자살로 처리된' 아들의 빈소로 매일같이 군인들이 조문을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술과 고기, 밥과 떡과 국, 과일, 음료수를 먹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 모습이 유족에게는 마냥 고맙기만 했을까요?

더구나 부대측이 이러한 음식을 구입하다 보니 영현비로 지급된 총액 5,674,000원을 다 썼다고 하는데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어 믿을 수도 없다고 유족은 말합니다. 추후 권익위가 확인해 본 결과 영수증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았으며 또 있다 해도 대부분이 간이 영수증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허위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문제로 유족 중에서 부대측과 다퉜다는 사람은 또 없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그래서 아들을 화장하러 가는데 이런 문제로 싸울 기력이 없어 황당하지만 '그냥 부대측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는 것이 대부분의 유족 말이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확인한 후 국회 김광진 의원실은 2014년 9월경,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세 가족과 함께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유족 여비를 받지 못한 또 다른 피해자를 밝혀주고 또한 미지급된 유족 여비를 어디에 썼는지도 분명하게 밝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 권익위는 지난 2012년 이래 육군에서만 모두 360건의 영현비가 집행되었는데, 그중 64명의 유족에게 군이 1,674,000원의 여비를 지급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부대측은 이처럼 지급해야 할 유족 여비를 장례 비용으로 전부 다 써 버렸다고 변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변명을 믿는 유족은 없었습니다.

권익위는 이후 육군본부에 미지급한 유족 여비를 전부 지급하도록 결정하는 한편 관련자와 해당 부대를 징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이후 육군본부는 영현비 집행 과정을 투명하게 정비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했습니다. '영원히 계속될 뻔 했던' 영현비 비리 관행이 그나마 바로 잡히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요.

아들 죽은 빈소에서 진급 축하 건배 '참담'

그런데 이 영현비 문제를 조사하던 중 듣게 된 한 어머니의 사연은 정말 참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2013년 육군에서 복무중이던 아들을 잃은 이아무개 하사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어머니 역시 영현비와 관련한 설명을 부대로부터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례 중 어머니는 부대에 미안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부대가 자기들 돈으로 음식과 술을 사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너무 미안해서 "우리 돈으로 사 올테니 그만 사라"는 말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돈이 유족에게 주는 돈까지 주지 않은 채 제 멋대로 부대가 썼다는 것을 알고 난 후 어머니는 '우롱당한 기분'이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부대가 돈을 쓰게 해서 미안하다며 쩔쩔매던 우리가 얼마나 바보처럼 보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머니 가슴에 남은 일은 장례 중 빈소에서 본 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아들이 죽어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데 같은 부대 장교들이 조문 와서 빈소 한쪽에 앉더라구요. 그런데 그때 귀에 들리는 말이 있더라구요. 장교 중에 한명이 진급을 한 것 같아요. 그걸 축하한다고... 큰 소리로 떠들면서 빈소에서 축하 건배를 하더라구요. 건배를. 제가 정말 그 장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거기서 건배를 하는게 사람입니까?"

어머니는 "이게 전우애냐"며 울부짖었습니다. 아들은 죽었는데 그 빼돌린 조의금으로 삼겹살 파티를 하는, 그리고 유족에게 지급해야 할 여비도 주지 않은 채 그 돈으로 술과 떡과 고기로 회식을 하는, 그러다가 죽은 동료의 빈소에서 진급을 축하하는 건배를 외치는 모습에 어머니는 한이 맺힌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게 정말 말이 되나요?

군은 바뀌어야 합니다. 예능 프로인 '진짜 사나이'에서 포장되는 전우애가 아니라 목숨을 잃은 전우와 그 유족에게 '정말 같이 울어주고 배려해 주는' 대한민국 군대가 되기를 요구합니다. 적어도 전우와 그 전우의 유족에게 이런 문제로 한을 품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정말 비극입니다.

만약 군 고위 관계자가 이 기사를 읽는다면, "우리 군을 매도하는 참 나쁜 기사"라며 불쾌해 하실까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이런 문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대한민국 군, 이젠 정말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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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침 발표 일주일 만에 8천명 결집, 총파업‧현장투쟁 선포

헐값의 총알받이 용병, JP가 말하지 않은 베트남전

[ 김종필에게 묻는다 ]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란다? 명분도 실리도 없었던 비참한 전쟁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1월 31일 일요일
지난 3월2일부터 중앙일보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을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증언록은 중앙일보 기자들과 작가까지 동원돼 114회까지 이어졌고, 웹툰으로 재구성됐으며 책으로도 만들어질 중요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하지만 증언록 곳곳에는 역사왜곡과 미화의 흔적이 보입니다. 미디어오늘은 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증언록의 이면을 살펴보고 중앙일보가 하지 않은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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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전에 먼저 빵을 먹고 자란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가 중앙일보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군부독재시절 경제성장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한 말이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남긴 명언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가 변형돼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통용되던 것을 빗댄 것이다. 

18년간 이어진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당시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받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과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베트남(월남)전쟁에 젊은이들을 보내 번 돈(전쟁특수 포함 약 10억 달러)이었다. JP가 말한 ‘빵’은 국민의 핏값이었다.

베트남전, 뭘 위해 싸웠나?

베트남전에 파병된 군인은 32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사망자 5099명, 부상자 1만1000여명, 정확한 집계조차 힘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은 뭘 위해 국민의 피를 이국땅에 뿌렸을까? JP는 “월남이 사실상 공산군에 포위된 상태였다”며 “자유 우방들은 월남을 시급히 구출해야 할 상황이었다”고 참전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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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10월13일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월남에 파병된 백마부대를 방문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67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전 유세에서 “만약 한국군이 파견되지 않았다면 당시 내 추측으로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종합하면 베트남의 공산화돼 중국 하에 놓이는 걸 막아야 하는데 주한미군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한국군이 대신 간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캄보디아·라오스 등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돼 중국 영향력에 놓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주장하며 전쟁에 뛰어들었다. 사실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1954년부터 있었다. 베트남은 한국과 다르게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도 프랑스의 지배가 끝나지 않다가 1954년 제네바협정 결과 17도선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북베트남(월맹)에는 공산당, 남베트남에는 친미정권(베트남공화국)이 들어섰다. 

북베트남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은 남베트남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남베트남 정부가 친불(한국으로 보면 친일)정권에서 친미정권으로 주인만 바꿨을 뿐 부정부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전쟁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내전이었고, 미국의 개입은 명분이 부족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는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베트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갈등이 조기에 나타났을 것”이라며 “베트남이 통일된 지 4년도 되지 않아 양국이 충돌한 것을 봐도 그렇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도미노 이론’이 오판이었다는 분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 개입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다. 

JP는 “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며 자신이 64년 9월 미 상원의원들에게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이 통킹만에서 미국 매독스 호를 선제공격했다는 ‘통킹만 사건’은 조작됐다는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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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8월18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백마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사진=정부기록사진집

2003년 ‘전쟁의 안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상 수상)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미 의회에서 참전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1964년 8월4일 북베트남의 미국 공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미 국무부 ‘특별국가정보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참전 반년 전인 64년 5월 미국 존슨행정부는 북베트남에 대한 적극적 군사작전을 고려했고, 통킹만 사건 초기에도 곳곳에서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베트남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렇게 참전한 미국은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미군들조차 이 전쟁의 목표가 무엇인지, 왜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적이 북베트남인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베트콩인지 알 수 없었다. 베트콩에 우호적인 남베트남 민중은 포섭해야 할지 배척해야 할지도 기준이 없었다. 

미국은 23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물론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던 일본도 파병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수당을 지급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대만, 필리핀 등 6개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용병 수당뿐 아니라 박정희 정부에 1억5000만 달러의 차관을 약속했다. 왜 그랬을까?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전쟁’이라는 비난을 피하고자 아시아 군인의 비용을 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강원용 목사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결국 한국군의 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프랑스가 싸우다 나가서 백인 대 황인종의 전쟁인데 미국으로서는 이것을 면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며 “황인종 나라가 전쟁에 참여했어야 한다”고 주한 미 대사관 정무참사관 필립 하비브의 말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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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헬리콥터가 지원하는 장면. 사진=정부기록사진집

6개국 중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은 한국이 유일했다. 한국의 월남 파병은 이렇게 시작됐다.  

피 팔아 얻어낸 빵은 충분했나? 

한국군 베트남 파병으로 미국은 명분만 얻은 게 아니다. 1970년 미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열린 월남 참전국 미국 지원내역에 대한 ‘사이밍턴 청문회’에 따르면 1인당 군 유지비용은 미군이 1만3000달러, 한국은 5000달러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1인당 8000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 한국군 32만명을 파병했으니 미국은 약 25억6000만 달러를 아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내에서도 한국군 파병이 늘어날수록 실제 비용도 적게 들고 미 참전군 숫자를 줄일 수 있어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한국군 수당은 심지어 자기 나라를 지키는 월남군보다도 낮았다. 1967년 합동연감에 따르면 이병 수당을 보면 미군은 235달러, 월남군 55달러였지만 한국군은 51달러였다. 장교들 수당도 낮은 수준이었다. 미군은 569달러, 필리핀 475달러, 태국 406달러였지만 한국군은 190달러였다. 미군과 동일한 수준으로 대우하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쓴 돈이 총 1조110억 달러인데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한국이 받아온 총액은 10억3600만달러였다. 군 병력 10%를 채워주고 미국 전비의 0.1%를 얻어온 것이다. 그런데도 JP는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 “한국으로선 군이 살아있는 전투경험을 쌓고,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추켜세웠다. 

피로 얻어낸 빵은 어디로 갔나?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6년 기준으로 하사 이하 사병들의 경우 전사 및 장애 1급인 경우 34만원(1320달러)이 지급됐는데 당시 직장인 1년 치 월급을 조금 웃도는 액수였다. 베트남전쟁 특수가 있었던 건 사실이며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임은 사실이지만 돈을 번 과정이 정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박태균, ‘베트남 전쟁’ 참고)

군인뿐 아니라 기업 소속 기술자·근로자로 간 사람들도 대가를 제대로 못 받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1971년 2월에는 ‘한진 파월기술자 미지불임금 청산 투쟁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서울 남대문로 대한항공 빌딩에 몰려가 매표실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농성자 13명에겐 징역 1~5년이 선고됐지만 한진이 어떤 제재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윤충로, ‘베트남 전쟁시기 월남 재벌의 형성과 파월 기술자의 저항’ 참고)

전쟁으로 번 돈은 노동자들에게 가지 않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과 박정희 정권의 밀월관계를 살펴보자. 백악관 출입기자 출신 문명자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따르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해결한 사람은 조중훈이었다. 그는 박정희 비자금의 운반책이었다.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 무마를 위해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를 정치자금 3억~4억엔으로 매수하는데 조중훈이 핵심 역할을 했다.

1973년 11월에는 JP가 박정희 친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있었다. 문명자에 따르면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半)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었고,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1주일 후인 1973년 8월15일 청와대로 불려간 조중훈은 박정희로부터 김대중 사건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문명자에 따르면 조중훈은 다음 날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 돈 1억 엔을 건넸고, 그리고 8월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후 한진은 박정희 정권의 비호 아래 성장했다. 조중훈의 자서전에 따르면 한진은 790만 달러 규모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체결하는 등 베트남 전쟁 특수를 누렸다. 한진은 66년부터 71년까지 1억5000만 달러를 베트남에서 벌어들였다. 

그렇게 얻은 빵은 떳떳한가?

JP는 증언록에서 “무엇보다 5000년 한민족사에서 우리 군사력의 해외 진주는 전례 없는, 역사의 드문 경험”이라며 “맨날 침략만 받던 나라가 대의를 위해 파병한 경험은 민족의 진취적 기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방어조차 힘들었던 한국의 베트남전쟁 참전은 과연 자랑스러웠던 일일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등의 구호를 내걸며 월남 참전군을 ‘평화의 십자군’으로 포장했다. 전시 인권유린의 위험성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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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파병 당시 포스터. 박정희 정부는 '타도하자 베트콩', '평화의 십자군' 등의 포스터를 통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했다.

베트남 평화활동가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베트남전쟁 기간 중 한국군이 80여건에 걸쳐 약 9000명의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했다. 베트남엔 3기의 한국군 증오비와 50여기의 위령탑이 서있다. 

최용호 전쟁평화연구소장의 ‘통계로 본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 따르면 한국군 재판기록에 65년~72년까지 총 1384건의 범죄행위가 발생했는데 이중 살인 35건, 강간 21건, 과실치상 523건 등이 있다. 대부분 민간인 학살과 관련돼 있다. 당시 베트남에선 한국군에 대해 ‘잘 싸우지만 잔인하다’고 평가했다.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은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JP 말대로 “역사의 드문 경험”이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 사회는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의 기억은 잊은 채, 오로지 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만 기억하고 있다. 베트남전 전사자는 총 110만명이고, 민간인 사망자는 이보다 많은 150만명이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희생당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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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호 6호 작전은 1966년 1월 19일부터 1월 10일까지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1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투입된 최초의 연대급 작전이다. 이 작전중 병사를 공중투입시켜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작전 결과 적 사살 196명, 포로 49명, 용의자 773명, 소화기 58정, 공용화기 2정 등의 전과를 올렸다. 사진은 비호 6호 작전 수행중 숨어있던 베트콩을 생포하고 있는 모습이다.
민주주의는 빵을 먹고 자랐나?

한국이 미국과 함께 남베트남을 지원했다면 북한도 북베트남을 지원했을까? 당시 한국군이 참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주한미군이 있어서다. 베트남 파병은 60년대 미국에서 제기됐던 주한미군 감축 정책을 지연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은 전투 병력을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을 높여 한국의 추가 파병을 막는 형식으로 북베트남을 지원한 것으로 평가된다.

1967년 11월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북한의 대남 도발건수는 67년에 급증했다. 비무장지대 주요 사건이 65년 42건, 66년 37건이었지만 67년 423건으로 약 10배가 늘었다. 1968년은 안보위기의 해로 불린다. 1월21일 김신조 등 북한 무장부대는 청와대를 습격하려했고, 1월23일에는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같은 해 11월에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울진·삼척에 침투했다. 

한국 내에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은 ‘자유와 안보를 지키자’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불안감이 커졌다. 북한의 전략은 유효했다. 실제로 1968년 여름에 예정됐던 5차 파병은 1968년 안보위기로 무산됐다.   

같은 시기 국내 독재체제는 공고해졌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3연임할 수 있는 개헌을 69년에 통과시켰고, 72년에는 유신체제를 만들었다. 징병제가 강화됐고, 주민등록제 제도화도 이 시기에 완료됐다. 적어도 베트남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민주주의는 급속도로 후퇴했다.

베트남 전쟁이 남긴 것, 생명보다 돈

베트남전 파병을 결정했던 64년으로 돌아가 보자. JP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피해 2차 외유(6월18일~12월31일)를 떠난 상황이었다. ‘4·19혁명 계승·민족주의’를 집권이념 중 하나로 제시했던 군사정부는 65년 한일협정으로 정권의 실체적 성격을 드러낸 상태였다. JP가 “2차 외유 중 파병을 계획”한 이유는 악화된 여론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파병을 계기로 1965년 5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하자 박정희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은 잦아들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 특수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얻었고, 이를 이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의 권력은 공고해졌지만 그들이 내건 베트남전의 애초 목표는 얼마나 달성됐을까?

베트남 파병을 통해 공산화와 중국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목표는 1975년 월남이 패망하면서 실패했다. 1968년 안보위기와 1971년 주한미군 1개 사단감축을 보면 한미동맹이 굳건해지고 주한미군의 감축을 막자는 목표 역시 실패했다. 

베트남전 이후 해외파병을 판단하는 잣대는 경제적 득실로 굳어졌다.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경제적 이득만이 강조됐다. 이제 한국에서는 전쟁은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보다 ‘돈 벌러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게 됐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인한 국가 이미지 실추, 수십만 명이 국가 폭력에 쉽게 동원되는 현상, 지금은 조용하지만 언젠간 제기될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잊혔다. JP는 이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이다. JP에게 듣는 베트남전은 반쪽의 기억에 불과하다.

‘나쁜나라’, 이토록 불행한 나라의 우리들

[김원 발뉴스] “세월호에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김원 문화평론가  |  balnews21@gmail.com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고 싶다면 ‘피해자’가 돼 보면 된다. 대부분 사건에서 ‘피해자’가 되는 순간 당사자는 바로 알게 된다. 대한민국 피해자는, 피해사실을 확인 받는 순간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제일 먼저 ‘입’이 없어진다. 입도 목소리도 없이 재갈이 물린 채로, 피해자가 직접 피해사실과 사건 경위를 밝혀내고 증명하고 심지어 주변을 ‘설득’해야 한다. 이 높고 험한 철벽 앞에 좌절하지 않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실은 불가능해 보인다. 눈물과 신음소리만으로 뭘 어찌해볼 수 있겠는가.
  
 
반면 많은 경우 가해자는, 할 일이 없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혐의’가 돌아오려면 웬만해서는 아주 오래 걸린다. 그 사이에 정황은 잊히고 증거는 점차 사라지기도 한다. 가해자가 ‘조직’일 경우 책임자가 누구인지조차 웬만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럿일수록 밝혀지지 않고, 강자일수록 숨겨진다. 때로는 ‘피해자’가 너무 극성스럽게 억울함을 호소한다면서, 여론이 악화되다 못해 주변이 가해자를 편들어 주기도 한다. 두둔하고 동조까지 한다. 이제 그만하라고. 시끄럽다고.
피해자는 뼛속까지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피해자는 굉장히 빨리 ‘국민’에서 제외된다. ‘국민’에서 제외되는 방식은 이미 오랜 인습과 관례는 물론이고 분단 체제 이용은 필수이며 아주 광범위하고도 다채롭다.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알게 된다. 그들에게는 입이 없다. 들어줄 타인들의 귀도 없다. ‘피해자’는 제일 먼저 사건 현장으로부터 배제된다. 목소리를 빼앗긴 데 이어, 눈도 가려진다. 가까이 다가가기는커녕 그 특수한 ‘신분’ 때문에 그때부터 발이 묶인다. 이후로는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들에게는 소식조차 제한적인 것만 제공된다. 피해자가 외치는 ‘진실’은, 풍문으로도 떠돌지 않고 묻힌다.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온다. 손도 묶인다. 피켓 하나도 들기 힘들어진다. 만약 들게 된다면, 그 하나의 피켓을 묻어버릴 산더미 같은 대응 공세에 압사될 각오를 해야 한다. 피해자는 머지않아 ‘투명인간’으로 취급된다. 이 사회는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으로 사건 자체를 묻어버리고 싶어 한다.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수장된 희생자 중 단원고 학생들은 미수습자 9명 포함 262명이다. 현재 추정으로는 304명이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이고, 희생자 대부분이 당시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었다.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유가족’이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유가족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참사의 사고 경위는 무슨 이유인지 처음부터 오리무중이었고, 공식 직함을 가진 ‘관계당국’의 모든 ‘관계자’들은 묵묵부답으로 시간만 끌었다.
그렇다. 그 아이들의 부모와 가족들은 점차 ‘피해자’가 되어갔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지나친 언론 공세에, 만에 하나라도 반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라도 유가족은 뭔가 ‘대우 받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식 잃은 부모는 그저 피해자가 되었다. 피해자에 대한 당국의 매뉴얼은, ‘가만히 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쪽에 가까웠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더 잃을 것은 없다’며 맞섰던 “세상 물정 모르던” 부모들은, 그 슬픔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세월호 유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지독한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2014년 4월16일 이후부터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 어떤 비극보다 참혹했던 이 참사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피해자들보다 가혹하게 이 새끼 잃은 부모들을 몰아세웠다. 영화 <나쁜 나라>는 그 탄압처럼 무자비했던 1년여의 시간을 고스란히 필름에 담았다. 세월호 시민 참사기록위원회 작업의 일환으로 정일건, 이수정 감독이 공동 연출을, 김진열 감독이 책임 연출을 맡았다. 영화를 보기 전의 예상과는 달리, 압도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기막힘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탄식조차 그냥 삼켜야 했다. 이것은 지난 1년 9개월이 넘도록 우리가 매일 보아온 상황.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은 없지 않은가. 그저 1년 9개월을 두 시간으로 압축했을 뿐이다.
하나의 일관성이 느껴졌는데, 그것은 ‘관계자’로 오신 높으신 분들의 모두 한결같고 똑같은 무표정한 얼굴들이었다. 모두 짠 듯이 표정도 안색도 없었다. 누구도 말다운 말을 하지 않았다. 한국어임에도 전혀 언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분절되고 엉켜버린 말들조차, 그나마도 그날의 ‘대표’만 입을 뗄 뿐이었다. 나머지는 입조차 열지 않았다. 실은 ‘공직자’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 분위기였다. 침묵의 오기 같은 게 느껴졌다. 기다림에 지치고 지친 유가족들의 푸념과 항의가 터지면,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잘못’에만 지적이 오갔다. 그게 다였다. 아니 어쩌면 그마저 드물게 얻어낸 ‘성과’에 가까웠다.
세상에 이런 불행한 참사도 또 없겠지만, 이런 잔인한 탄압도 또 없을 것이었다. ‘관계자’들은 만나려야 만날 수도 없고, 어마어마한 경찰병력만이 유가족들을 겹겹으로 포위했다. 전시 상황이 따로 없었다. 슬픔이라니. 그 또한 너무나 고와서,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았다. 매일 밤 부모들이 지쳐 쓰러지듯 몸을 뉘어야 했던 찬 바닥과 폭우 속의 노숙, 그것은 세월호 유가족이 되어보기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을 진짜 고통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토록 불행한 나라. ‘나쁜 나라’이기 전에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나라 같은 저기는 어디인가. 피해자에 대한 비인도적인 ‘매뉴얼’을 바로잡는 것조차, 피해자들이 그 입도 손도 발도 묶인 몸으로 맨바닥을 기어가며 해내야 하는 일인 것인가. 이 나라에 사는 우리들에게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이 나라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생명 자체가 존중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나와 내 가족만은 무사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가. 그 믿음과 희망을 지키는 방법은, 생명이 존중 받는 세상이 올 때까지 싸우는 도리뿐이라고 유가족들은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기 위해 연대하지 않는 이상, 안전 사회는 헛된 구호일 뿐이라고 말이다.
영화 <나쁜 나라>를 보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보람 있는 일이다. 인간의 고통 곁에서 잠시나마 그 여름과 가을 겨울을 함께 해봤다면, 영화를 보는 동안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될 것이다. 나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함께 했다고 말할 수 있음이, 그나마 지금 우리에게는 위안이고 구원이라 믿고 싶다. 저 심연에 갇힌 세월호로부터 반드시 온전히 건져내야 할 것은, 그토록 살고 싶었던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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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철한 통일투사 유영쇠 선생 타계

[부고] 투철한 통일투사 유영쇠 선생 타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기 위해 북녘 송환도 포기한 통일투사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6/01/30 [10:47]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유영쇠 선생의 영정     © 전주 수요촛불 채주병@sanha9008

▲ 인정많은 마음씨, 투절한 애국심, 강직한 새사회 건설 의지로 평생 민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안탑깝게 영면에 든 고 유영쇠 선생의 생전 모습 

▲ 유영쇠 장기수 선생

해방 후 조국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0여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유영쇠 선생이 1월29일(금) 새벽 6시 12분 영면에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은 원광대병원101호에 마련되어 있으며 발인은 내일 31일 일요일입니다.

30일 토요일 6시에 원광대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을 진행합니다.

유영쇠 선생이 얼마나 인정이 많고 투철한 진보적 미래 개척 의지를 지녔는지, 통일을 얼마나 절절히 염원하였으며 그를 위해 어떻게 헌신했는지 그 편린이나마 느낄 수 있는 약력과 이재봉 교수의 '내가 본 유영쇠 선생'을 아래 소개합니다.

이재봉 교수의 글에 담긴 유영쇠 선생님의 투철한 애국심, 남녘의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 통일의 길에 함께 하도록 하기 위해 안락하고 행복한 삶이 예정되어 있던 북녘 송환도 미룬 유영쇠 선생의 불굴의 통일의지가 가슴을 울립니다.


유영쇠 선생님 약력

1928년          • 10월 30일 2남 4녀 가운데 막내로 출생
1937년          • 가정형편 곤란으로 학교 진학 못하고 지역 야학에서 공부
1942년          • 금산 광산 등 임금노동자 생활
1945년          • 성인교육강습소 수학
1945~1947년    • 야학당 개설 및 운영, 동네 대소사 주관하면서 동네사람들의 신망 받음.
1947년          • 이리중 입학
1948년          • 형편곤란으로 김제중앙중 편입. 김제 누님 댁에서 숙식.
1949년          • 김제농고 1년 입학
1950년          • 김제농고 재학중 의용군 1기 자원 입대, 귀향 후 복학.
                   동료 7명과 같이 정읍 산외면으로 입산, 소대 교양사업 책임자 활동
1950년~51년3월 • 유격대 지원, 정찰대 활동
1951년 9월      • 금구 오봉리 박씨 의사 안내 후 복귀 중 1차 선 단절과 이후 선 복귀
1952년 3월      • 상목굴 자폭(군당위원장 박봉수 등 사망), 2차 선 단절
1952년 4월      • 2차 선 단절. (군사작전위주의 지대 개편. 유격대는 소부대 분산활동)
1952년 7월      • 2차 선 복귀 후, 현지지도책 임명
1954년 4월      • 김제군당 위원장 “온동수” 동지와 함께 황산에서 체포
1954년 4월 이후 • 온동수 군당 위원장 총살형, 유영쇠 선생 무기징역형 수감
1954~1983년    • 고법에서 무기형 최종확정, 감옥생활, 감옥투쟁.
1983년 2월      • 장기수 복역 중 출옥
1983~2013년    • 출옥이후 노숙인 시설인 익산 자선원 거주 및 업무 지원.
                   양심수후원회, 통일광장, 범민련남측본부, 전주평통사 등 단체활동 참여
                   평화통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현장투쟁에 지속 참여
2003년          • 이라크 파병 반대 국회앞 집회 참여
2004년          • 국가보안법 폐지 1000인 국회 앞 단식 농성 참여
2005년          • 쌀협상 비준안 반대 여의도 농민대회 참여
2006년          •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0년          • 제주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1년          • 한미 FTA 비준 반대 국민대회 참여
2013년          • 전립선암으로 원광대 병원에 입원하시는 길에 4.19 희생자 추도식 참여
2014~2016년    • 지병으로 익산 원광효도마을 실버의 집(요양원) 거주
2016년          • 1월29일 새벽 6시12분 지병으로 향년 89세 사망


내가 본 유영쇠 선생 
                                                           이재봉 (원광대 사회과학대학장, 남이랑북이랑 대표)


2001년인가 2002년이었다. <북한 사회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수강하던 법대 학생이 수업 후 면담을 신청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장기수 어르신을 알게 됐는데 그 분께서 내 강의를 한 번 듣고 싶어 하신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병실 옆 침대에 누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빨치산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듣고 있던 북한 관련 수업에 관해 소개했더니 호기심을 표하시더란다. 매 학기 두 강좌를 개설하는데도 수강 신청 기간 첫날에 마감이 될 정도로 인기 있던 강좌인데다 일반인 청강생들도 더러 있을 때라, 누구든지 기꺼이 환영하겠다고 답했다.

그 다음 주 수업에 비쩍 마른 70대 노인이 맨 앞에 앉아 내 말 한 마디 놓칠세라 열심히 필기해가며 청강했다. 강의가 끝나자 그가 직접 물었다. 계속 들어도 되냐고. 한 달 쯤 지나 종강하게 되자, 학기 중간 이후부터 수강했으니 다음 학기 첫 수업부터 출석하고 싶다고 했다.

새 학기 개강부터 종강까지 16주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지각, 조퇴, 결석하지 않고 맨 앞자리를 지켰다. 서울에서 모임이 열려 동지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다음날 수업이 있으면 심야 버스나 기차를 타고 꼭 익산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아침 9시 시작하는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유영쇠 선생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연을 들어보니 1950년대 초 고향인 김제 지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1954년 붙잡혀 1983년까지 29년간 감옥생활을 했단다. 그리고 출옥 후 갈 데가 없어 부랑인 수용시설인 이리자선원에 몸을 맡기고 있다니 기막히게 기구한 신세였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이었다. 내가 외부에서 강연하거나 무슨 모임을 가져도 꼭 참석하고 싶어 했다. 내가 이끌던 <남이랑 북이랑 더불어 살기 위한 통일운동>에도 기꺼이 동참했다. 한 달 생활비가 5만원이라 택시는커녕 버스도 맘껏 타지 못한 채 고물 자전거에 올라 여기저기 강연이나 모임에 참석하며 회비도 꼬박꼬박 냈던 것이다. 가진 게 적어 많이 내지 못한다고 안타깝고 미안해하면서.

이러한 과정에서 날 꽤 신뢰하게 된 모양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05년 무렵 장기수들을 북녘으로 송환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자 은밀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쪽에 남아 있어야 할지 북쪽으로 가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향인 남쪽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더 가까울 북쪽에도 피붙이는 없다고 했다.

“선생님, 여기서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부랑인 수용시설에서 고통스럽게 살아오셨는데, 북녘으로 가시면 우선 몸이 편하시겠죠. 당국에서 집도 마련해주고 원하면 결혼도 주선해준다니까요. 그러나 맘은 편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기아와 궁핍에 허덕이는 인민들을 많이 보시게 될 테니까요. 게다가 젊었을 때 목숨 내걸고 싸우며 추구했고, 감옥에서도 수십 년 동안 전향을 거부하며 추구해 오신 사회주의의 이상을 북녘 체제에서 찾지 못한다면 좌절감이나 배반감까지 맛보시지 않겠어요?”

“교수님, 나는 내 육신이나 마음이 편하고 편하지 않고는 전혀 따지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쪽에 있어야 통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뿐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계십시오. 북녘 인민들이야 모두 통일을 바라지 않겠어요? 원치 않는다고 해도 지도자가 통일 방침을 정하면 그대로 따를 테고요. 그러나 여기 남쪽에서는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잖아요.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통일을 원하도록 이끄셔야죠. 거기서는 통일운동 하실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서는 통일운동의 필요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선생이 더욱 존경스러워졌다. 남쪽을 택할지 북쪽을 택할지 갈림길에서, 난 맨 먼저 몸과 맘의 안락함을 떠올렸지만, 70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온 노 혁명가는 육신의 고통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평화와 통일에 몸 바칠 생각만 하고 있지 않은가.

2013년 설날 아침 아내와 모처럼 선생의 거처 이리자선원을 찾았다. 거의 매월 수천 명에게 이메일로 보내는 내 글에 가끔 전화나 이메일로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터였지만, 거동이 불편한 듯했다. 몸내가 역겨울 정도로 풍겼어도 80 중반의 노인이라 그러려니 했다.

2014년 3월 말 아침 선생이 전화를 해왔는데 받으니 말이 없었다. 두어 번 반복됐다. 오후엔 내가 몇 차례 전화했지만 선생이 받지 않았다. 다음날 통화가 이루어졌는데 00요양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겨우 몇 마디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없는 목소리였다.

4월 초 아내와 찾아간 요양병원에서 먼저 간호사를 만나 선생의 병세를 물어보니, 2013년 9월 입원했는데 치매와 전립선암 등 무려 14가지 병을 지니고 있단다. 병상에 누워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선생과 말과 글을 섞어 겨우 대화를 나눴다. 나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죽으면 불교식으로 화장해 유골을 평양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유언이었다. 생전엔 남쪽에서 통일을 위해 헌신하라고 권했던 터라, 사후엔 북녘에서 사회주의 이상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보태는 게 좋을 듯해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선생을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처음 듣는 얘기지만, 당신의 생질이 있는데 그의 외할머니인 선생의 어머니 옆에 묻혀야 한다고 반대한단다. 유골을 둘로 나눠 어머니와 동지들 옆에 절반씩 묻히게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둘째, 병원 체제를 개선해 달라고 했다. 환자를 먼저 배려하는 게 아니라 병원 운영의 편의를 앞세운다면서. 선생의 안전을 위해 가끔 몸을 병상에 묶는 간호사들을 탓하는 것 같아 병원을 바꿔 주겠다고 하자, 자신의 몸이 좀 불편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다른 환자들을 위해서도 운영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혼자 앉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며, 정신적으로는 오락가락하는 중증 환자지만, 역시 혁명가다운 발상이었다.

4월 중순, 지금까지 선생을 보살펴온 평화운동가들과 협의해 요양병원과 요양원이 어우러져 있는 원광효도마을로 옮겼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틈틈이 들를 수 있는 곳이다. 십 수 년 전 <북한 사회의 이해>를 수강하며 선생을 소개했던 법대 졸업생이 경상도에서 달려오니 선생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바로 어제였다. 의 (義)로 맺은 할아버지와 손자의 행복한 모습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기를 염원한다.-2014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