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농사짓는 세상 바라던, 바르게 살아온 농부”
경찰의 살인적 물대포 직사 머리에 맞고 사경 헤매는 백남기 농민 살아온 길
"편하게 농사짓는 세상 바라는 농민이었다고."
"바르게 살아온 농부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바르게 살아온 농부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의 살인적인 물대포 진압에 쓰러진 백남기(69) 농민이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는 서울대병원 중환자실. 17일 하루 종일 그의 쾌유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과,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무거운 한숨이 교차했다.
밀과 콩 2모작으로 키워 온 농부
올해 풍년에도 한숨
올해 풍년에도 한숨
민중총궐기대회 하루 전인 13일, 백남기 농민은 광주고등학교 4년 후배이자 오랜 동료인 최영추(64. 전 보성군농민회장) 씨와 막걸리를 한 잔 했다.
"형님 내일 총궐기대회 한답디다. 가을 걷이도 다 했으니 갑시다."
"그래 밀도 다 심어놓았고 한가하니 가자."
"그래 밀도 다 심어놓았고 한가하니 가자."
백남기 농민은 밀과 콩을 2모작으로 키웠다. 10월에 밀을 파종해 이듬해 여름이 오기 전 수확하고, 그 자리에 콩을 심어 가을이 깊기 전에 콩을 수확한다.
나이 많은 농부의 얼굴에 팬 주름은 농촌의 시름일지도 모른다.
"막걸리 한 잔 하시면 형님이 나라 걱정을 많이 하셨지. 세월호 문제, 교과서 문제...그리고 농민이 농사를 지어서 이것 빼고
저것 빼고 하면 정말 남는 것도 없어. 올해 전라도 지역은 대풍이라고 하는데, 쌀값은 폭락했지, 거기다 밥쌀을 수입까지 한다고
하니까 쌀값 하락을 더 부채질하겠지. 형님이 '풍년이면 뭣해?' 그러시더라구."
농촌이 어렵다는 얘기가 나온 게 한 두해가 아니니, 농민들 마음이 다 거기서 거기였을 것이다. 많은 농민들이 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 참여했고, 일부는 상복을 입고 상여를 들었다. 그러나 경찰 차벽이 사방을 막았고, 살수차의 거센 물줄기에 상여는
박살났다.
이날 경찰의 공격적인 살수 진압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시위대와 충돌 과정에서 전경들도 다쳤다. 살수차 운용지침도 위반하고 집회
참가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때린 경찰의 물대포 진압은 살인적인 수준이었다. 백남기 농민은 경찰이 근거리에서 직사로 쏜 엄청난
수압의 물줄기를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졌다. 물대포는 쓰러진 그를, 심지어 그를 구조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까지
가격했다. 마치 구조를 방해하기라도 하려는 듯.
중앙대 재학시절에는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맞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있는 백남기 농민은 외상에 의한 뇌출혈로 의식이 없는 상태다.
중태에 빠진 그를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다녀갔다. 17일에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가 병원을 찾아 백남기 농민의 부인 등 가족들을 위로했다.
김희중 주교는 "생존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할 수 있는지, 피부에 와 닿는 아픔을 느낍니다"라며 경찰의 과잉진압을 비판했다.
백남기 농민과 광주고등학교 17회 동기동창인 박주선 국회의원(무소속), 장휘국 광주교육감도 병문안을 다녀갔다.
백남기 농민은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중앙대에 입학했다.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를 벌이다
1차 제적됐고, 1973년 10월에는 교내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1975년 전국대학생연맹에 가입해 활동하다 2차
제적됐고, 이후 가르멜 수녀원, 가르멜 수도원 등에서 생활했다.
1980년 복교 해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재건하는데 나서서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을 지냈다. 서울의 봄(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1979년 10월 26일부터, 신군부에 의해 비상계엄이 확대된 1980년 5월 17일 사이의 기간) 때인
1980년 5월 15일 중앙대에선 4천여명이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로 행진했는데, 이를 주도했다.
이틀 뒤인 5월 17일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 확대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됐다. 학교에선 퇴학 처분을 받았고, 1980년 8월 계엄령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는데, 1981년 3월, 3·1절 특사로 가석방됐다.
"평생을 바르게 살아온 욕심없는 농부"
백남기 농민은 가석방된 후 전남 보성군 웅치면으로 내려갔다. 그의 집안이 9대째 내리 살아온 고향이다. 백남기 농민의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을 지낸 뒤, 웅치면 면장을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농사를 지으며 가정을 꾸렸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어갔다.
문경식 전 전농 의장은 "주위에서 군수나 도의원에 출마하라는 권유도 많이 했었다. 이력과 품성은 충분히 되나 한 번도 나서지
않으셨다"라고 말했다. 그는 밀을 재배하면서 우리 밀 살리기 운동도 열심히 했다. "우리 밀 자급률이 0.2%까지 떨어졌어. 우리
밀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 그걸 어렵게 밀 종자를 구해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시작했지."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 본부장)
최영추 전 보성군농민회장은 "농민 스스로 생존권을 해결하기 위해 자주농의 깃발을 들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로 민주적으로
분위기가 열린 공간에서 농민회를 많이 키웠다. 분신 정국 때는 광주를 오가며 형님하고 민주화 운동도 많이 했지"라고 회상했다.
백남기 농민은 1987년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을 지냈고,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1989~1991),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1992~1993) 등을 지냈다. 1992년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에 나서, 1994년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을 지냈다. 최영추 전 농민회장은 "남기 형님이 면사무소에 들르면 전부 일어나서 인사할 정도로 신망을 얻었다"라고 전했다.
백남기 농민의 부인은 남편을 "바르게 살아온 농부"라고 말했다. 문경식 전 전농 의장, 최강은 우리밀살리기운동광주전남 본부장 등
그의 동료들도 "품성이 바르다", "욕심이 없고 검소하다", "앞에 나서지 않고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라고 입을 모았다.
농민회의 이런저런 직책들도 후배들의 "맡아달라"는 부탁에 했다고 한다. 그의 성품을 가늠할 수 있는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30여년 지기 최영추 전 보성군농민회장의 말이다.
"귀농해서 처음에는 소도 키우고 이후에 밀과 콩을 주로 하면서 농사를 계속 지으셨는데, 그때는 마을 이장이 관선이었거든, 관에서
지명을 했다고. 근데 최초로 보성군 웅치면 부촌동 마을에서 지역 주민들이 이장을 선출한 거야. 선출에 의한 민선 이장이 최초로
탄생한 거지. 그래서 형님이 이장이 됐는데, 관에서 인정을 안 해 준거야. 이장 회의도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개최했는데,
형님이 자기 의자를 갖고 가서 앉아 참석했지. 대한민국 민선 이장 1호라고. 옳다고 생각하는 건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지."
"바르게 살아온 농부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한 백남기 농민의 부인은 김희중 주교의 병문안을 받은 자리에서 "책임자에게 사과를 받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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