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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한국 정치의 과거와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세 전직 대통령이 한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빌렸습니다. 그들이 ‘천상’에서 오늘의 한국사회를 내려다보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상’은 종교적 의미의 ‘천국’이 아니라 상징적인 하늘나라를 뜻합니다. 사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맡습니다. 이 좌담에서 세 전직 대통령이 현재와 미래에 관해 주장하거나 전망하는 내용은 필자가 추론한 것일 뿐입니다. 고인들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그리고 독자들의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좌담회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노무현: 1946년 생으로 두 선배님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지만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제가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제가 이렇게 나선 것을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혼이라도 살아서 조국과 겨레에 도움이 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충정이라고 여겨주십시오. 두 분에 대한 호칭은 ‘선배님’으로 하겠습니다. 김영삼 선배님이 지난 11월 22일 작고하셨는데, 23일자 조간신문들의 1면 머리에 서거 소식이 대서특필 되었군요. 저는 ‘자살’이라서 충격적인 기사 소재가 되었는데 선배님의 서거에 대한 보도는 찬양 일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만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라고 밋밋한 제목을 달았을 뿐 다른 신문들은 ‘민주화’와 선배님의 아호인 거산(巨山)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대도무문의 승부사····‘거산’ 잠들다」(조선일보), 「민주화 큰 산 떠나다」(한겨레), 「‘통합과 화합 승부사···’거산‘ 잠들다」(중앙일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동아일보), 「민주화 큰 별 지다」(세계일보) 등입니다. 이런 제목들을 보시고 느낌이 어떠신지요?
김영삼: 허허, 이제 이승에서 저승으로 온 사람이 자기 죽음에 대한 보도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만, 제 삶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니 기분이 좋군요.
노무현: 김대중 선배님은 김영삼 선배님의 정치 역정과 삶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대중: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라이벌’ ‘운명의 경쟁자’ ‘민주화의 동지’라고 표현했는데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민주화의 동지’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노무현: 두 분은 1950년대에 정치를 시작하신 이래 같은 당에서 대통령후보가 되려고 경쟁을 하시는 등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시다가 1990년 1월에 여당과 야당의 지도자로 대립하게 되셨습니다.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이끄시던 김영삼 총재님께서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과 합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영삼 선배님에 대해 야권과 민주진보진영에서는 ‘배신자’라고 거센 비판을 가했는데 그런 비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영삼: 저는 담담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단적으로 대답했지요. 그 이후에 제가 걸어간 길을 보면 그것이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노무현: 새삼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그때 저는 정치적 스승이자 후원자이시던 김영삼 선배님의 권유에 따르지 않고 야당에 남았습니다. 3당 합당은 ‘밀실 야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김대중 선배님은 당시 어떤 판단을 하셨습니까?
김대중: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와 제가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한 뒤 치러진 1988년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제1야당이 되었습니다. 평민당은 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세해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의회정치를 주도했습니다. 광주청문회 등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저지른 만행들을 추궁하고 개혁입법도 활발하게 하고 있던 과정에서 3당 합당이 돌발적으로 발표되어 충격을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랜 민주화 동지인 김영삼 총재의 결정에 실망하면서도 생산적 경쟁을 하기로 결심했지요.
노무현: 결국 김영삼 선배님은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서 김대중 선배님을 물리치고 당선되셔서 ‘문민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론조사에서 90%가 넘는 지지율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저희가 잘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말씀해 주실까요?
김영삼: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쌓인 악폐와 모순을 척결하는 작업을 신속히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통령인 저부터 공직자 재산 등록을 하기 시작했고, 언제나 쿠데타의 온상이 될 수 있는 군부의 특정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했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헐고 경복궁을 복원하는 한편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5월 18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요즘 박근혜 정권이 하는 일들과 문민정부의 작업을 비교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노무현: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김 선배님께서 서거하신 뒤에 새누리당의 친박과 비박을 막론하고 다투어 “‘내가 거산의 정치적 아들” “우리가 정통 후계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무성 대표는 아예 ‘상주’ 노릇을 하면서 빈소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선배님의 차남인 김현철 님과 나란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착잡한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현철 님은 근래 여러 해 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를 격렬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김 선배님이 입원해 병상에 계시던 2014년 7월 15일에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친박 비박 사이에서 줄타기나 하지 말고 1년 이상 입원 중인 아버님 병문안부터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요.” 지난 10월 12일에는 역시 트위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우격다짐해서 만들어놓고 정권 바뀌면 검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할 건가? 정치선진화법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자기들 입맛대로 안 맞는다고 마구잡이로 바꿀 건가? 세종시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 공무원들 안 움직인다고 닦달할 건가? 대책 없는 인간들···.”
김영삼: 현철이는 제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지만 요즈음의 정치적 판단은 아주 옳다고 봅니다. 김무성의 갈지자 행보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지요.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제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아주 칠푼이다. 별 것 아닐 것”이라고 거칠게 표현한 적도 있지요. 저승 사람이 되고 보니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숨을 거둘 때 해외 출장 중이던 박 대통령이 서둘러 ‘국가장’을 결정하고 빈소에 와서 조문도 했다고 하니 개인적인 평가와는 관계없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군요.
노무현: 박 대통령이 선배님의 빈소를 찾아 7분 동안 조문을 했는데 방명록에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군요.
김영삼: 감정의 앙금이 깊은 모양이로군요.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할 때 제가 그것을 비판하자 한나라당 의원이던 박근혜 씨가 저를 강하게 비판했지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업적 면이나 도덕적 면에서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등을 차지한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꼴찌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라고 저를 비난하더군요.
노무현: 여기서 화제를 돌려볼까요? 김대중 선배님은 야당 지도자 시절은 물론이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영남과 화합하기 위한
‘동진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셨습니다. 경상도 출신을 청와대 초대 비서실장으로 기용하시는가 하면 박태준 씨를 비롯한 영남 출신을
중용하셨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정책은 효과보다는 역효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김대중: 역사적으로 권력이 호남을 소외시킨 데 원인이 있지만 1961년 5·16 쿠데타 이래 박정희 정권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인구가 많은 영남 덕분에 권력을 강화한 것이 나라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동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영호남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도 거둘 수 없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땠나요?
노무현: 저는 경남 김해 출신으로서 오히려 영남 중심의 기득권층한테 박대를 당했지요. 김대중 선배님처럼 상고 출신인데다 이렇다 할 정치적 배경이 없어서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사태는 제가 대통령이 된 뒤에 벌어졌습니다. 영남 출신이 주력이 된 청와대 참모진이 호남을 홀대하는 듯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자 대선에서 저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호남인들이 저에 대해 격심한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김 선배님이 북한에 비밀리에 지원하신 거액의 경제협력 자금에 대한 특검을 제가 수용하자 전라도의 민심은 ‘반 노무현’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의 판단에 사려 깊지 못한 면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제를 돌려서 김영삼·김대중 두 선배님의 대통령 재직 시에 터진 친인척 비리에 관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들어볼까요? 물론 저도 해당되는 주제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영삼: 제 둘째 아들인 현철이가 ‘소통령’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부적절한 처신을 한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지지하던 보수언론조차 임기 말에 제 등에 칼을 꽂는데다 지지율이 한 자리 수로 곤두박칠치는 상황에서 저는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 여기고 있다”라고 대국민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철이의 비리 혐의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 관리를 잘못한 제게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임기 초기에 이룬 개혁이 물거품이 돼버린 것이 아쉽지만 신한국당을 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러도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김대중: 저도 같은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세 아들이 차례로 비리 때문에 사법처리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수십년 동안 쌓아온 탑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리의 유혹에서 자식들을 차단하지 못한 저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군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옷 로비 사건’이라는 것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터진 대형 사건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적절한 시기에 사과를 하지 못한 저의 태도를 지금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저는 두 선배님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통령직을 물러나 고향 김해에서 농민으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박연차 게이트’라는 것이 터져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중앙·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진보’를 표방하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조차 저를 ‘부관참시’하라고 공격하는 마당에 저는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집사람이 부적절하게 금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저는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은 끝에 결국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지요. 재임 기간 청와대 총리비서관 최도술의 뇌물 수수까지 재론되면서 말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후세계에서 생각하니 그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면서 고향의 순박한 농민들과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는 데 전념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김대중: 우리 세 사람이야 흘러간 시대의 인물들이지만 여기 ‘천상’에서 바라보니 오늘의 한국사회와 민족공동체가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하겠다면서 국민 대다수를 좌파, 곧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행적을 미화하는가 하면 친일파의 죄상을 역사에서 지우려 들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쿠데타가 불행하게도 성공한다면 김영삼 동지와 저의 민주화투쟁은 역사에서 없던 일이 될 것이며 박정희 정권이 저를 납치해서 바다에 수장하려던 사건도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릴 것입니다. 노무현 동지가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맞서 벌인 사투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일도 전혀 기록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노무현: 마지막으로 지금 박근혜 정권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해주실까요?
김영삼: 박근혜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동지나 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그는 유년기부터 육군 고위 장교의 딸로서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 수 없는 온실에서 자랐습니다. 저도 거제도에서 멸치사업으로 부를 일군 아버지 밑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중고교와 대학 시절은 물론이고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부모의 품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왔습니다. 삶의 고통과 보람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국민의 가난과 애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가 아버지의 친일행적과 독재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이 아직도 영웅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국민의 90%를 좌파로 몰아붙이면서 역사쿠데타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대중: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와 민족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이 전혀 없는 인물로 보입니다. ‘국민 대통합’을 외치면서도 국민을 갈등과 분열로 몰아가는 ‘정치공작’을 일삼고 있으니 나라가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최종 책임자이면서도 300여명의 희생자들과 유족에 대해 단 한 마디 사죄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의 부재’를 입증합니다.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직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농민 백남기 씨와 그의 가족에 대해 아무런 유감의 뜻도 표하지 않는 것은 국정최고책임자로서 너무나 파렴치한 작태입니다. 김영삼·노무현 동지라면 병원에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을 것입니다.
노무현: 저도 대통령 재임 시에 칭찬보다 비판을 더 많이 받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는 평화와 공존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고 경제는 최악의 불황에 빠졌으며 외교는 균형을 잃고 미국과 일본, 중국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선배님과 제가 추진하던 남북통일의 기본 작업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보람차게 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박 정권은 개헌이나 이원집정제를 통한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몰락한 원인과 과정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분 선배님과 저는 비록 세상을 떠나 있지만 언제나 조국에 민주적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고 있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두 선배님의 영혼에 언제나 평안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도 두 분의 곁을 성심으로 지키겠습니다.
노무현: 1946년 생으로 두 선배님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지만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제가 사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제가 이렇게 나선 것을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혼이라도 살아서 조국과 겨레에 도움이 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은 충정이라고 여겨주십시오. 두 분에 대한 호칭은 ‘선배님’으로 하겠습니다. 김영삼 선배님이 지난 11월 22일 작고하셨는데, 23일자 조간신문들의 1면 머리에 서거 소식이 대서특필 되었군요. 저는 ‘자살’이라서 충격적인 기사 소재가 되었는데 선배님의 서거에 대한 보도는 찬양 일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향신문만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라고 밋밋한 제목을 달았을 뿐 다른 신문들은 ‘민주화’와 선배님의 아호인 거산(巨山)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대도무문의 승부사····‘거산’ 잠들다」(조선일보), 「민주화 큰 산 떠나다」(한겨레), 「‘통합과 화합 승부사···’거산‘ 잠들다」(중앙일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동아일보), 「민주화 큰 별 지다」(세계일보) 등입니다. 이런 제목들을 보시고 느낌이 어떠신지요?
김영삼: 허허, 이제 이승에서 저승으로 온 사람이 자기 죽음에 대한 보도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만, 제 삶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니 기분이 좋군요.
노무현: 김대중 선배님은 김영삼 선배님의 정치 역정과 삶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대중: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라이벌’ ‘운명의 경쟁자’ ‘민주화의 동지’라고 표현했는데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민주화의 동지’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노무현: 두 분은 1950년대에 정치를 시작하신 이래 같은 당에서 대통령후보가 되려고 경쟁을 하시는 등 치열한 선두 다툼을 벌이시다가 1990년 1월에 여당과 야당의 지도자로 대립하게 되셨습니다.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을 이끄시던 김영삼 총재님께서 신민주공화당과 함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과 합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영삼 선배님에 대해 야권과 민주진보진영에서는 ‘배신자’라고 거센 비판을 가했는데 그런 비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김영삼: 저는 담담했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단적으로 대답했지요. 그 이후에 제가 걸어간 길을 보면 그것이 입증되지 않았습니까?
노무현: 새삼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그때 저는 정치적 스승이자 후원자이시던 김영삼 선배님의 권유에 따르지 않고 야당에 남았습니다. 3당 합당은 ‘밀실 야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김대중 선배님은 당시 어떤 판단을 하셨습니까?
김대중: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후보와 제가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한 뒤 치러진 1988년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언론의 예상을 뒤엎고 제1야당이 되었습니다. 평민당은 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세해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의회정치를 주도했습니다. 광주청문회 등을 통해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저지른 만행들을 추궁하고 개혁입법도 활발하게 하고 있던 과정에서 3당 합당이 돌발적으로 발표되어 충격을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랜 민주화 동지인 김영삼 총재의 결정에 실망하면서도 생산적 경쟁을 하기로 결심했지요.
노무현: 결국 김영삼 선배님은 1992년 12월 14대 대선에서 김대중 선배님을 물리치고 당선되셔서 ‘문민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론조사에서 90%가 넘는 지지율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저희가 잘 알고 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말씀해 주실까요?
김영삼: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쌓인 악폐와 모순을 척결하는 작업을 신속히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통령인 저부터 공직자 재산 등록을 하기 시작했고, 언제나 쿠데타의 온상이 될 수 있는 군부의 특정파벌인 ‘하나회’를 해체했습니다. 그리고 기득권층과 보수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중앙청을 헐고 경복궁을 복원하는 한편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5월 18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 요즘 박근혜 정권이 하는 일들과 문민정부의 작업을 비교해 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노무현: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김 선배님께서 서거하신 뒤에 새누리당의 친박과 비박을 막론하고 다투어 “‘내가 거산의 정치적 아들” “우리가 정통 후계자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무성 대표는 아예 ‘상주’ 노릇을 하면서 빈소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김 선배님의 차남인 김현철 님과 나란히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착잡한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김현철 님은 근래 여러 해 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를 격렬하게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김 선배님이 입원해 병상에 계시던 2014년 7월 15일에는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김무성 의원은 친박 비박 사이에서 줄타기나 하지 말고 1년 이상 입원 중인 아버님 병문안부터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요.” 지난 10월 12일에는 역시 트위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을 가차없이 비판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우격다짐해서 만들어놓고 정권 바뀌면 검정으로 바꿔야 한다고 할 건가? 정치선진화법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자기들 입맛대로 안 맞는다고 마구잡이로 바꿀 건가? 세종시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 놓고 공무원들 안 움직인다고 닦달할 건가? 대책 없는 인간들···.”
김영삼: 현철이는 제가 대통령직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지만 요즈음의 정치적 판단은 아주 옳다고 봅니다. 김무성의 갈지자 행보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지요.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제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아주 칠푼이다. 별 것 아닐 것”이라고 거칠게 표현한 적도 있지요. 저승 사람이 되고 보니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숨을 거둘 때 해외 출장 중이던 박 대통령이 서둘러 ‘국가장’을 결정하고 빈소에 와서 조문도 했다고 하니 개인적인 평가와는 관계없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군요.
노무현: 박 대통령이 선배님의 빈소를 찾아 7분 동안 조문을 했는데 방명록에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군요.
김영삼: 감정의 앙금이 깊은 모양이로군요. 1999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할 때 제가 그것을 비판하자 한나라당 의원이던 박근혜 씨가 저를 강하게 비판했지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업적 면이나 도덕적 면에서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1등을 차지한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꼴찌로 나타나지 않았느냐”라고 저를 비난하더군요.
▲ (왼쪽부터)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 연합뉴스 | ||
김대중: 역사적으로 권력이 호남을 소외시킨 데 원인이 있지만 1961년 5·16 쿠데타 이래 박정희 정권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인구가 많은 영남 덕분에 권력을 강화한 것이 나라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동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적극적으로 영호남 화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도 거둘 수 없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땠나요?
노무현: 저는 경남 김해 출신으로서 오히려 영남 중심의 기득권층한테 박대를 당했지요. 김대중 선배님처럼 상고 출신인데다 이렇다 할 정치적 배경이 없어서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사태는 제가 대통령이 된 뒤에 벌어졌습니다. 영남 출신이 주력이 된 청와대 참모진이 호남을 홀대하는 듯한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자 대선에서 저를 압도적으로 지지한 호남인들이 저에 대해 격심한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김 선배님이 북한에 비밀리에 지원하신 거액의 경제협력 자금에 대한 특검을 제가 수용하자 전라도의 민심은 ‘반 노무현’으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의 판단에 사려 깊지 못한 면이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화제를 돌려서 김영삼·김대중 두 선배님의 대통령 재직 시에 터진 친인척 비리에 관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를 들어볼까요? 물론 저도 해당되는 주제라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영삼: 제 둘째 아들인 현철이가 ‘소통령’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부적절한 처신을 한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지지하던 보수언론조차 임기 말에 제 등에 칼을 꽂는데다 지지율이 한 자리 수로 곤두박칠치는 상황에서 저는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 여기고 있다”라고 대국민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철이의 비리 혐의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자식 관리를 잘못한 제게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임기 초기에 이룬 개혁이 물거품이 돼버린 것이 아쉽지만 신한국당을 탈당하는 지경에 이르러도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김대중: 저도 같은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군요. 세 아들이 차례로 비리 때문에 사법처리를 당하는 것을 보면서 수십년 동안 쌓아온 탑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리의 유혹에서 자식들을 차단하지 못한 저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더군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옷 로비 사건’이라는 것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에 터진 대형 사건들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적절한 시기에 사과를 하지 못한 저의 태도를 지금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저는 두 선배님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통령직을 물러나 고향 김해에서 농민으로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박연차 게이트’라는 것이 터져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중앙·동아일보는 물론이고 ‘진보’를 표방하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조차 저를 ‘부관참시’하라고 공격하는 마당에 저는 침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집사람이 부적절하게 금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자 저는 검찰에 나가 조사를 받은 끝에 결국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지요. 재임 기간 청와대 총리비서관 최도술의 뇌물 수수까지 재론되면서 말할 수 없이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후세계에서 생각하니 그때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면서 고향의 순박한 농민들과 평화로운 공동체를 일구는 데 전념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김대중: 우리 세 사람이야 흘러간 시대의 인물들이지만 여기 ‘천상’에서 바라보니 오늘의 한국사회와 민족공동체가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하겠다면서 국민 대다수를 좌파, 곧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독재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행적을 미화하는가 하면 친일파의 죄상을 역사에서 지우려 들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쿠데타가 불행하게도 성공한다면 김영삼 동지와 저의 민주화투쟁은 역사에서 없던 일이 될 것이며 박정희 정권이 저를 납치해서 바다에 수장하려던 사건도 쓰레기더미에 묻혀버릴 것입니다. 노무현 동지가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에 맞서 벌인 사투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일도 전혀 기록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노무현: 마지막으로 지금 박근혜 정권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해주실까요?
김영삼: 박근혜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동지나 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입니다. 그는 유년기부터 육군 고위 장교의 딸로서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 수 없는 온실에서 자랐습니다. 저도 거제도에서 멸치사업으로 부를 일군 아버지 밑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중고교와 대학 시절은 물론이고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도 부모의 품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왔습니다. 삶의 고통과 보람이 무엇인지를 모르니 국민의 가난과 애환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가 아버지의 친일행적과 독재에 대해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이 아직도 영웅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국민의 90%를 좌파로 몰아붙이면서 역사쿠데타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김대중: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와 민족공동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이 전혀 없는 인물로 보입니다. ‘국민 대통합’을 외치면서도 국민을 갈등과 분열로 몰아가는 ‘정치공작’을 일삼고 있으니 나라가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최종 책임자이면서도 300여명의 희생자들과 유족에 대해 단 한 마디 사죄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성의 부재’를 입증합니다.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직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농민 백남기 씨와 그의 가족에 대해 아무런 유감의 뜻도 표하지 않는 것은 국정최고책임자로서 너무나 파렴치한 작태입니다. 김영삼·노무현 동지라면 병원에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을 것입니다.
노무현: 저도 대통령 재임 시에 칭찬보다 비판을 더 많이 받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하루라도 빨리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는 평화와 공존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고 경제는 최악의 불황에 빠졌으며 외교는 균형을 잃고 미국과 일본, 중국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습니다. 김대중 선배님과 제가 추진하던 남북통일의 기본 작업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보람차게 살 수 있는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박 정권은 개헌이나 이원집정제를 통한 영구집권을 꾀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가 몰락한 원인과 과정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분 선배님과 저는 비록 세상을 떠나 있지만 언제나 조국에 민주적인 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고 있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두 선배님의 영혼에 언제나 평안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도 두 분의 곁을 성심으로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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