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놀랐던 일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선생님이 학생에게 질문할 때에 답변하는 학생으로부터 공포심과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고, 둘째, 점심시간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학교 밖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고, (미국은 고1에 해당하는 만 16세가 되면 운전면허 취득 가능.) 셋째, 학생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규칙과 제도가 생각보다 매우 허술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첫째와 둘째 모두 넓은 의미로는 셋째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겪은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국에서 학생이 수업에 빠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서명이 들어간 ‘notice of abscence’(결석통보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아시아계 및 히스패닉계 부모들의 상당수가 맞벌이를 하고 있는데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안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이 부모 동의하에 대신해서 서명을 합니다. (가끔은 동의절차가 생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고등학교가 커리큘럼제로 운영되다 보니 학생들이 해당과목 선생님들에게 할당된 교실을 매 시간 입실하고 퇴실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시험문제 유출 가능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학생은 1교시에 화학을 듣고, 어떤 학생은 3교시에 화학을 듣는데 그들이 받게 되는 시험문제는 동일합니다. 그러니 1교시에 먼저 시험을 치룬 학생이 3교시에 시험을 치룰 학생에게 문제를 다 가르쳐주면 미리 답을 다 찾아서 100점을 맞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한국 학교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가능하다면 아마도 학생들은 마음 놓고 결석통보서를 학교에 제출하게 될 것이고, 시험문제를 미리 파악한 뒤 시간대 학생들 중 만점자가 속출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학부모들의 항의와 언론의 무차별 비난으로 학교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미국 학교에서 이와 같은 일이 좀처럼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몇몇 친구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매우 황당하다는 듯…
“That's not right, and that's cheating!”(그것은 옳지 않아. 그리고 그것은 부정행위야!)
시험문제를 빼돌리려고 해도 이를 필요로 하는 학생이 있어야 하고, 결석통보서를 위조하려고 해도 함께 거짓말을 하고 수업을 빼먹을 학생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 학생들도 수업을 땡땡이치기는 합니다. 다만 이 경우 대놓고 빼먹지 편법으로 결석통보서를 제출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이에 따른 불이익도 감수하지요.
물론,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만으로 미국의 모든 학교들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를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엔론 회계부정 스캔들’에 있어서 미국 언론과 사법부가 보여준 모습에 한국인 상당수가 신선함을 느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와 같은 학교에서의 살아있는 교육과 체험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교과서 국정화가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현재의 법률체제가 정부 고시만으로 국정화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입법부나 여론이 개입할 성격의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 속에서 저는 제도의 허점을 이용하여 부모의 동의가 있는 듯 태연하게 결석통지서를 제출하거나, 시험 문제를 미리 알아내어 답을 딸딸 외워서 고득점을 하는 영악하고도 부도덕한 학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 또한 교육적 목적에 부합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정화는 온갖 편법, 졸속행정, 무책임, 무질서, 모순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행정부가 입법부의 견제 없이 월권행위를 스스럼없이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사법부는 팔짱만 끼고 있으며, 대표 필진으로 선임된 교수는 성추행 논란으로 중도 하차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교육백년대계라고 가르치면서도 그 근본이 되는 역사교과서 집필은 1년이면 충분하다고 강변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과연 우리 청소년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역사교육 정상화를 하겠다며 청와대, 여당, 행정부가 보여주는 모습 속에서 우리 청소년들은 강자는 어떠한 편법도 모순도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서 얻어내면 된다는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를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음주 논란이 있건, 성추행 전력이 있건, 피해망상증이 있건,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콘텐츠를 맞춤형으로 만들 능력만 있다면 모두 끌어 모아서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해도 된다는 뻔뻔함과 교활함에 대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올바른 내용”이면 뭐하겠습니까? 그 제작 과정이 부도덕과 불법으로 얼룩져있다면…
사실, 우리 사회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사교육 정상화”가 아닙니다. 공정한 게임의 룰이 정해지고, 그것을 위반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이익을 받고 이에 순응하며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는 사회의 규범, 질서 및 도덕성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우리 사회는 존중과 배려가 자리 잡는 건전한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어떠한 부정과 편법도 없이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들만 있다면 그들은 동료 학생으로부터 진정한 존경과 부러움을 받게 될 것이고, 비록 성적은 안 좋더라도 도덕과 규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을 모두가 인정한다면 사회가 이들을 기꺼이 포용할 수 있겠지요. 미국 사회의 건강한 시스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도덕과 규칙에 대한 존중이 자리 잡지 못할 경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감수해야만 합니다. 결석통보서의 위조 가능성을 막기 위해 부모에게 확인 전화를 일일이 해야 하고, 인감증명서까지 제출토록 하여 진위를 확인해야 한다면 그만큼 사회적 비용이 지출되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시험문제의 유출 가능성을 막기 위해 시험 볼 때마다 다른 유형의 문제지를 사용해야만 한다면 이것 역시 그만큼의 사회적 비용이 지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몇십 년 동안 별 탈 없이 운영되어온 SAT와 TOEFL의 문제은행 제도가 한국 학생으로 인해 딜레마에 빠진 것도 이러한 잘못된 문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결국, 문제은행의 데이터 량이 아무리 많더라도 10년이면 모든 문제유형들이 노출되게 됩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년 교수들과 선생님들을 모처에 가둬놓고 문제를 출제토록 하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풍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육 정상화”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도 한참 잘못 끼워졌습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역사의 정상화”는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역사…교…육…의 정상화” 거리가 멀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역사 내용이 정상화되면 뭐합니까? 그것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삶의 지혜와 역사적 교훈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고 굴복시켜 강자가 된다면, 어떠한 편법과 부도덕함도 모두 덮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면 말이죠. “교육의 비정상화”의 극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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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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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각에도 광화문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는 청소년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만이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유일한 길”이라고 부르짖는 어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아마도 이것이겠지요.
“아이는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자라지 않고 어른들이 행하고 보여주는 대로 자란다”고 말이죠. 그러면서 다시한번 그들에게 질문할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사교육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면 과연 올바른 국가와 국민이 될까요?”
이진우 / 한국정치커뮤니케이션센터(KPCC)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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