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기고] 12.19 해고 없는 세상, 김진숙 쾌유와. 복직으로 가는 희망버스 ①
"35년의 긴 세월동안 김진숙이 해고노동자들의 싸움에 함께 할 때 정작 그의 복직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머리는 하얗게 세고, 암은 다시 그의 몸을 파고들었습니다. 해고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김진숙의 뒤늦은 복직을 위해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겠습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2011년 희망버스 각계 부문 차장과 승객들이 다시 모여 희망차에 오릅니다. 2-3회에 걸쳐 릴레이 기고를 싣습니다. [편집자말] |
▲ 35년 전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지난 10월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자신의 복직을 촉구하는 원로선언 기자회견에 참석해 "저의 해고가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던 문재인 대통령님, 저의 해고는 여전히 부당합니까? 옛동지가 간절하게 묻습니다"라고 복직 의지를 피력했다. | |
ⓒ 유성호 |
2020년 6월 23일 당신의 복직투쟁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년 여름 뒤늦게 들었던 당신의 투병 소식에도 저는 안타까운 마음만 끌어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아직 다 낫지 않은 몸으로 부산에서 100km를 걸어 대구까지 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영남대 의료원 건물 옥상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을 하던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대구에 다다를 쯤에는 당신이 홀로 걷기 시작한 그 길을 따르는 순례단이 수백 명이 되었다 했지요. 저는 그 모든 소식을 그저 활자로만 접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32년간의 삶을 뒤흔드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의 선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인지를 돌아보느라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습니다. 그때 당신이 아픈 몸을 이끌고 또다시 연대의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몸을 일으켜 제 곁의 공동체 식구들을, 흔들리고 지친 동료들을, 우리보다 더 외롭고 가난한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해고되었던 1986년,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인천에 있는 오래된 바닷가 공장지대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이웃이, 아이들이 저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없다는 현실과 직면해야 했고, 32년간의 삶을 되돌아봐야 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지치고 두려웠습니다. 그때 당신이 대구에 도착해 방문진 지도위원을 만나 얼싸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털모자를 쓰고 외투를 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언니의 고공농성에 가슴이 철렁
여전히 부끄럽고 미안했지만 당신이 참 고마웠습니다. 저도 그때 더는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곁에 있는 동료들의 손을 잡았습니다. 2020년 가을 SNS로 당신이 영도조선소 정문 앞에서 35년 전 용접공이던 당신의 사진을 들고 서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복직 투쟁을 시작했다는 것을 그새 또 잊고 있었습니다.
9년 전이던 2011년 1월, 당신이 35m 높이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미 고공농성이 낯설지 않을 때였습니다. 현대미포조선의 노동자가 투신한 뒤 100m 굴뚝에서 노동운동가들이 고공농성을 했고, 인천 GM대우자동차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굴뚝에서 농성을 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당신의 고공농성에 가슴이 철렁했던 이유는, 그곳이 85호 크레인이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 9월 9일, 당신의 동료 김주익 열사가 삶을 내려놓았던 그 곳. 자신의 몸을 내놓아 많은 동지들을 살릴 수 있다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던 김주익 열사, 아들에게 힐리스 운동화 한 켤레 사주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그 김주익 열사가 목을 맸던 85호 크레인. 당신은 그곳으로 "땅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는 쪽지를 남기고 올랐습니다. 자신의 복직이 아닌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서였습니다.
항상 당신의 선택은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2011년 여름, 미래의 노동자가 될 우리 아이들에게 당신의 싸움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로 가는 희망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한밤중에야 도착한 영도조선소 앞, 경찰에 의해 길이 막혔습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던 아이들이 아저씨들 손을 잡고 담장을 넘었습니다. 공장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들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노동자 삼촌, 아저씨들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 뒤로 네 번을 더 희망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은 지금 스물 둘 청년이 되어 대학에 다니거나 군인이거나 노동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그 영도조선소 밖에 있습니다. 저는 그때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갈 때마다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크레인 위의 당신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당신의 몸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왔을 때, 투쟁의 승리보다 당신이 무사함이 더 고마웠습니다.
▲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오는 김진숙. 웃음이 해맑다. | |
ⓒ (주)시네마달 |
최초의 여성 용접노동자로 정년 퇴직하기를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자신이 평생을 불복종의 삶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당신의 저항이 그리고 정의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양심을 깨닫게 하고, 세상을 변하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저도 믿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복직에 우리가 함께합니다.
복직한 당신이 회사 식당에서 동료들과 밥을 먹고, 동지들과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다시 용접을 하며 소금꽃을 피워내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용접노동자로 정년 퇴직의 날을 맞이하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35년 동안 당신과 함께 길 위에 섰을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최강서가 하늘에서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해고자로 살아온 35년을 저는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삶은 해고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복직은 해고자 모두의 복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몹시 아프고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당신이 해고된 뒤 경험한 일곱 번의 정권, 그들의 비호로 더 큰 부자가 된 대기업들이 당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해도 당신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지워지지 않은 당신에게 우리는 큰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사람들이 모입니다.
▲ 왼쪽 눈 밑이 용접 불똥에 맞아 부어있는 40여 년 전 김진숙 지도위원의 사진 | |
ⓒ 김진숙 |
전태일 열사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우리는 그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기억합니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복직을 볼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아는 김진숙, 우리의 전체이고, 우리의 일부입니다. 당신의 복직이 우리의 복직이고, 당신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이고, 당신의 건강과 안녕이 우리의 건강과 안녕입니다.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 연대의 힘을 보여준 당신의 노년을 함께 지켜보고 함께 가고 싶습니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가 더는 이어지지 않도록 우리 함께 살아서 계속 싸우자고 당신께 손을 내밉니다.
먼 부산과 인천에서 만날 날은 적었지만 비슷한 삶의 꿈을 꾸며 살아온 지난 35년. 첫 공장생활 때 만났던 언니들을 생각하며 조심스레 언니라 불러봅니다. 진숙 언니, 부디 건강하시고, 복직해서 정년은퇴의 날 활짝 웃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2020년 12월 10일.
당신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떠났던 강화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김중미가 씁니다.
- <괭이부리말 아이들> 동화작가
▲ 리멤버 희망버스 포스터 | |
2020년 김진숙 복직 2020명 선언
- 선언 기간 : 12월 8일(화) ∼13일(일)
- 선언 참여 : https://bit.ly/김진숙복직2020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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