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입력 : 2020.12.08 06:00 수정 : 2020.12.08 09:30
실상
재판이 끝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대법원에서 승소한 사건이 헌법재판소를 거쳐 대법원에서 다시 패소로 뒤집힌다. 이는 헌재가 어떤 법률이 특정 사건에 적용되면 위헌이라는 전에 없던 주문(主文)을 내면서 시작됐다.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는지 가리는 대신 특정인에게는 어떤 법률을 적용하지 말라고 결정하고 있다. 과거에는 재판권 침해라며 강하게 반발한 대법원도 태도를 바꿨다. 헌재 결정이 더러 받아들일 만한 것도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난받는 판결을 수습하는 방편인데, 이 과정에서 헌재 결정을 다시 손보기도 한다.
헌재와 대법원의 모호한 태도가 조금씩 알려지자 “법에서 나만 빼달라”는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운이 좋으면 헌재가 받아들일 것이고, 더 좋으면 대법원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공단을 속였다가 유죄를 받아 면허가 사라지게 된 의사는 “내가 저지른 시력교정술 관련 혐의는 사기죄에서 빼달라”고 헌법소원을 냈다.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을 받아 공직을 잃게 된 정치인은 “3심은 양형부당을 다루지 못하게 한 형사소송법에서 정치인은 예외”라고 헌법소송을 냈다. 최근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검사징계법에서 검찰총장을 제외해달라는 헌법소원을 냈다.
이러한 상황은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과거사 피해자에게 적용해선 안 된다고 2018년 헌재가 결정하고, 이듬해 대법원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됐다. 판사들은 “이제는 헌재가 법원의 판단을 일일이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대법원을 최종심으로 한다는 헌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대법원도 문제라고 한다. “이렇게 특별한 헌재 결정을 수용하면서 아무런 설명을 안 했다. 대법원이 재판에 대한 간섭이라고 주장하면서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다. 입맛에 따라 헌재 결정을 고르겠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이 3심제인지, 4심제인지 아니면 5심제인지 아무도 모르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헌법에 합치되는 법률이라도
적용 범위 좁혀 ‘위헌’ 주장 늘어
요즘 헌법재판소에 지금까지 없던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어떤 법률이 헌법에 합치된다 해도 ‘내 사건에 적용되면 그때는 위헌’이란 소송이다. 특정 법률이 적용되는 사건들 가운데 비슷한 것들을 추려, 이런 종류에 적용된다면 법률의 그 부분은 위헌이라는 주장이다.
정치인 A씨도 최근 이런 헌법소송을 냈다. 먼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을 받으면 공직선거법에 따라 피선거권이 5년 동안 없어진다. 이미 공직에 있는 사람은 옷을 벗어야 한다. A씨는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검찰에 기소돼 2심에서 벌금 300만원을 받았다. 정치인으로서 위기였다. 3심에서 유무죄가 바뀌지 않는다면 양형이라도 깎아야 했다. 하지만 형사소송법은 3심에 가는 이유로 양형이 너무 높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대법원은 법률심이라 양형부당 주장은 사형·무기징역 같은 특별한 경우만 인정한다. 그러자 3심 가는 길을 까다롭게 한 형사소송법 제383조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헌이 나올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그래서 형소법 제383조가 자신의 혐의인 정치자금법 제45조 위반으로, 벌금 100만원 이상 받은 이에게 적용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를 법률문장으로 다듬어 “형사소송법 제383조가 정치자금법 제45조 위반의 죄를 범한 자로서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의 선고를 받은 경우에까지 적용되는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했다.
이는 아주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동안은 법률 조항 전부 혹은 특정 어절이나 단어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똑떨어지는 위헌 결정이어야 그 결정문을 받아든 법원이 승소 판결, 무죄 판결, 재심 판결을 해줬다. 이렇게 조항이 통째로 사라진 사례로 간통죄 위헌 결정이 있다. 2015년 헌재는 ‘배우자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는 형법 제241조 제1항을 마침표까지 모조리 없앴다. 일부 문장을 무효로 하기도 한다. 2009년 혼인빙자간음죄 위헌 결정이 그렇다. 헌재의 주문은 “형법 제304조 중 ‘혼인을 빙자하여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이다. 그래서 전체 조항인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습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가운데 ‘혼인을 빙자하거나’만 삭제됐다. 남아 있던 ‘위계 간음’은 2012년 국회가 없앴다.
정치인 A씨와 같이 3심으로 가는 길을 정치인에게만 열어달라는 주장도 가능한 것일까. 사업에 실패해 돈을 못 갚아 징역 9년을 받아도 양형이 높다는 이유로는 3심에 가지 못하다. 허위진단서를 써줬다가 금고형을 받아 면허가 없어지게 생긴 의사도 벌금형으로 깎아달라고 3심에서 말할 기회가 없다. 그런데 정치인은 벌금 100만원 이상 받으면 출마를 못하니 3심까지 가게 해주지 않으면 위헌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인도 사정이 있겠지만, 사업이 망한 사장도 딱하고, 피치 못할 부탁을 들어준 의사도 억울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런저런 사정 다 봐주면 도대체 법은 어떻게 되는 걸까. 정치인 A씨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보는 사람들(주로 판사들이다)은 헌법재판소법 제45조를 들이민다. “헌법재판소는 제청된 법률 또는 법률 조항의 위헌 여부만을 결정한다.” 법률 전부를 없애든가 조항을 없애라고 했지, 누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나눌 권한을 줬냐는 것이다. 헌재 재판관이 이제 국회의원 행세까지 하느냐고 비난한다.
헌재, 일단 ‘각하’로 대응하지만
행간 추출해 위헌 결정하는 등
일관된 입장 없이 건마다 달라
대법, 태도 모호해 논란 부추겨
그렇지만 꼭 그렇지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눠 없애기도 하는데 대법원도 인정한 바가 있다. 과거 법원은 명예훼손을 저지른 사람에게 곧잘 사과광고를 명령했다. 근거는 민법 제764조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 대하여는 법원은 피해자의 청구에 의하여 손해배상에 갈음하거나 손해배상과 함께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을 명할 수 있다”이다. 그런데 헌재가 1991년 이 조항에서 사죄광고라는 형태를 추출해 위헌이라고 했다. “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에 사죄광고를 포함시키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이다. 2014년에도 헌재가 야간 옥외집회와 시위 처벌 조항에서 시간을 추출해 위헌을 선고했다. “누구든지 일출시간 전, 일몰시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집시법 제10조에 대해, 일몰시간 후부터 같은 날 24시까지 부분이 위헌이라고 했다. 조항에 써 있지 않은 24시를 만들어낸 것이다. 무엇보다 두 결정 모두 대법원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두 결정이 매우 드문 예외라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문장을 추출해 내리는 위헌 결정 대부분을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주특별법에 따라 환경영향을 평가하는 심의위원회가 있다. 이곳 위촉위원 B씨가 업체에서 현금을 받았다며 검찰이 뇌물죄로 기소했다. 그런데 뇌물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공무원뿐이다. 사인(私人)은 돈을 받아도 다른 죄로 처벌된다. 형법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그 직무에 관하여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제129조 제1항에서 정했다. 해당하는 사람은 국가·지방 공무원이다. 아니면 다른 법률에서 ‘형법 제129조에 해당하는 공무원으로 본다’고 의제(擬制)해야 한다. 제주특별법에는 의제 조항이 없었다. 그런데도 뇌물죄 ‘공무원’에 제주특별법이 정한 위촉위원이 포함됐다. 대법원이 그렇게 봤기 때문이다. 이에 2012년 헌재는 형법 제129조 제1항 ‘공무원’에서 제주특별법 위촉위원 부분을 갈라내 위헌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사이 징역형이 확정된 B씨의 재심청구도 기각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무슨 일인지 지난해부터 정치인 A씨와 같이 ‘내 사건에 적용되면 그때는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위헌소송이 크게 늘고 있다. 헌재 소식에 밝은 법조인은 “법률 적용 범위를 (나에게 적용되는 부분으로) 구체적으로 좁혀 위헌이라 주장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의사 C씨는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시력교정술 진료를 하고도 보험적용 진료를 했다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속여 돈을 타냈다. 2018년 사기죄로 유죄가 났다. 그러다 지난해 항소심에서 갑자기 사기죄가 ‘내 사건에 적용되면 그때는 위헌’이라고 했다. 사기죄를 정한 형법 제347조 제1항은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이다. C씨는 “ ‘기망’에 ‘시력교정술 전후의 진료행위 후 건강보험공단에 이에 대한 요양급여를 청구하는 것’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며 헌법소송을 냈다.
밀려드는 새로운 소송에 헌재는 각하로 대응하고 있다. 법률을 해석하는 법원으로 가야지 법률을 심판하는 헌재로 오면 어떡하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헌재가 받아준 사건과 각하하는 사례는 얼마나 다를까. D씨는 발광다이오드(LED) 제품 제조업체와 영업위탁 계약을 맺고 일한다. 관공서에서 납품계약을 따내면 LED 제조사가 20~30% 판매수수료를 준다. 2018년 D씨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019년 3심에서 자기 사례에 적용되는 변호사법 부분은 위헌이라고 했다. 제111조 제1항은 ‘공무원이 취급하는 사건 또는 사무에 관하여 청탁 또는 알선을 (후략)’이라고 정하고 있는데, ‘공무원이 취급하는 사무’에서 공무원 본연의 업무가 아닌 LED 구입 같은 사적거래 부분은 빼야 한다고 했다. 헌재는 “(이 사건은) 조항 자체의 고유한 위헌 여부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법원의) 단순한 포섭·적용을 다투는 것”이라며 각하했다. 그러면서도 “적용 부분의 위헌성을 주장하는 청구는 원칙적으로 적법하다”고 했다. 이러니 헌재의 입장을 여간해서는 알기가 어렵다.
헌재 소식에 밝은 한 법조인은 “최근 법률이 적용되는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해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소송이 잇따르는 원인은 2018년 헌재가 대법원의 부당한 과거사 판결을 정리한 결정에 있다. 취재에 응한 법조인은 “언론과 여론이 일제히 환영한 결정이지만 사실은 부정의를 수습하려 무리한 면이 있다”면서 “언제 어떻게 재판이 끝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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