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교수
- 김상일
- 입력 2020.12.13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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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북야영 기지의 밤
평소 머릿속에 늘 가지고 있던 현대사에 대한 의문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 원자폭탄 두 번이나 세례를 받고도 왜 저렇게 미국의 개 노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오히려 미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가 전 세계에서 반미감정이 가장 높다는 통계도 있는 마당에 말이다. 백주대낮 서울 한복판에서 미국 대사의 얼굴에 칼자국을 낸 곳이 일본일 것 같은 데 그 반대인 이유를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가 새삼 알아야 할 사실은 일본은 연합군에 대해서도 항복한 것이 아니고, 조선에 대해서도 항복한 것도 아니다. 일본 천황은 당연히 항복문에서 조선에 대해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문제는 숙제로 남겨져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은 ‘미국에만’ 항복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은 당시 밀려 내려오는 구 소련군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만큼 소중한 존재가 없었고, 그 때문에 일본은 항복은 하지만 푸들로 잘 길러 줄 것을 미국한테 항복과 함께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약속은 지켜졌고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패자인 동시에 승자의 위치에 엄연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도 기적적으로 성장했고, 한미일 동맹 구실로 한반도 재진출의 길도 탄탄대로이다.
이렇게 일본이 ‘애지중지’ 미국의 푸들로 된 것은 항복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에 잡혀갔던 한국 사람들이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만세를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일본형사에 의해 사살 당한 예들이 다반사로 있었다. 그러면 일본 안에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 안에서 사정은 어떠했던가?
미국이 8월 15일 일본 관동군 사령관에게 내린 ‘대륙령 제1381호’에 의하면, “따로 명령을 내릴 때까지 각각 임무를 계속할 것, 군기를 엄격히 세우고 단결을 공고히 하여 한결 같은 행동을 취할 것...”과 같다. 미군이 우리 상해임시정부에 내릴 법한 내용이 아닌가?
이에 맞장구나 치듯이 8월 18일 조선군 관구 보도국장이란 자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와 조선군은 엄연히 건재해 있다”고 방송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군’이란 일제 침략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미국에 항복은 해도 조선 지배는 계속될 것이란 약속을 미국은 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조선군’이라 엄연히 호칭한 것이다. 해방 후 3일이 지난 다음에 나온 방송이다.
8월 20일에는 일본군 경성사관구 사령관이란 자를 ‘경성 경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드디어 8월 30일에는 “조선은 황국의 영토이며 조선 인민은 황국의 신민이다. ...독립운동은 허락하지 않는다. 조선 국기 게양은 엄금한다. 치안 유지를 위한 단체 결성을 허락하지 않는다”(‘조선 종전의 기록’ 중에서) 모두 일본 천황 항복문서 이면에 적힌 내용 그대로이다.
그러면 1945년의 대륙령 제1381호가 지금은 무효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 대륙령은 미국의 지시 하에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대로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지금 우리 역사의 현주소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설령 미국에는 항복을 했어도 조선 지배를 계속하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일본을 내 세워 그대로 조선 지배만은 허용하려고 했었다. 그러면 왜 미국은 그런 착각 아닌 착각을 했을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은 자주적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없는 나라이고 누군가가 대신 다스려 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19세기 말부터 일본이 전 세계에 선전해 놓고, 이를 자신들의 조선 식민 통치에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은 사대주의 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자주 독립할 수 없다는 이 논리가 전 세계에 만연돼 있었고 미국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은 물론이다.
1910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했던 밀사들이 현장에서 목격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준 열사의 비분강개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에서 3인의 대표들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각국 지도자들에게 줄 뇌물을 사는 장면들, 그러나 가져다 바칠수록 ‘너희는 사대근성에 망하도록 돼있는 존재’라는 것이 답이었다.
그러면 미국과 일본의 이 밀애密愛를 순간에 좌절시켜 그것이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자각시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조소 국경지역 북야영 기지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의 패망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할 곳이 소련의 남하였다. 생각보다 쓰나미같이 파죽지세로 소련군이 밀려 내려오는 것을 본 미국은 상상 밖이었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사람들이 신질서에 도취돼 행복에 젖어 있을 때이다.
김일성 회고록 7-8권은 김일성 부대가 산에서 내려와 하바롭스크 시가지를 지나가면서 본 기록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하바롭스크 시가지를 남녀 쌍쌍이 지나가는 모습을 본 김일성 부대원들이 누더기 옷을 입고 산에서 갓 내려와 망국노의 신세의 참담한 모습을 그려 놓은 기록은 가장 눈물겨운 회고록의 한 장면이다.
혁명 직후 자기 나라 안도 아직 허술한 틈에 참가한 소련군이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떠밀려 전쟁에 참가한 마당에, 소련이 무슨 애착을 가지고 일본 정예군과 목숨 바쳐가며 싸워줄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일본은 패망은 해도 조선은 놓지 않겠다는 입장인데 이를 안 소련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할 의지를 담보할 수는 없었다.
일본이 항복은 해도 조선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일본이 대륙 진출의 교두보가 조선이기 때문인 것은 오랜 역사가 그대로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조소 국경지대에 첨예 정예부대를 배치, 참호를 수천 개 설치한 후, 대포까지 배치해 놓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철옹성’이었다. 이를 본 소련이 어떻게 이 방어선을 뚫고 남하할 엄두조차 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날 밤 비마저 내리는 백아영 기지에서 출정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돌격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그 단서는 김일성 조선인민해방군(‘혁명군’)이 그 동안 쌓은 사기와 강한 의지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인민혁명군은 국내 진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37년 보천보 전투는 그 신호탄일 뿐이었다.
이어 1939년 ‘고난의 행군’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 진출을 위한 계획된 작전이었다. 흰 눈 덮인 백두산을 이정표 삼아 이동하기 시작한 혁명군은 백두산 삼지연에 집결, 각 곳에 밀영을 꾸린다. 고난의 행군은 일본군을 100여 일 동안 눈구덩이 속을 끌고 돌아다니며 일본군을 탈진시키기 위한 전투 아닌 전투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은 고난의 행군을 통해 강철 같은 정신력을 배양했으며, 이 정신력은 주체사상의 원동력이 되었다. 모세의 40년 광야 행군이 유대교를 탄생케 했듯이 위대한 종교와 사상은 고난의 씨앗이다. 누가 주체사상을 한 개인 숭배를 위한 조작된 것이라고 하는가?
그 이전, 간산봉 전투 등에서 자신 감을 얻은 조선인민혁명군은 항공 낙하산 훈련과 도하를 위한 부교 설치 훈련 때문에 잠시 소련에 들른 다음, 국내 진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다. 드디어 1945년 8월 9일 혁명군 사령관은 ‘조국해방을 위한 총공격전을 개시할 데 대하여’라는 명령을 내린다. “우리 민족이 일일천추로 갈망하던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성취할 결정적 시각이 목전에 도래했다”로 시작되는 명령은 즉각 실천에 옮겨져 파죽지세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작전회의에서 소련군은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요새’는 난공불락 마지노선이기 때문에 요새 돌파를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지만, 김일성 사령관은 요새를 정면 돌파하지 않고는 승기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 두만강 유역의 토리 요새부터 급습해 대성공을 한다.
이 장면을 본 한 소련군 장교는 ‘나진해방전투를 보고서’란 수기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전투일 것이라고 판단한 전투에서 “우리는 조선 빨치산들이 일본군의 통로를 막고 그들이 도시를 빠져 나갈 수 없도록 만들게 된 것을 알았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무기를 내 던지고 포로로 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나바론을 점령하는 만큼이나 기적적인 승리를 거둔 첫 번째 전투였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혁혁한 용맹스러움을 소련군들과 장교들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들이 주도권을 잡고 혁명군은 추종세력일 줄 알았는데, 그 반대 장면이 눈앞에 벌어진 것이다. 소련군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용맹스러움에 오히려 역으로 사기가 진작될 정도였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소련 장교들은 일기와 수기에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역사 기록은 마치 소련군이 주도권을 가졌고 김일성은 소련군의 한 장교에 불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련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할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조선인민혁명군이 주동적으로 추동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은 해도 결코 조선만은 전초기지로 삼아야 하겠기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허망한 꿈은 이렇게 조선인민혁명군에 의하여 여실히 콩가루가 되고 말았다. 만약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없었더라면 해방된 후에도 조선은 여전이 일본의 통치하에 지금까지 있었을 것이고, 미국은 당연히 이를 허용했을 것이다.
조선은 수천 년 사대주의 하던 나라라 결코 자주적으로 한 나라를 경영할 수 없는 국민성 소유자들, 그래서 누군가는 대신 통치해 주어야 하는데, 미국이 볼 때에 누구이겠는가? 자기가 아니면 일본. 자기들이 하는 것보단 일본이 해 주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너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신탁통치 23년 운운이 그들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온 것이다.
패자이면서 승자 노릇하는 일본의 코스프레
일본은 패자이면서 승자 노릇을 코스프레 하려고 했다. 이런 만용적 기세를 꺾은 것이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일본의 천년 야망은 대륙 진출이고, 그 전초기지가 두만강 유역의 국경 요새였다. 망해도 이 요새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의 속셈을 늦게나마 읽어야 북조선과 우리 현대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일제는 1930년대부터 소위 자기들이 자랑하는 ‘난공불락 방어선’을 두만강 일대, 중소국경 일대에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 개 요새에 튼튼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영구 화점’과, 기관총이나 포를 사격할 수 있는 ‘토목 화점’을 평균 500여개나 구축하였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화점들을 만들었다. 여기에 탱크 차단벽까지 포함하면 수천 개의 방호벽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다 정예 관동군까지 배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의 강철 같은 정신력 앞에 철옹성이 모래성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소련군은 아예 엄두조차 낼 수 없다고 판단, 우회를 강조했지만 김일성 사령관은 이곳을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국내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승패를 좌우하는 바로 이곳을 혁파해야 한다고 실천에 옮겼다. 그 첫 번째 타격 요새지가 토리 요새였으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김일성 사령관은 오백룡 소부대에게 토리 요새 습격에 대한 구체적인 작전 명령을 내렸다. 마침 “비가 내리는 야심한 밤에 작은 배로 두만강을 건너 경찰관 주재소를 불시에 습격, 적들은 미쳐 반격을 가할 틈도 없이 혼비백산 쓰러지고 흩어지고 말았다.”
일시에 토리를 해방구로 선포하고 난 다음, 웅기-나선 요새를 습격했다. 이렇게 요새들은 도미노 같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훈춘현 남별리 요새-경흥 요새-훈융 요새-웅기-나진지구-청진지구-무산-단천-신의주-평양-안주-개천-황주-철원-경성 일대로 연결되는 혁명의 도미노는 요원의 불길처럼 타 올랐다.
나라가 없던 마당에 조선인민혁명군의 목소리를 대변해 줄 주체는 아직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민혁명군의 모든 전공은 소련의 몫이 되었다. 일본 대본영은 “만주는 버려도 좋으나 조선은 최후의 1선으로 절대적으로 틀어쥐고 있을 필요가 있다”며, 군사적인 재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 천황의 항복 목소리에 우리는 또 한 번 속고 말았다. 우리 세상이 온 줄로 착각했었다.
소련이 모든 작전을 틀어쥐고 있었고 김일성은 일개 소련군 장교에 불과했고 소련의 꼭두각시로 평양에 등장했다고? 그러면 꼭두각시가 어떻게 소련을 북조선 땅에서 내 보낼 수 있었던가? 앞뒤가 안 맞는다. 우리가 지금 미군을 한반도에서 내 보낼 수 있는가?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해방을 선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최근에는 미국의 입에서 미군이 한국에 영구 주둔하자는 결의안까지 내자고 한다고 한다. 갑오전쟁 이후 청과 일 두 나라 군대가 나라 안에 주둔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땐 잠시였다. 한미일 동맹 19조 같은 것은 일본의 재진주를 합리화, 합법화 한 것이 아닌가? 역사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승만이 새 정부 수립에 급급하지 말고 외세부터 추방하려 했다면 왜 이런 결과가 생겼겠는가? 단독정부를 세워서라도 권력부터 잡고 보자는 그 이승만의 심보, 아직도 역사는 심판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 바보 천치 같은 마지막 사무라이의 반값도 못한 미국 하버드 대학 박사의 행각이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 역사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들지 모른다.
만약 토리 요새 습격 전투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이 소련의 말을 듣고 우회 작전을 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북조선이 소련을 혁명 후 나가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날 밤, 한순간 사령관의 판단하나 때문이다. 단호히 정면돌파로 마지노선을 넘은 결단 말이다.
그러나 남한 일각에서는 모든 것이 소련의 사주에 의한, 소련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련은 방관자적 자세로 참가했지 적극적인 참가 자세가 아닌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단적인 예로 1945년 8월 9일은 소련군이 대일전 개시일인데,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실현되지 못했다.
그날 조선인민혁명군은 북야영 기지에서 만반의 전투 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작전에는 그 동안 국내 진공을 위해 낙하 훈련과 도강 훈련을 해온 부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취소된다. 그 이유는 스탈린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자국 군인들의 불필요한 손실을 막기 위한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군 지도부에서 볼 때에 국내 진공은 소련이 생각하듯이 타산지석이 아니었다. 우리 힘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저 부산과 제주도까지 파죽지세로 몰고 내려가 일제를 한반도에서 우리 힘으로 몰아낼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가 이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철옹성 요새 돌파를 통한 일제와의 정면대결로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힘은 소련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선인민혁명군에 있었다는 역사를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8월 9일 공격은 낙하와 도하라는 소련의 지원과 도움이 없이는 될 수 없었던 만큼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만주벌에서 중공당과 관계에서나 1940년대 소련군과의 관계에서나 조선이 양국에 대하여 당당하고 떳떳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이것을 뒤바꾸어 가르치고 있다.
8월 9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우리에게 행이고 불행이다. 불행이라 함은 우리 힘으로 조국을 완전히 광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일본 천황의 항복은 조국 광복의 상에 재를 뿌린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불과 며칠만 더 있었어도 우리 힘으로 충분히 광복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상상 밖으로 빠른 속도로 내려오기 시작하자 미국은 ‘한반도 분할 점령’이란 꾀를 부려 한 나라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미래와 장래는 아랑곳도 없이 미국의 대중 잡지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에 그려져 있는 한반도 지도를 내놓고 멋대로 선을 그었다. 그것이 원한의 38선이다. 일개 대령 본스틸과 중령 딘 러스크가 저지른 만행이었다.
그래서 조선인민혁명군은 38선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이 38선 안은 ‘일반 명령 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 보고돼,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자 보자. 맥아더는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에 고함’에서 “본관은 본관에 부여된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의 권한으로써 이에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하여 군정을 세우고 다음과 같은 점령에 관한 조건을 포고한다.” 총 6조 가운데 제3조에 의하면 “주민은 본관 및 본관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해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 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와 같다. 이틀 후에 발표된 포고 2호는 “조선인으로서 포고령을 위반하는 자는 사형 등 엄벌에 처한다.”이다.
청천벽력 같은 이 포고령을 들은 사람들은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고 인천에서는 인명 희생까지 있었다.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말 그대로 해방은 ‘한순간’이었다. 일본놈들한테 35년간 시달리다 기사회생 하는 듯하더니, 아니 봄이 온 줄 알고 밖으로 나왔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미국은 너무나도 황당하게도 그 일본놈들의 주구들 모두에게 한 자리씩 되돌려 주었고, 그 자리를 지금까지도 수구 보수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옆에는 권총 찬 미군들이 지켜 보호하고 있다,
한번 이 맥아더의 포고령을 위에서 말한 8월 15일 패망한 일본 관동군 사령관에 내린 ‘대륙령 1381호’와 ‘1385’ 그리고 8월 16일 악명 높은 ‘정치운동 단속명령’과 비교할 때에 무엇 하나 다른가? 항복한 일제는 ‘관내 일반 민중에게 고함’에서 민심교란 행위를 엄벌에 처한다고 했으며, 8월 18일 방송에서는 ‘조선군은 엄연히 건재한다’고까지 했다. 여기서 조선군이란 일본군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독일이 패망한 후 히틀러가 국회의사당 지하에서 권총 자살한 것과는 너무 다르다.
아베란 자가 저렇게 고압 자세로 나오는 데는 이미 해방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던 일이다. 일본은 미국에 항복하는 조건으로 일본군은 조선군으로 그대로 주둔하게 할 것을 담보 받은 것이다. 1381호와 1385호 그리고 맥아더의 포고 2호는 ‘일란성 쌍둥이’로 지금까지 국가보안법의 엄호를 받으며 건재하고 있다.
안타까운 이러한 현실과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은 38선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련마저 이 원한의 선을 인정하는 꼴을 보았을 때에 이들이 왜 소극적으로 전쟁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38선 철창 너머 고개를 남쪽으로 돌려 보았을 때에 거기에는 아직도 그들이 향해 싸우던 일제들이 그대로 남아 오히려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하나 하나 죽이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 6.25를 두고 남침이다, 북침이다 논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군 이래 유래 없던 민족상잔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왜놈들이고, 그 일본놈들과 그 앞잡이들이 38이남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저 북야영 기지에서부터 걸어내려 온 발걸음을 예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들에게 ‘적화통일 운운’ 하는 것은 넋두리이다. 북야영 기지에서 내려온 일군一群의 해방군일 뿐이었지 한 나라의 조직된 군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해방의 종은 누구를 위해서 울렸나? 민들레 핀 임진강 강변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익힌 도하 훈련과 낙하 훈련은 저 일제를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 쫓아내자는 것이었다. 반만년 우리 역사는 이 엄연한 현실을 어떻게 보고 판단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 남북 모두가 북야영 기지 그날 비 내리던 날 밤으로 되돌아 가 한번 우리 현대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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